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언베뢰아특강`129(20022)
200221환언특강(강석준집사님 정리)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복음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한복음 1:6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요한복음 1:7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1: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요한복음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요한복음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한복음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요한복음 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한복음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한복음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이번주도 같은 본문을 하는데 본문구절을 통달해야 한다.
사람들은 내게 베뢰아라는 말만 빼라고 한다.
베뢰아를 빼면 환언운동의 총체적인 제목을 내놓을 수 없다.
베뢰아 사람의 모범을 우리도 본받아서, 바울의 말을 듣고 성경을 상고하니 그렇구나 하는 것을 따라야 한다.
베뢰아는 일반 신학과는 다르다.
기존 기독교신학은 성경을 거의 다 믿지만, 창세기1장부터 11장까지는 신화로 여긴다.
개별적으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가르치지않으니 알지도 못한다.
기존신학은 그런 신화에다가 바울신학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께서 직접 위임하신 요한의 신앙대로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요한의 신학을 근본으로 삼는다.
금도금과 금을 전문가가 아니면 구분하기 어렵다.
전에 어떤 성도가 금10돈쯤 되는 메달을 헌신했다.
금인줄 알고 헌신했는데, 알고보니 쇠의 겉에다 도금만 한 것이다.
이와같이 사람들이 다들 믿습니다 하면서 경건한 모양은 갖고 있다.
종교는 적이 없다.
불교는 무신론이므로, 무아주의다.
그런데, 무당들, 점쟁이들과 다 같이 연합한다.
그들은 기독교인들도 반대하지 않는다.
이쪽도 저쪽도 원수가 없다. 공덕을 쌓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저 덕이 있으면 된다.
오늘 교회도 적이 없다하면서 이쪽 편도 아니고, 저쪽 편도 아니라고 한다면 가룟 유다와 똑같은 자다.
가룟 유다가 예수께 입맞추면서 대제상과는 타협한다.
가룟 유다는 종교인의 모델이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원수가 있는 것이다.
성경에 원수를 맺지 말라는 말이 없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을 뿐이다.
예수께서 사랑하는 제자에게라도 사단아 물러가라, 네가 사람의 생각으로 나를 넘어지게 한다고 하셨다.
사단은 분명한 하나님의 원수를 말한다.
빛과 어둠이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벨리알과 성령이 어찌 함께 할 수 있는가.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불의한 자는 그대로 불의하라고 하신다.
아주 분명한 것이다.
오늘날 교회 다니면서도 어느편도 안든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중립이라면서 원로감독님 빨리 돌아가시면 교회가 평안할텐데 한다.
그래서 내가 안죽는지도 모르겠다.
기존신학을 한 사람에게는 창세기1장부터 11장까지가 신화같고, 바울의 신학을 배운다.
지구상에 요한신학을 신학으로 택한 곳은 거의 없다.
기존신학은 요한을 신비주의자라고 한다.
영적인 말을 많이 하고, 성령 이야기 많이 하니까, 신비주의로 취급한다.
그래서 계시록도 함부로 해석하면 저주받는다는 핑계로 건드리지도 않는다.
요한이 환상을 보고 쓴 것이니, 계시록도 신비주의라고 폄훼한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거짓이 없는 참 하나님.
하나님의 영광은 그늘이 없다.
세상 빛은 밤과 낮이 있지만 하나님은 그늘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공의시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심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오신 것이다.
예수께서 내가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러 온 것이 아니고, 아버지 뜻을 행하러 왔다고 하셨다.
아버지 뜻은 내게 온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구원하는 것이라 하셨다.
주기도문에서도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주옵소서 한다.
하나님의 공의가 아버지시다.
어버지의 뜻을 이루시려고 아들이 오셨다.
이것을 아는 것이 영생이다.
의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옳을 의
하나님의 아들은 뜻 의
하나님은 아버지시므로 공의시다.
사람의 의와 혼돈하지 않도록 공의라 한다.
영어로도 god이 있고, God이 있다.
대문자로 해서 유일하신 하나님을 구분한다.
하나님은 공의시므로 그가 뜻하신 것을 다 이루신다.
그 뜻을 예수께서 이루시고, 성령께서 이루신다.
성령도 자기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신다.
예수도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에 죽으셨다.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영생이라는 것이다.
베뢰아는 바로 하나님의 의도 곧 하나님의 뜻을 그림으로 보는 것이다.
