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No9 친구의 영혼을 사랑하라(200223)

lks8284 2020. 2. 23. 12:05

‘친구의 영혼을 사랑하라’ – 김성현 목사님(배경동집사님 정리)

[요한복음 15:1~15]

 

우리는 하나님이 기르시는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들이다. 그리고 예수는 우리의 참 포도나무 되신다. 예수로 인해 한 포도나무가 된 우리는 진정 들포도나무가 되지 않고 농부가 원하는 참 포도나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는 참 포도나무시다. 모든 포도나무의 원형이다. 가장 참되고 완전한 포도나무이다. 농부는 이 포도나무가 잘 자라도록 모든 것을 제공한다. 자연재해로부터 포도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 애를 쓴다. 새를 막고, 병충해를 막고, 들짐승을 막고, 나무가 모든 자연의 혜택을 받도록 햇볕과 거름과 물을 주고, 울타리를 잘 하여서 다른 밖의 과수원 밖의 요소로 인해 침해받지 않도록 한다. 그리하여 풍성한 열매가 잘 맺어지도록 한다. 농부는 그 열매를 원한다.

 

나무는 땅의 양분과 물을 끌어올려 수액을 내어 진액을 내어 가지들에게 공급한다. 이 나무도 모든 힘을 다하고 정열을 다하고 사랑을 다하고 진실을 다한다. 우리 교회 전체가 하나의 나무를 이룬다. 주님을 머리에 둔 한 몸체이다. 우리는 가지라고 볼 수도 있다. 우리는 한 몸으로 주님 안에 들어가 그가 명하시고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고 열매를 맺으면 우리 목적을 잘 이루는 것이다. 열매는 농부를 위한 것인데, 포도나무도 농부를 위해서, 농부의 기쁨을 주기 위해서 농부와 같은 꿈을 가지고 같은 정열과 진실과 목적을 가지고 한다. 나에게서 열매가 나와야 한다. 그렇다면 가지들도 같은 목적을 가져야겠고, 더불어서 같은 애정과 열심과 사랑을 가지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포도나무 가지들은 어떤 경우를 보더라도 꼭 그렇게 되지 않는다.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도 있다. 가지가 많은 것은 좋지 않다. 영양을 많이 사용하므로 가지를 잘라내야 한다.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가 있다. 또는 열매를 맺기는 하는데 포도송이가 시원찮은 것이 있다. 아무리 기다려도 안 나온다. 그런 것은 얼른 잘라주어야 한다. 포도나무를 재배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가지를 자르는 것이다. 시원찮다고 판단되는 것은 시급히 잘라주어야 하지, 그래야 수포로 돌아가지 않는다. 열매를 열심히 내는 그 가지에게 진액을 주어야 한다. 그래서 그 가지를 자르는 것이 중요하는데, 그리하여 일을 깨끗케 하는 것이다.

 

우리도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상태라면 변화하여야 한다. 우리도 나아지도록 불필요한 것을 잘라내야 한다. 어차피 누구도 처음부터 완전한 사람이 없다. 하나님을 거의 모르고 시작한다. 교회를 위한 주님의 뜻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 주님이 처음 있는 사람을 바로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거듭난 뒤부터 자기를 가꾸어 변화시켜 나간다. 변화를 하지 않으면 옳지 않다. 좋은 열매를 맺어야 농부를 기쁘게 하고 참 포도나무 되신 주님을 기쁘게 한다. 깨끗하지 않으면 농부의 기대나 나무의 기대에 미칠 수 없다. 가지로써 성질이 좋아야 한다. 이 가지로써 계속 좋은 열매가 나오도록 계속 변화해 가야 한다. 진액을 소비하지 않고 진액을 받으면 가치를 반드시 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 교회인데 교회는 중요한 임무들이 있다. 교회는 전도하여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통해 교회를 성장시킨다. 이것이 복음 전파의 핵심이고 우리 교회의 가장 우선적인 일이다. 전도해서 영혼을 교회에 데려오는 것인데, 이것이 교회의 일의 전부는 아니다. 그들이 다 훌륭한 가지로 성장하도록 도와야 한다. 전도하여서 교회에 왔으면 그냥 버려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까지는 반 정도 했다. 이제는 열매맺는 자가 되도록 돌봐야 한다. 교회에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고 좋은 열매를 맺도록. 주님의 교회에 들어온 자는 모두 하늘의 기업에 참여한 자들이다. 또 주님의 교회에 들어온 자들은 다 형제이고 동역자이다.

