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언베뢰아특강181(210319)
210319환언(강석준집사님 정리)
요 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기도)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를 주의 말씀 앞에 무릎 꿇게 하시고 겸손히 성령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고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니 감사합니다. 성령이 우리 베뢰아인들에게 함께하셔서 저들이 귀로 듣기만 하지 아니하고 정말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그 역사하심이 이 세상에 와서 드러내신 그리스도의 직임과 이제 이를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하시고 직접 나타내 주시는 그 은사들로 인하여 우리 모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그리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인해서 우리도 하나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이름 받들어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오늘 강의를 들을 때, 무성의하게 일반 TV보듯 하면 아무 소용없다.
이 세상에서도 어른이 말할 때, 딴 짓하면, 꾸중을 듣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있는 것이다.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과 땅 아래 있는 것들, 모든 것들이 다 예수 이름 앞에 무릎 꿇고, 예수 이름으로만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셨다.
우리는 진리 앞에 겸손히 정신 차리고, 들어야 한다.
어린아이들이 선생님의 입을 보고, 눈을 쳐다보면, 그 말이 쏙쏙 들어오지만,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듣는 것 같아도 되지 않는다.
입과 눈이 마주쳐야 한다.
예수께서 환자들에게 나를 주목하라 하셨다.
주목하게 하고, 말씀하신다.
산상수훈에서도 예수께서 많은 제자들 앞에서 가르치실 때, 입을 열어 가르치신다고 하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입을 주시하고, 집중하고 있어서 그 말씀이 들어오는 것이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귀가 있는 자들은 들을지어다.
계시록에서 말하고 있다.
같이 앉아 있어도, 들을 귀가 없는 자는 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다.
아이들이 선생님이 가르칠 때, 고개 숙이고,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 메모를 해도 기억에 남지 않는다.
신기하다.
성경은 하나님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라고 한다.
예수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나온다.
또, 주님이 하늘에 가셔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성령이 주의 종들에게 역사하사, 주의 종의 입으로 하나님 말씀을 대언한다.
수돗물도, 수원지에서부터 여러곳을 거치면서, 집안까지 올 때, 오물이 섞이지 않고 나온다.
마디마디를 하나도 새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시무언의 입을 통해 하시는 말씀을 여러분이 눈으로 내 입을 보고, 누수가 되지 않게 하면 잘 들을 수 있다.
이렇게 베뢰아 강의를 몇년동안 계속 해도, 아직도 무슨 말 하는지 모른다는 사람도 있다.
자기 열심만 가지고 나온 사람도 있다.
자기 열심이나 신념으로는 절대 구원받지 못한다.
성령이 성령의 말씀을 들을 귀가 있는 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성령의 말씀을 들을 귀가 있는 자들의 모임을 교회라 한다.
그동안 내가 책을 수백 권 썼다.
어떤 사람은 앞과 뒤가 다르다고 한다.
그 말 한마디와 단어 하나로, 내 강의를 의심하는 자도 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주의 음성을 들었다.
한사람이 쓴 것인데, 바울의 체험을 뒤바꾸어 말하고 있다.
들은 것, 본 것이 바뀌어 있다.
우리는 그런 것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쓴 책 중에, 성막의 모형과 실상은 세상 어느 책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사 쓴 책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읽고 나서, 절기가 어떻고, 저떻고 따진다.
말이 바뀌어 있다거나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지, 성령이 하시는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 똑똑히 들으라.
구약성경은 창조사, 종교사, 이스라엘 건국사다.
우리는 창조사에는 우리 신앙의 근본을 두고 있다.
그러나, 종교사에서는 흔들리면 안된다.
3년전에 쓴 선악과라는 책을 이번에 출간했는데, 종교를 말하는 것이다.
종교는 양심이다.
양심을 의지하면 반드시 죽는다.
선악과를 먹고 난 이후의 인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종교와 관계없이 별도로 나오는 것이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고, 노아도 하나님과 동행했다.
거기서 타락한 자와는 상관이 없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기를 네 자손을 가나안 땅에 인도할 것이라 하셨다.
그 다음에 이삭을 두고는 맹세하셨다.
저에게서 대적의 문을 밟는 자가 나오리라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야곱에 대해서는 율례를 주었다고 하셨다.
육체의 예법만 주었다는 말이다.
이삭을 두고 맹세하신 그 씨를 약속한 것이 아니라, 율례를 주어, 그들의 육체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서, 가나안 땅까지 가도록 하신 것이다.
야곱은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하나님의 의지를 꺾고, 자기 고집대로 했다.