그 그림이 바로 예수다.
예수께서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셨다.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의 의의 뜻대로 나타나신 분이시다.
성경은 오직 이 두가지 뿐이다.
율법에 의로우라고 하지만, 의인은 예수뿐이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이 땅을 떠나시면 아무도 의를 볼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를 신이라 하셨다.
그렇게 하나님처럼 의로우라는 것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셨다.
우리가 의로운 것은 그 의에 속한 것이고, 우리가 거룩한 것은 그의 거룩함에 속한 것이다.
우리가 침례를 받는데, 물이 차다 뜨겁다 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물속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
물속에 들어가기 전에는 세상에 속한 자였지만, 물속에서 나올 때는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는 것이다.
비록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예수 믿어도 성질이 있고, 감정이 있고, 죄도 많이 짓는다.
그래서 회개한다.
회개가 없다면 다 지옥갈 것이다.
그래서 부지런히 회개하는 것이다.
왜 거룩해졌는데 회개하는가.
히브리서에 너희가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우리는 죄와 피흘리게 싸워야 한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다가 빼앗으셨다가 하지 않는다.
자기가 하나님을 버리면 끝나는 것이지,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신다.
침례는 단 한번 뿐이다.
침례는 예수 십자가의 공로로 들어가는 문이다.
그 문으로 들어간 다음에 자기가 뛰어나오면 다시는 들어갈 수 없다.
은혜를 받고, 침례를 받고, 성령을 받고, 은사를 맛본 자가 타락하면 다시는 회개케 할 수 없다.
다시 회개하려면 예수께서 다시 고난 받으셔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다시 고난받을 일이 없으니, 다시는 회개가 안된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근본을 신화로 여기면 벌써 타락한 것이다.
이 말 듣고, 장로교, 감리교 이단이라고 했다고 누구는 비난할 것이다.
우리는 관념적 신앙을 가져서는 안된다.
우리에게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가 분명히 있었다.
없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이 눈에 안보여도, 신화속에서 우리를 만드시고, 복음을 전해주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 피가 신화가 아니고, 역사인 것처럼 이전의 것도 예수와 똑같이 사실이다.
이것을 믿는 것이다.
이것을 가장 잘 가르친 이가 요한이다.
그래서 우리 베뢰아는 요한신학을 신앙의 교과서로 삼는다.
우리는 신화에 신학의 뿌리를 두지 않고, 살아계신 참 하나님께 뿌리를 둔다.
예수가 하신 일은 부정할 수 없는 객관성이 있는 역사다.
예수께서 역사적 존재가 아니고, 신화적 존재라 할 수 없다.
누가가 누가복음을 쓴 것은 데오빌로라고 하는 높은 지위에 있는 장관에게 권위를 얻어서 예수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쓴 것이다.
누가복음 신령한 책이라기보다는 역사적인 책이다.
예수를 부인할 수 없는 역사다.
누가는 누구보다 이적에 대해서 많이 말했다.
예수가 실존이고 사실이고 역사라면 아멘하라.
예수는 참 하나님이 보내셨다.
예언자들이 미래를 보는데 그것이 맞다.
이와같이 모세는 과거를 본 자다.
선지자는 미래를 보고, 모세는 과거를 보았는데, 처음부터 보았다.
미래를 본 것이나 과거를 본 것은 똑같다.
하나님에 대해서 희미하면 안된다.
예수를 아는 것 같이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예수를 알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예수와 하나님을 똑같이 알아야 한다.
오늘 사람들이 예수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존재로 여기는데, 하나님은 본 자가 없다고 희미하면 영생이 없다.
목사들이 설교할 때, 그저 믿습니다 하면 된다고 하는 목사도 있다.
학교선생이 공부 못하는 아이에게 너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다 하면서도 속으로는 너 클났다 하듯이 목사가 그저 위로하는 말이다.
교회에 와서 헌금이나 하고, 머릿수나 채워주면 좋다고 남을 안심시킨다.
천하를 다니며, 한 영혼을 얻어다가 너보다 더 악한 자가 되게 한다는 경고가 있다.
안 가르치니까 그렇다.
장성하면 가르쳐야 하는데, 아직도 젖이나 먹고 있느냐고 경고하는 구절도 있다.
