환언베뢰아특강93(190510))
당부의 말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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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0환언특강(강석준집사님 정리)
복음중재로서의 의식
고린도전서 11:23-26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여기에서 사람들이 제일 많이 헷갈린다.
성경에 분명히 안식일도 있고, 절기들이 있고, 복장에 대한 규정이 있고, 다양한 의식들이 있다.
이스라엘 교회가 그렇게 했는데, 기성교회도 그렇게 하고 있다.
80년대에는 가운이 없었는데, 요즘은 가운이 생겼다.
로마 카톨릭에서 나온 후에, 가운이 없어졌는데, 요즘은 한국교회에 다시 가운이 생겼다.
영감이 없고, 권위가 없기 때문이다.
목사 안수식에서는 학교에서 받은 후드를 입고 하는 것이지, 그런 옷을 입으라는 절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 교회들이 구약교회들이 했던 것을 따라하고 있다.
하도 의식에 쩔어서, 의식이라는 말을 교회안에서 어떻게 가치가 인정받게 할까 하려니까, 신앙의식, 교리의식, 의식이라는 말을 자꾸 넣는다.
구약은 제사가 있지만 신약은 제사가 없다. 그런 의식이 없다.
의식이라는 말은 국어사전적으로 습관, 전통, 관습이라는 뜻이다.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니를 떠받드는 일은 어머니로 끝납니다. 이 시대에 효는 끝났다고 말했다.
부모님이 위독하다고 해도, 다들 신경쓰지 않고, 놀러다닌다.
그렇다고 해서 법을 어긴 것이 아니다.
이것이 관습이다. 의식이라고 한다.
우리의 구원은 관습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중재로서의 의식을 깨닫지 못하면, 영적인 치매걸린 사람이다.
치매걸린 사람은 오늘까지도 멀쩡했는데, 나가서 안들어 온다.
치매기가 있다가 발동을 한 것이다.
영적인 치매걸리면, 잘나가다가 방황한다.
벌써 다른 사람이 와서 여호와가 하나님이야 하면서 강력히 말하면 그런가 하고 헷갈린다.
창세기는 여호와란 이름을 썼지만, 그 당시 사람은 여호와란 이름을 몰랐다.
여호와란 이름은 모세 때 처음 들은 이름이다. 창세기에 여호와란 이름이 나오는 것은 모세가 창세기를 썼다는 증거다.
‘성경의 권위와 영감’을 읽어보라.
내가 다시 봐도, 이 책은 성령이 쓰셨구나하고 감동을 받는다.
지금도 누가와서 부채질하면 믿음이 헷갈릴 사람이 많다.
반석위에 세워진 것처럼 견고해야하는데, 의식이라는 것 때문에 많은 혼란을 겪는다.
의식이 왜 복음중재가 되어야 하며, 의식과 우리의 생명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잘 들으라.
성경에 두가지 의식이 있다.
관습적인 의식과 주님의 계명으로서의 의식이 있다.
내 때는 부모앞에 자식이 절대 복종하고 공경했다.
나는 요즘 생각하면서, 아버지와 나의 관계가 활동사진처럼 떠오르며 눈물이 난다.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고 공경했던 생각이 난다. 요즘은 그렇게 하면 미련한 사람이다.
요즘은 부모가 자식을 죽도록 모셔야 하는 시대다.
여론조사를 해보니, 결혼안하겠다는 사람이 70프로다.
먹여살릴 능력이 없다고 했다.
치매가 요즘 가장 심각하게 여기는 질병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치매를 망령들었다고 했다.
망령들린 사람 그 근처 가지도 못했다. 근처만 지나가도 그렇게 욕을 해댔다.
의식에 대해서 헷갈리면 안된다.
계명으로 받은 의식과 전통적인 의식이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발을 닦아주셨다.
베드로가 내 발을 닦으실 수 없나이다 하니 내가 닦지 않으면 내가 너와 상관이 없다 하시고, 내가 한것같이 너희도 형제들의 발을 닦아주라 하셨다.
요즘 이것을 세족식이라고 해서 의식으로 만들었다.
전세계 어디에서 세족식 하는 곳이 있던가.
예수께서 하라고 했는데, 왜 안하는가.
그것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예전에는 양말도 신지 않고, 바닥에 가죽만대고 끈만 묶은 신을 신었다.
그러니까, 발에 먼지가 잔뜩 묻었다.
성전에 들어갈 때, 성전앞에 물두멍이 있다. 거기에 손발을 닦고 들어갔다.
우리는 구원받을 사람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이다.
다시 구원받을 것이 없다. 이미 일러주신 말씀으로 깨끗해졌다.