그것을 본받으라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불가능해도 야곱이 몸부림치며 기도한 것을 본으로 삼으려고 한다.
하나님도 할 수 없이 손을 들고, 사람의 뜻을 이루는 것을 좋게 보고 있다.
오늘날 교회들이 야곱의 축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스라엘 이름의 뜻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이다.
아비와 겨루어 이긴 것이 효자인가.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씨름하여, 하나님의 의지가 꺾어지도록 기도한 것과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 같이 흐르도록 간절히 기도하신 것, 무엇이 다른가.
예수는 하나님 품 속에서 나오신 분이시다.
아들이시지만, 하나님은 듣지 않으셨다.
만에 하나 들어서도 안되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기도하셨다.
이 세상에서는 자식 이길 부모가 없다고 한다.
이것은 인간의 속성이다.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아들을 이길 하나님이 없다는 말씀이 없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께서는 아버지가 명하신 대로 왔다고 하셨다.
명하신 대로 죽으러 왔다고 하신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자식 이길 애비가 없다고 한다.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다.
여호와니까 그렇다.
이삭으로부터 건너뛰어 유다를 통해 마침내 이새를 통해, 나단을 통해, 마리아를 통해 예수가 오셨다.
길이 분명하다.
이삭에게는 맹세하사, 대적의 문을 밟으리라 하셨다.
그가 부활하리라, 승리하리라, 우주를 극복하리라는 뜻이다.
야곱에게는 그 약속이 아니다.
그에게는 율례를 주셨다.
육체의 예법을 주신 것이다. 영적인 것이 아니다.
세상의 혈통과 위계질서를 따라,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이렇게 이어지니까, 우리도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하나님께 반항하고, 하나님의 의지를 꺾는 것이 신앙인가?
우리는 이삭으로 말미암은 신앙이지, 야곱으로 말미암은 신앙이 아니다.
야곱으로 말미암은 것은 육체의 예법이다.
육체만 가나안 땅까지 가는데 필요한 것을 명하시고, 주셨다.
그것도 나중에는 가나안 땅을 밟았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사람의 왕을 구했다.
그렇게 하나님이 손을 뗀 후에, 가지가 마르듯,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해 소멸되었다.
나를 떠나면 가지가 절로 말라진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손을 떼시니, 더 견딜 수 없다.
그 다음에 완전히 다윗의 왕조가 끝나고, 14대가 지나서야 예수가 이 땅에 오셨다.
아브라함은 순종했다고 해서, 의로 여겼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사랑하는 독자를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에 따라, 이삭을 제물로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막으시고, 이삭을 네 씨라 하시고, 대적의 문을 밟을 자가 나온다고 하셨다.
음부의 권세를 이긴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약속이 아니라, 이삭의 약속을 잇는 자들이다.
순서가 그렇지 않다고 고집피우면 망하는 것이다.
예수를 만물의 주라 하지 않았다.
예수는 만유의 주다.
하늘의 주인이시다.
성경 어디든 그렇게 말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자기 아버지도 하나님이라고 말하지만, 예수께서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고 하신다.
여호와를 하나님이라고 하므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율법밖에 없다.
그래서, 남을 정죄한다. 율법은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야곱부터 빗나가기 시작했다.
성경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말이 있는데, 유대인을 향해서 하는 말이다.
우리는 육체로 태어났지만, 침례받아 육은 장사지내고, 영으로 거듭난 사람들이다.
천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은 적도 없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 들어오실 때, 영접하고 수종드는 자들이다.
언제 천사에게 원수를 발등상 되기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신 적이 있는가.
천사는 아브라함의 자손을 도우라고 보내신 것이다.
곧 이스라엘을 도우라고 보내신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는 성령을 주셨다.
우리를 도우라고 친히 성령을 주셨다.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성령.
지금 현재도 나오신다.
나오셨다가 아니라, 물이 흐르듯 계속 나오신다.
수원에서 물이 흘러나오듯,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성령이 나를 증거하시고, 그가 너희 안에 계셔서, 너희도 증인이 될 것이라 하신다.
히1:13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느뇨
히 1:14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이스라엘에게는 성령을 주신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성령을 보내셨다.
요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사, 아들을 나타내셨다.
아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의에 대한 뜻을 보여주려고 나타나셨다.
그것이 그리스도 직분이다.
그리스도는 이름이 아니라, 예수의 직분을 말한다.
2천 년 전에 오셔서, 사람처럼 살다가, 억울하게 죽임당하시고, 하나님이 살리사 부활하셨다.
창세 이후에 살아난 자가 예수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 소망이다.