 

꼭 사랑하는 사람만 전도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을 전도해야 한다. 친구나 가족이 예수 믿지 않으면 안타까운 마음에 전도한다. 그러나 비록 사랑하지 않는 자라도, 거의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구원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가 처음 주님을 만날 때 우리는 주님의 원수였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 대해 인내를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일단 믿는 자가 되고 구원을 받았으면 이제는 사랑의 친절을 베푼다. 그래서 처음에는 사랑하는 마음이 잘 나오지 않을지라도 예수 믿는 자가 되었으면 그날부터 사랑을 해주어야 한다. 전도해서 데려온 영혼을 왜 사랑하는가? 첫째, 계명이다. 둘째, 사랑하는 주님의 당부이다. 명령을 하시면서도 당부를 동시에 하신다. 그래서 사람을 구원한 후에 그들도 제자가 되고 그들도 하루속히 주님의 친구 같은 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친구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이다. 친구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 보니 우리가 아는 친구와 성경의 친구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어 설명할 필요가 있다. 급속도로 발전하는 도시 삶에 있다 보니 친구의 개념은 10년 전과 오늘에도 차이가 있을 것이다. 유대 사회도 그렇고 고대 사회의 친구에 대한 인식은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 한국 사전에서 친구란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영국 사전을 보니 내가 잘 알고 있고 되게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한국 사회에서의 친구는 가까운데 오래 사귄 사람, 그래서 시간에 대해 강조점이 있다. 그런데 외국에서는 사람도 잘 알고 감성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것이 조건이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 개념은 알고 지낸 시간을 중요시 하는 반면에, 영어 사전에서는 감성적인 마음의 연결이 중요하다. 이것은 문화와 인식의 차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를 영혼을 나눈 자라고 했다. 우리 신앙인으로써는 영혼을 거론하니 거부감이 들 수 있는데,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런 유명한 사람이 과거에 엉뚱한 소리를 했을 리 없다. 당시 문화와 오늘의 문화는 그렇게 차이가 있었다. 또 감독이 영국에 있었을 때 세례 예배에 참석했었는데, 아이가 세례를 받는데 아빠의 제일 친한 친구는 갓파더, 대부라 한다. 이 아이의 아빠가 불의의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으면 홀로 남으니 그가 대신 아빠의 노릇을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친구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유아세례때 같이 가 줄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친구, 이러한 친구 관계, 믿을 수 있는 친구 관계는 오늘날에서 찾기 어렵다. 위기에서는 배신할 수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유대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예이다. 성경에서 친구라는 말 자체가 필로스인데, 사랑하는 사람, 사랑받는 사람이다. 친구는 뜻 자체가 근거가 되어 있다. 오래 사귄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가 되어 있다. 사랑으로 맺어져 있는 자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면 그렇게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 많다.

 

기도하는 것에 대한 주님의 말씀인데, 친구는 모든 것을 해 주지만 싫다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간청하면 들어준다. 그 내용보다도 친구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 친구가 요구하면 못 들어줄 것이 없다(누가복음 11:8). 부한 자에게 잔치를 베풀어 줄 때 벗이 첫번째이다(누가복음 14:12). 예수님 당시에도 세리들과 식사를 하실 때 주님을 대단히 강하게 비판하였다. 죄인들과 식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 없는 욕과 비판을 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 하였다(누가복음 7:34). 친구라는 것은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더 강하게 얘기한다.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한 말씀인데,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인데, 친구가 도와 기뻐한다(요한복음 3:29). 신부를 취하는 것은 신랑인데 친구가 즐거워하고 기뻐한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친구라 하셨다. 이 부른 자들이 주님의 친한 그룹이었다. 아무리 가깝지만 절대 이름을 부르지 않고 주님을 선생님, 혹은 주여 하였다. 격이 굉장히 많이 있었다. 옛날 유대 사회는 계급 사회였다. 높고 낮음을 많이 따졌다. 조금이라도 높으면 주여 해야 하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주님이 여기서 너희는 나의 친구라 하셨다. 굉장한 선언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러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주님의 부탁,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명령이지만 부탁하신 것이다(요한복음 15:12~15). 친구라는 것은 신분은 바뀌지 않는다. 11명에 대해 주님이 눈높이를 낮추고 키를 낮추어 부탁하신 것이다. 요한은 황혼의 때에 주님이 목숨을 버리신 것이 사도들만을 위해 버렸겠느냐? 형제여, 그대들은 주님과 같이 있지 않았지만 주님이 목숨을 버린 것은 너희를 위해서도 하신 것이다. 너희는 한 몸이며 주님이 함께 하실 것이다 하였다(요한일서 3:16). 그래서 구령은 구원받은 자들이 하는 것이다. 마땅히 믿는 자로써 하늘에 속한 자로써 하늘의 시민으로써 하늘의 심성을 나타내는 것이 당연하다.