우리는 이미 죄사함을 받아 구원받은 사람이지만, 우리 몸뚱이는 이 세상에서 구원받지 못했다.
이 세상은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주기도문에서 매일 시험들게 마옵시고 기도한다.
이 세상 사람들은 이미 다 시험에 들었기 때문에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이다.
신자들은 시험들면 세상에 가까워진다.
가정안에 예수 믿는 사람과 안믿는 사람이 있으면 날마다 시험든다.
교회에 나오면 기쁘다가, 집에 가면 시험든다.
이 세상에서 그런 시험이 없으려면,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
이 땅에서는 성결이 될 수 없다.
거룩하게 구별은 되지만, 성결은 육체를 떠나야 비로소 이루어진다.
다시말하면 육체를 떠나야 유혹이 없다.
마귀가 세상에 역사하는 한 끝없이 시험이 있다.
세상신들이 믿지 않도록 혼미케하는 생각을 넣는다.
겨울에 추우면 겉옷을 입고 보호하듯이, 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살려고 몸부림쳐야 한다.
시험에 들지 않으려고, 예수로 옷입고 노력한다.
그러나, 예수로 옷입지 않으면 금방 시험에 든다.
한번 시험에 들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내가 진리를 안뒤에 이 말씀이 제일 무서웠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시험에 잘드니까, 나도 시험에 잘 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게도 시험이 잘오지만, 쉽게 넘어지지 않는다.
발을 닦아주는 것은 매일 시험에 드는 먼지를 닦아주는 것이다.
먼지를 닦아주는 것은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웃의 먼지를 털어주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사 처음 나타나셔서하신 말씀은 평강이 있을지어다. 성령을 받으라. 뉘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라고 하셨다.
남의 죄에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다.
남의 죄에 간섭하다가 망하는 사람 많다.
율법대로 하면 예수가 죄인이다.
모두가 신앙생활은 이래야된다고 자기 기준을 세우고, 남의 죄에 대해서 정죄한다.
죄는 하나님으로부터만 사함받는 것이지, 사람에게 사함받는 것이 아니다.
자기 마음속에 남을 용서하지 않는 것이 있는가?
용서를 않는 것은 자기의 의로서 심판하는 것이다.
남을 정죄하면 너도 정죄받으리라 하셨다.
남의 죄에 대해서는 용서하고, 아예 못본채 하라.
그런데, 남의 죄를 보면, 퍼뜨리고 정죄한다. 이런 것들이 부활의 능력이 없고, 성령충만하지 않은 사람들이 하는 짓이다.
내가 심판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관대하라는 것이 아니라,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다.
발닦아주는 것도 남의 발의 먼지를 봤으면 네가 닦아주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사는 행습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발닦아줬다고 천국가지도 않고, 안닦아줬다고 지옥가지도 않는다.
그래서 교회에서 의식으로 세족식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관습이다.
그 시대에는 발닦아주는 것은 과거로부터 있는 관습이었다.
이것은 하면 덕이 있지만, 구원에 이르는 계명은 아니다.
구원에 이르는 계명이 아니기에 교회에서 사용하지 않는다.
개인은 하라.
예전에 부흥회에 가면, 샤워 다 했는데도, 대야에 물을 떠다놓고, 닦으라고 했다. 이것은 관습이다.
율법에 의해서 내려오던 관습이 있다.
율법은 사람의 영혼을 건지는 것이 하나도 없다.
율법이 있기전에도 아담이 지은 죄가 있어, 사망이 왕노릇했다.
율법이 있어서 죄인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선악과 사건이후 이 땅에 죄가 있다.
이스라엘에게 그것을 깨우치는 것이다.
저주받은 이유는 죄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육체의 율례를 주는 것이다.
그 때부터 이것은 죄다하고 생각하게 된다.
율법대로 살면 깨끗하다고 생각하지만, 회칠한 무덤과 같다.
육체의 예법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다.
사람의 공로로는 구원받지 못한다고 수없이 말하지 않는가.
백프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는다.
은혜받으라는데, 은혜를 못받고, 자기 잘난체하면 망하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향유도 부어주고, 발도 닦아주는 것이 있는데 다 행습이다.
율법은 육체의 예법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그것들은 계명으로 명하지 않으셨다.
주님의 계명으로서 의식이 있다.
구약때의 안식일은 지금의 토요일이다.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시다. 안식후 첫날도 성일이라고 하셨다.
이는 주의 날이다. 일요일인데, 기독교신자들만 주일이라고 한다.
주일도 주님이 주인이시고, 안식일도 주님이 주인이시다.(막2:27)
주님이 주인이시면, 안식일을 범하면 안된다는 것을 엄히 다스린 것이다.