그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고, 그에게 속한 자들은 부활에 참여할 것이다.
예수를 살리신 이는 성령이시다.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롬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니까,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려고 한다.
열방의 아버지라고 했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대속함을 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천사에게 맡기지 않는다.
천사가 와서, 이스라엘에게 역사하고 준 것은 율법 뿐이다.
갈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행 7:53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을 강조하다보니,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이 흐려지고 말았다.
믿는 자는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성경을 봐도, 왜곡되던, 말던, 차례대로, 창조사를 거쳐, 종교사, 건국사를 통해 우리들의 신앙이 이어진 줄 알고 있다.
우리 베뢰아는 그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셨다.
그의 믿음을 의롭다고 하셨다.
순종했기 때문이지, 그가 예수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대속함을 받아 영생을 얻은 것이 아니다.
그저, 본토친척을 떠나, 내가 지시한 땅으로 가라는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여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믿음을 순종한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에게는 약속하시고, 이삭에게는 맹세하셨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은 자손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자꾸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려고 하니까 문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무엇이 부족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더하려고 하는가.
그렇게 해서, 자기 믿음이 존경받고, 사람들에게 신뢰받을 믿음이 된 줄 생각한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이스라엘이다.
우리는 이삭을 두고 맹세하신 것을 믿는 자들이다.
창 22:16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창 22: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아브라함의 독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독자를 약속하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긍지로 가져야 하는데, 왜 아브라함의 자손을 강조하는가.
오늘 기독교가 아브라함의 자손을 강조하는 것이 문제다.
그러니까, 성령이 그들 속에 머물 수 없다.
롬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들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도 침례 받아, 이 땅에서는 조상이 없어야 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버지가 되셔야 한다.
마 23:9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땅에 있는 하느님이 나를 죄에서 구원할 수 있는가.
나는 이 땅에 나를 구원할 하느님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시다.
우리가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성경해석도 창조사, 종교사를 연결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본토친척을 떠난 것도 단절한 것이다.
건국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것을 지키시는 것이다.
오늘날 그런 것을 혼돈하고 있다.
자기가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앞 사람만 따라간다.
미국에서 양을 도살 할 때, 좁아지는 벽을 만든다.
마지막이 되면, 총으로 죽는다.
그런데도, 계속 따라간다.
오늘 미련하게 그렇게 가고 있다.
그래서, 성경을 그렇게 보면, 오늘날까지 오류가 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를 잘 알아야 한다.
진리는 우리에게 답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의(義)에 답(意)을 주신 것이다.
아들은 뜻을 위해 오신 답이다.
성경을 이해하되, 이미 답을 먼저 주셨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주셨는데, 복음은 영생이라 하셨다.
영생은 창세 이래 예수 입에서 처음 나온 말이다.
복음이 답이다.
진리다.
예수가 영생이시다.
영생의 말씀이 계시오매, 뉘게로 가오리까.
예수가 영생의 말씀이시다.
내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오늘 우리 속에 들어오신 예수 이름은 빛(영광)이다.
창세기의 피조된 빛이 아니라, 영원전부터 있는 영광이다.
빛을 이름하여 예수라 한다.
나는 빛으로 왔다고 하셨다.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 1:6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요 1:7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하려 함이라
요 1: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요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요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더라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데,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가 곧 하나님이시다.
그가 빛이시다. 하나님의 영광이요, 독생자의 영광이다.
하나님과 아들의 빛이다.
그런데, 하나님이라더니, 말씀이라고 하고, 빛이라고 한다고 헷갈려 한다.
밤을 보면, 가시가 돋혀 있다.
그 껍질을 벗겨야 한다.
까면, 또 딱딱한 껍질이 더 있다.
그것을 다 벗겨야 맛있는 밤이 나온다.
믿음 좋다고, 밤 가시까지 먹으면 죽는다.
이와 같이 예수를 점점 깊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을 이해하되, 예수로부터 이해해야 한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계명을 얻었는데, 그 계명을 하나로 집중시킨 것이 성막이다.
성막에 대해서, 이는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하셨다.
히6장-10장까지를 잘 읽어야 한다.
성막의 모형과 실상, 다른 것으로 따지고 들어가지 말라. 예수가 성전임을 말하는 것이다.
율법에 나타난 성막은 그림자요, 모형이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안에 지으리라.
그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에 거하지 않으신다.
그런데, 자꾸 모형과 예수가 틀리다고 한다.
모양이 비슷해도 그림자는 그림자다.