달란트 비유에서도 다섯달란트 받은 자는 선생 노릇 많이 한 것이다. 한달란트 가진 자는 제자 없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이에 대해 내게 무익하다 하시고 그 한달란트도 빼앗으셨다.
지옥간다는 말은 아니다. 하늘에서 영광받지 못한다는 말이다.
오늘 목사들이 교인들이 신앙생활 잘못해도 사랑으로 위로한답시고 말하는데, 영혼을 들여다 보지 못하니까 그런것이다.
시무언은 62년도부터 이것을 해야겠다고 해서 욕을 먹어도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다.
보통 사람들이 중요한 것을 먼저 말한다.
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을까.
길은 도, 곧 하나님의 의를 말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의다.
진리는 그가 보내신 뜻을 이루는 자라는 것이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었을 때, 진리라고 한다.
진리보다 앞선 것이 길이다.
길은 오른 쪽으로 갈지, 왼쪽으로 갈 것인지 하는 것이다.
미국은 교회 지붕에 뾰족한 창살같은 것을 다는 교회들이 많다.
One way 오직 하나라는 말이다.
나는 길이요라 하실 때는 예수 외에는 다른길이 없다는 것이다.
생명은 길, 진리 다음에 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통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계속 말해도 여러분 아는 것 같지만,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초등학교 다닐 때, 과학을 배우는데, 과학이라는 것이 있다는 기초를 배운다.
그런데, 거기서 그 이상 배우지 않으면 무식하다는 말을 듣는다.
초등학교 수준에서 막히면, 스스로도 얼마다 답답하고, 열등감을 느끼는가.
혼인잔치에 들어갔는데, 예복 입지 않았느냐고 하니 유구무언이다.
그를 엄히 때려 내쫓는다.
중학교가 되면 과학을 좀 더 깊이 배운다.
그것을 대학 때 배우는 것과 비교하면 무식하다.
이 자리에 왔어도 자기가 하나님의 의도에 대해 초등수준이면 지금 무슨 소린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초등교육은 성경을 한번 이상 꼭 보라는 것이다.
성경을 한번 이상 본 사람만이 베뢰아 아카데미를 들을 수 있다.
잘몰라도 한번 읽었으니까 희미하게라도 알지 않는가. 그런 상태에 들어야 하나님의 의도가 얽혀진다.
그리고 나서 사범반에 들어가서 배우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하는 것은 사범반보다 높은 단계다.
지금도 여전히 초등지식에 머물러 성경 한번도 안읽고 이 자리에 앉아있으면 소 귀에 경 읽기와 같다.
그래서 반복하고, 반복해서 양파 벗겨내듯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 교인들이야 시무언이 말하는 소리 알아듣지만 다른 교회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다. 그저 이단이라고 할 뿐이다.
못알아듣기 때문이다.
베뢰아가 왜 중요한지 지난주에 말했고, 다시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를 아는 것이 요한복음1:1-18까지다.
내가 금년 캘린더에 그림을 그려서 넣었는데, 색이 진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 캘린더 그림은 영의 세계에 대한 그림이다.
그 열두개를 잘 보면, 자기 영혼이 어디로 가는지 다 나온다.
재미없고, 거기에 있는 글도 안읽지 않았는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다.
계시다라는 말은 중간부터 있다는 말이 아니라, 시작부터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계시다라는 말은 그 말씀이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하나님만이 태초이전부터 계신 것이다.
태초이전부터 계신 이가 누구와 함께 계신가.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
학교에서 공부못하는 아이들 특징은 선생의 말을 놓치기 때문이다.
한번 놓치면 따라잡을 수 없다.
나는 손자들에게 선생님 눈과 입만 보라고 했다.
아이들 정말 공부 잘했다.
손자들이 할아버지가 한 말대로 한다고 하였다.
여러분 복받으라면 눈 활짝 뜨고 아멘 할 것이다. 그렇게 정신 차리고 들으라.
창세기는 만물의 창조된 때부터이지만, 요한복음의 태초는 무한 영원전부터를 말한다.
그 태초부터 계시다는 것이다.
계신 이는 하나님만 계신 것이다.
그 말씀이 하나님이란 말이다.
예수께서 유대땅에 오셨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는 말을 신학적으로 성육신이라고 하는데 어폐가 있다. 우리는 대신 임마누엘이라고 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분명히 우리 가운데 거하셔서 우리가 보았다.