오늘도 성일은 주의 날인데, 안식일과 똑같다. 신약도 엄격한 것이다.
그래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자들과 같이 하지 말고, 그 날이 가까이 올수록 더욱 그리하라 하셨다.
히브리서 10:23-27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성일은 매주 칠일마다 돌아온다.
창1에 안식일은 하나님의 안식일이라 하셨다.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말이다.
성일은 의식인데, 계명에 속한 의식이다.
요한복음 12:47-50
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찌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50.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계명은 영생이다.
주일성수는 영원한 생명에 관한 문제다.
모세의 율법이 있기 전에도 안식일을 말씀하셨고, 모세의 율법에도 다시 말씀하셨고, 예수께서도 다시 말씀하셨다.
내 영혼아 성일을 지키자.
하나님께서 성일을 포기하신 적이 없다.
성일은 아무렇게나 지내는 것이 아니다.
이사야 58:13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주일성수만 잘해도 시험에 들지 않는다.
주의 날이기 때문에 마귀가 틈타고 들어올 수 없다.
주의 날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이다. 성령강림하신 오순절이 주일이다.
사도행전 20:7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쌔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성찬은 관습된 의식이 아니라, 계명으로서의 의식이다.
고린도전서 11:23-29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찌니
29.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30.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31.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주께 받은 것, 곧 계명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주일성수하는 것,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떡을 떼고 잔을 마시는 것 성찬이다.
성찬을 범하는 것은 주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주께 판단을 받는 것은 경고를 받는 것이다.
병든 자도 많고, 잠자는 자도 많다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은 것이다.
이스라엘이 육체에 받은 형벌같이 징계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 복도 못받는다는 것이다.
육체가 받는 혜택도 받지 못한다.
교회 처음 나갈 때는 안식일 범하면 큰 일 나는 줄 안다.
시간이 지나면서 노련해져서 주일을 범하는데 담대하다.
주일은 주님을 위해서만 하루종일 주님이 기뻐하시도록 그분께만 복종하는 것이다.
침례 안받은 사람은 성찬에 참여하지 말라고 했다. 그 때 나는 침례받지 못해서 저 뒤로 가 있었다.
너무 부끄러워서 침례받기를 사모했다.
계명으로서의 의식은 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주님의 뜻대로 하지 않으면 자기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 하였다.
예수 믿는데도 왜 일이 잘 안되는가.
주께 징계를 받아서 그렇다.
율법 아래 있는 자도, 믿음 아래 있는 자나 이것은 똑같다.
너희 착한 행실을 인하여 하나님께 나오게 하라.
착한 행실은 주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착한 행실은 쑥맥같은 것이 아니라, 빛되게 살라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빛이 되는가. 빛은 하나님뿐이시다.
하나님의 계명 받은 사람이 빛이지, 계명도 없이 쑥맥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복음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는 빛으로 오셨고, 우리는 빛의 자녀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철저히 지키면 불신자들이 보고 두려워하며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한다.
세족식은 관습적인 것이고,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발 닦아주는 것은 언제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성찬은 주의 날 한다.
어떤 교단은 총회 때 모여서 성찬한다. 그것은 불법이다. 성찬은 성일에만 하는 것이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는다고 했다. 십일조는 모세이전 아브라함 때부터 했다.
야곱도 벧엘에 돌담을 쌓고, 십일조를 하겠다고 서원했다.
십일조는 율법에 매인 것이 아니다.
마태복음 23:2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위와같이 주님이 십일조를 명하셨다.
어떤 사람은 내가 십일조를 강조하면서도 내가 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십일조뿐만 아니라, 십의 구조라도 드렸다.
계명으로서의 의식은 생명에 관한 것이다.
말라기 3: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말라기 3: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말라기 3: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말라기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주의 계명을 어기면 주께 징계를 받는다. 육체가 있을 때 받는다.
하는 일마다 안되고, 일찍 죽기도 한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우리를 잘되게 하려 하신다.
고린도전서 16:1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고린도전서 16:2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연보는 매주첫날 주의 날에 미리 준비한 연보를 드리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참 연보의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9:4 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의 준비치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고린도후서 9:5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고린도후서 9: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나는 처음 신앙생활할 때, 밥을 굶어가면서 연보를 준비했다.
그 때는 참혹하지만, 그 후에 하나님이 나에게 다 보상하신다.
연보는 행습이 아니라,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다.
십일조는 행습이 아니고, 주님의 계명이다.
성찬은 행습이 아니고, 주님의 계명이다.
성일은 행습이 아니고, 주님의 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