그림자와 예수와 왜 같지 않느냐고 자꾸 성경을 해석하고 따지니까, 시무언이 쓴 책도 이해가 안 된다고 한다.
잘 알아들으라.
오늘 심각한 이야기다.
모형에 예수를 맞추려 하지 말라.
모형을 가졌어도, 율법과 선지자가 있었어도, 그들은 진리를 몰랐다.
예수가 왔어도,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했다.
빛이 세상에 왔어도, 자기 백성에게 왔어도, 세상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 빛을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어렸을 때, 어떤 아이가 엉엉 울면서 뛰어왔다.
해가 떨어질 무렵, 자기 그림자를 보고 놀란 것이다.
아무리 도망가도 그림자가 쫓아오니까 난리났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림자라고 설명해 주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오늘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그림자에 놀라고 있다.
우리에게는 복음, 영생, 하나님의 의가 주(主)가 되어야 한다.
아프리카 목사님이 웃기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자기 여동생이 자기보다 얼굴이 더 검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벽에 나타난 그림자를 봤다.
그 검은 사람이 검은 그림자를 보고,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웃기다면서, 그 이야기를 했다.
오늘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
성경 해석을 율법에서 시작하지 말라.
히 1: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히 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선지자를 통해 부분적으로, 퍼즐을 맞추듯 맞추는 것이다.
구약의 절기, 왜 오늘 안 지키냐고 한다.
그것은 그림자다.
마당에서는 그림자가 누워있고, 벽에 가까이 있으면 서 있다.
무엇이 진짜인가.
그림자니까, 서 있기도 하고, 커졌다 작아졌다가도 한다.
선지자를 통해서 부분적으로 말씀하셨다.
선지자들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성경66권은 여러 가지 퍼즐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전체를 봐야 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 아들을 어떻게 보는가.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들의 직분이다.
그가 하신 일, 그가 하신 말씀을 통해서 보는 것이다.
예수를 나타내는 직임이 꼭 이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굉장히 많다.
눈, 코, 입, 다 다르지만, 다 나다.
그리스도가 병도 고치시고, 다른 일도 많이 하셨다.
또, 여러 가지 핍박도 받으시고, 배척도 당하셨다.
내가 하는 일과 말은 자의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명하신 것을 하는 것이라 하셨다.
그 뜻을 행하러 오셨다. 그리스도다.
하나님의 의에 대한 뜻이다.
누가 나사렛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하겠는가.
길을 가다가 아무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나 똑같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과 같지 않고, 착한데도 많은 고난을 받되, 세상사람들이 할 수 없는 병을 고치신다.
병을 고치는 것은 죄를 사하는 것이다.
네 죄 사함 받았다, 안심하라.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 말씀하신다.
세상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하신다.
예수께서 하시는 일이 그리스도다.
그 일을 통해, 그가 누구인지 알게 하신다.
예수라는 인자를 놓고, 누가 그를 하나님이라 할 자가 있는가.
그가 하신 말씀, 그가 하신 일을 통해,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사, 완성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그가 하나님이심이 확정된 것이다.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모양이 여러 가지다.
절기도 다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내 백성을 보내라, 광야에서 내 절기를 지키리라.
칠칠절은 일곱 주간을 말한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사계절이 없고, 우기와 건기뿐이다.
거기는 보리와 밀을 농사짓는다.
한국은 보리는 여름에 하고, 추수는 가을에 한다.
이스라엘은 다르다.
칠칠절 중에서 40일되는 날부터 열흘간 나팔절(통곡절)을 지킨다.
이 때,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피를 속죄소에 뿌리고, 열흘후에 거기서 나온다.
그 때는 백성들이 대속을 받는 것이다.
일 년간 지은 죄를 단번에 속죄하는 것이다.
다른 때 회개하는 것은 부분적이지만, 이때는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속죄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속죄일은 이스라엘 아무도 죄가 없는 날이다.
이것도 날짜가 틀리다고 한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제일 처음 얻은 것이 성막 짓는 것과 섬기는 법이다.
성막의 모형과 실상은 그것을 쓴 책이다.
뭐가 틀리다고 자꾸 말하는데, 구약은 이미 폐해진 것이다.
왜 거기에 시간을 뺏기고 있는가.
예수는 그냥 빛이요, 영광이다.
히 1: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히 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아들을 여러 가지 모양과 그림자로 말씀하셨다.
퍼즐을 맞추어보면, 그림이 나온다.
선지자들도 알지 못했지만, 부분적으로 봤다.
많은 자들이 보고자 했어도, 보지 못했고, 알고자 해도 알지 못했다.