우리 가운데 거하신 분이 유별나지 않고, 사람과 똑같다.
그러니까, 창세기의 구절이 그대로 해석된다.
창세기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세기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과 그 모양대로 사람을 지으셨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보다 뒤에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느니라 하셨다.
영원전부터 있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의 모양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바로 예수다.
고린도후서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히브리서의 경우는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라고 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알지만, 예수는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느니라고 하셨다.
아브라함이 예수가 오실 것을 보고 기뻐했다고 하였다.
예수는 우리보다 이천년전에 계신 분이 아니라, 영원전부터 계신 분이시다.
영원전부터 계신 이가 이 땅에 왔을 때, 창1:26 구절이 신화가 아니라 사실임이 확실히 드러난다.
확실하다면, 머리가 터져도, 욕을 먹어도 주장해야 한다.
내게 왜 욕을 먹으면서 그런 말을 하느냐고 한다.
무식한 사람은 은사받은 사람을 비방한다.(고전14장)
그들이 우리를 욕하는 것은 그들이 무식하기 때문이다.
예수가 사람으로 오셨다고 할 때, 그에게 무슨 결함이 있지 않다.
애꾸이지도 않고, 절름발이도 아니다.
그를 보니, 과연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하였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은 요한복음1:1의 그분이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하는 것이다.
비록 나사렛 출신이라고 해도 완전무결하심을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시다.
우리가 신유의 능력을 구할 때도, 절름발이가 와서 고쳐달라고 할 때, 당신과 같이 온전하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절름발이가 주님께 간구하는 것은 나를 당신과 같이 온전한 몸이 되게 하소서 하는 것이다.
소경도, 귀머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병낫는 기준이 예수에게 있는 것이다.
예수보다 더 초월할 방법이 없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은 소설이 아니고, 실상이다.
그가 어디서 왔는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말씀, 영원전부터 계신 분이 우리 눈에 나타나신 것이다.
우리 눈에 나타나시기 전에 계신 분이 모양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의 본체의 형상이 있으시다.
뱃속에 있는 아이가 엄마를 볼 수 없다.
그렇게 가깝게 있지만, 엄마의 얼굴을 알 수 없다.
아기가 엄마를 보지 못해도 엄마가 있는 것처럼 우리가 아버지를 보지 못했어도, 말씀이 육신이 되어오신 이를 믿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본체(하늘)의 형상이시다.
이것도 지구상에서 처음 말하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운지 모른다.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라고 하였다.
보좌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리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하늘을 보좌로 여기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사람 몸뚱이를 생각해보라.
사람의 몸이 거의 물로 되어있다.
계속 물을 마셔야 하고,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그렇지만 물이 사람은 아니다.
무엇이 사람인가.
육체 안에 혼이 있고, 혼 속에 영이 있다. 영혼이 사람이다.
영혼은 아무도 보지 못한다.
그런데, 영혼을 둘러싸는 것이 감정과 이성이다.
그것을 눈에 보이도록 가시화 시킨 것이 물(육체)이다.
무게도 없고, 분피도 없는데 영혼을 나타내는 것이 감정과 이성이다.
불신자라도 육체가 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육체안에 감정과 생명이 있다는 것까지는 알지만, 영혼은 모른다.
TV에서 각종교에서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은 오직 우주안의 것을 말하지, 그 바깥을 말하지 않는다.
육체가 있으니까, 이게 나인줄 안다.
예수께서 네 원수는 네 집안식구리라 하셨다.
집안식구가 예수 믿는 것을 제일 핍박한다.
예수께서 원수맺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다.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다.
원수를 친히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하셨다.
원수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러분 볼 때, 나같이 고통받는 사람 없을 것이다.
여러분 앞에서 칼을 휘두르면 무서울 것이다. 나는 이미 칼에 난도질 당한 사람이다.
그렇게 환난이 와도 나는 사람들에게 평안하라고 하고, 환언특강을 하고 있다.
로마서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나는 이 말씀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내가 주님께 맡기니까, 내가 미워하고 욕할 필요가 없다.
그저 시무언 하는 것이다.
내 제자들이었기 때문에 딱하게 여길 뿐이다.
거기에 있는 목사들도 참 답답하다.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데리고 나가서 개척하라고 했다.
그래야 산다고 했다.
그렇게 나가서 버티고 있는 사람도 있다.