 

하늘에 속한 자로써 하늘의 임무를 하는 것인데 이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러한 하늘의 명령이기보다는 주의 입장을 아는 사람, 주의 심정을 아는 사람, 주의 상황을 아는 사람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주의 부탁을 들어주려고 하는 반응으로 하는 것이다. 주께서 우리에게 내어주신 큰 사랑도 있지만 주의 마음과 비밀을 알고 있는 자, 주님의 소원을 알고 있는 자, 주님의 깊은 마음을 알고 있는 자, 그가 주님을 사랑하여 자발적으로 나오는 것이다. 주님의 마음의 비밀과 소원을 우리 깊은 마음 속에서 잘 기억되고 있습니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것이다. 주님이 새 계명이라 하신 것은 절대로 어겨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이 부탁하신 것이니 능동적으로 하는 것이다. 주님의 친구로써, 주님의 최고의 사랑을 받은 자로써, 주님의 비밀을 아는 자로써 하는 것이다. 나를 위해서 하지 않는다. 주님의 마음을 알고 있는 자가, 주님의 사정을 알고 있는 자가 비록 계명이라 하시지 않았을지라도 했을 것이다. 계명이라는 것은 사랑을 드릴 기회이다.

 

우리 교회는 많은 성장을 이루었다. 그 큰 성장 중에는 전도를 잘 했기 때문이다. 전도를 위해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부은 분들이 있다. 모두가 그런 은사는 없지만 엄청 전도하신 분이 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이렇게 커졌다. 이들은 하늘에서 큰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능력에 대해 정말 존경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 다 의지할수 없다. 이것은 반쪽이다. 반은 우리가 내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정말 신실하고, 신뢰할 수 있고, 교활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그대신 남몰래 교회를 위해 눈물짓고, 목자를 축복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시험에 들지 않고, 교회를 어렵게 하지 않는, 신실한 신앙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자들, 너는 내 친구라고 주님이 억제하지 못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교회를 위해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열매를 맺는 우리가 되었으면 참 좋겠다.

 

이스라엘이 포도나무에 비유한 것은 전형적인 유대의 사상이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고 들포도나무가 되어서 하나님을 실망시켰다. 그래서 하나님이 좋은 포도를 맺기 원하였다. 너무나 내가 사랑하고 다 하였는데 들포도나무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었느냐? 내가 포기하겠다. 담을 허물겠다. 아무나 와서 짓밟아라, 가지치기를 하지 않겠다. 이스라엘, 유다, 내가 너희에게 실망하였다 하는 말씀이 있다(이사야 5:1~7). 이스라엘과 유다를 통한 하나님의 포도농사는 이렇게 실패하였다. 그들은 육신을 위해 살았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강제로 명령을 받고 억지로 일했다. 불만을 가지고 자기 육신이 부르는 대로 따라가 들포도나무가 되었다. 그러나 예수가 오셔서 새롭게 하셨다. 그는 참 포도나무, 실패가 없는 참 포도나무시다. 이스라엘이 능히 하지 못하였던 것을 우리는 능히 할 수 있다.

 

산에 나무가 엄청 있는데 주님 나무에만 붙어있는 자들이 우리이다. 최고의 기회이다. 이 나무에 붙어 열매를 맺지 못하면 우리는 용도가 없다. 쓸모 없다. 예수 안에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산에 많은 나무가 있는데 포도나무가 특별히 나은게 뭐가 있겠는가? 포도나무는 어디에도 못 쓴다. 그런데 열매를 맺지 않으면 어디에 쓸 것인가? 온전했을 때도 쓸모 없는데 버려지면 어디에 쓸모 있는가(에스겔 15:1~5)? 우리는 이스라엘과 다를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니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훌륭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 제자로 만들 때 친구라 말씀하심을 금하실 수 없는 훌륭한 참 포도나무의 사랑스러운 가지가 되도록 힘쓰자. 우리가 모두가 신실한 신앙으로 헌신하여서 영광의 열매로, 자기 육신을 겨냥하고 자기 세상의 생각으로 가지 아니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생각으로 가득찬 참 포도나무 가지가 성락인이다. 충만한 사랑을 기반으로 극상품 포도나무로 변하는 우리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