나가지도 못하고, 개척도 못하니, 얼마나 무능하고 답답한가.
빨리 나가서 개척해야 그나마 살지,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는 빌어먹는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내 의무를 다하는 것 뿐이다.
사랑하라고 하니, 굳이 찾아가라는 말이 아니다. 미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미워하지 않는다.
계시록에 보면 죽은 성도들의 영혼이 원수를 갚아달라고 부르짖는 장면이 나온다.
거기에 대해 하나님께서 순교자의 숫자가 더 차기까지 기다리라 하신다.
내 생전에 갚지 않으셔도 안갚으시는 것이 아니다.
내가 원수갚으면, 나도 상대방에게 보복받는다.
그 보복의 순환이 끊어지지 않는다.
나는 미워하지 않고,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말은 그들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은 원수갚을 수 없다. 하나님만이 원수갚을 수 있다.
원수를 친히 갚으려하지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하셨다.
육체가 물인데, 물속에 이성도 감정도 있고, 영혼도 있다.
영혼의 보좌가 몸이다.
우리의 영도 혼도 몸을 기대고 있다.
사람의 몸은 혼의 보좌다.
이와같이 하늘은 영이다.
하나님의 보좌다.
하늘이 얼마나 무한한가.
우주와 비교할 수 없이 무한하다.
그렇게 크신 분, 하나님이 영이시다.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신 것이다.
개미가 사람몸에 앉았다고 도망가는데, 암만 도망가도 그 몸뚱이 안이다.
예전에는 참 이가 많았다.
그 몸안에서 도망가봐야 그 몸이다.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다.
이것으로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말이 이해가 갈 것이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 아니다.
하늘은 영이고 우주안은 공허다.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요, 하나님의 보좌는 하나님의 영이다.
하늘은 무한하다. 하나님이 없는 곳이 없다.
하나님의 영은 무소부재하시다.
사람은 미세먼지보다 작은 존재들인데, 하늘에서 은혜를 받는 것이다.
두부 만드는 것을 상상해보라.
보자기에다가 콩갈은 것을 집어넣으면 콩물이 삐져나온다.
이처럼 보좌에서 방울방울 삐져나오듯이 우리가 그 은혜를 받은 것이다.
우리가 침례를 받으므로, 하늘(하나님의 영)에 속한 것이다.
우주에 속했던 자가 침례를 통해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침례는 세상, 우주, 육체에서 하나님, 영에게로 들어가는 것이다.
오직 한번뿐이다.
성찬은 매주하지만, 침례는 오직 한번이다.
에베소서 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침례도 하나이요
딱 한번에 주님을 만나는 것이다.
신자라도 죄를 짓는다.
노아의 방주안에서 노아 식구들이 홍수 가운데 넘어졌을 것이다.
그래도 방주 안에 있다.
방주 바깥에 있는 사람은 서 있어도 죽고, 방주 안에서는 넘어져도 산다.
예수 믿는 사람이 육신의 욕심 따라서 순간에 실수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예수안에서 회개하면 된다.
그러나, 주를 부인하면 다시는 돌아올 길이 없다.
예를들어 어떻게 부인하는가.
예수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마다 적그리스도라 하셨다.
예수께서 육체로 오심은 피흘리려 오신 것이다. 그 속죄를 부인하면 망하는 것이다.
한번 믿으면 끝까지 그 믿음을 유지해야 한다.
단번에 사해질 것을 믿는 사람 아멘하라.
참새가 돌아다녀도 머리 위에 집짓지 못하게 하라.
내 육체는 물이다. 그 안에 혼이 있다.
이처럼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 하나님의 영이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알고 예배하라.
내 영혼아 하나님을 알자.
왜 성락교회 부흥이 안될까.
교개협 방해 때문인가. 그것은 예전부터 그랬다.
교인들이 움직이지 않으니까 부흥되지 않는 것이다.
진정 회개한다면 간증하라. 자꾸 고백하라. 그래서 다른 사람도 오게 만들라.
과연 이 다음에 열매 없는 가지처럼 주님의 관심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전도하지 않으면 자기 영혼이 죽는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라도 가르치라.
계속 우리를 뒷받침 할 자를 자꾸 부르라.
당신이 하나님을 모르니까 자신이 없고, 신앙이 없어서 자신이 없는 것이다.
진정 순종하라. 순종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여, 그 영혼을 인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