사무엘, 엘리야 당시에 위대해 보이지만, 다 부분적으로만 본 것이다.
오직 예수가 답이다.
성경은 그 답이 어떻게 나온 것인지 배우는 것이다.
성경의 답은 의다.
예수가 의다.
예수가 하신 뜻이 의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의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모세로부터 시작하지 말라.
다볼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사라지게 하시고, 오직 예수만 남았다.
제자들이 우리는 어찌하여 귀신을 쫓아내지 못합니까 물었다.
귀신은 예수님 앞에 정체를 드러내며, 소리지르며 난리가 났다.
그 때, 이미 예수께서 나가라 명하셨다고 하였다.
신앙은 하나님의 언어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눈으로 보는 것도 아니요, 귀로 들어서 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를 말씀의 종교라 한다.
말씀이 생명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영은 하늘이다.
하늘은 하나님의 본체다.
하늘은 진리다.
예수가 나는 진리라 하셨는데, 예수가 하늘이다.
그는 생명이다.
생명인데, 빛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라고 했다가, 말씀이라고 했다가, 빛이라고 했다고 믿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자기가 가진 고집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의 의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꼼꼼히 읽으라.
성경에 쓰여진 언어는 세 가지다.
로고스는 하나님이라는 뜻도 있고, 영, 생명, 영생, 영원한 지혜,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
레마는 이미 우리에게 들어와 있는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일반 상식, 이미 들은 이야기다.
이스라엘은 모세와 선지자를 통해 신앙을 가졌다.
선지자 없이 스스로 신앙을 갖지 않았다.
선지자들의 말을 듣고, 그 말을 믿고, 가나안 땅에 갔다.
이것을 레마라 한다.
포네는 소리라는 말이다.
지금 현재 들리는 소리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 말씀이 로고스다.
마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여기도 로고스다.
마 12: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무익한 말이라고 할 때, 말은 레마다.
이미 사람 속에 들어와 있는 말이다.
우리가 말해도, 자기 속에 있는 생각을 말한다.
그것이 레마다.
오늘날 강단에서 설교할 때, 레마만 말할 수도 있다.
율법과 지식, 철학만 말하면 그것만 말하는 것이다.
행 13:27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 포네다.
현재 말하고 있는 소리다.
레마는 과거고, 포네는 현재다.
율법이 그 속에 자리 잡아도 구원받을 수 없다.
자기 신념도 똑같다. 신념으로 말하는 것도 레마다.
로고스는 영원전부터 현재도 영원히 있는 말씀이다.
이 말씀이 있기 때문에, 하늘도 있고, 천사도 있는 것이다.
로고스는 하나의 원천이다.
레마는 이미 선지자를 통해 전해진 말, 자기 속에 지식이 되어있는 것이다.
레마는 구원의 역사가 없다.
포네는 들리는 소리를 말한다.
설교자들이 하는 말이, 로고스인가, 레마인가, 포네인가.
이것이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귀신은 영이다. 영혼이다.
육신은 귀에 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포네를 듣는다.
강단에서 하는 웃기는 이야기는 포네다.
영혼에 아무 상관이 없다.
여호와가 어떻고, 저떻고 하는 것은 레마일 뿐이다.
구원받을 수 없다. 신념 때문에 정죄받을 뿐이다.
그러나 로고스는 변함이 없다.
빛이다. 하나님이다. 영이다. 생명이다. 영광이다.
영원전부터 영원까지, 홀로 영원하신 분이시다.
이를 하나님이라 한다.
사람의 영이 들을 수 있는 말씀은 하나님 말씀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설교하실 때, 사람들은 서기관들의 말과 같지 않다고 하였다.
서기관들은 레마만 말하고 있었다.
권세 있는 말, 하나님 말씀이다.
귀신도 그 말을 들으니까 드러나서 떠난다.
앞으로 몇 주간 영에 대해 말할 것이다.
집중해서 들으라.
사람의 영이 들을 수 있는 것을 귀신이 듣는다.
우리가 어느 말을 증거하고, 어느 말을 들어야 하는지 알게 하소서.
귀신도 들을 수 있는 말을 전하게 하소서.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앞으로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언어를 우리가 깨닫고 그 말씀이 곧 생명이요, 진리요, 그 말씀이 빛이요, 그러나 레마는 생명도 빛도 아니요, 포네는 더욱 아니요, 우리가 어느 말을 증거 해야 되고 어느 말을 들어야 되는가? 왜? 우리는 귀신이 놀라서 도망가지 않는가? 성령이 너희 안에 있으면 귀신이 나간다. 귀신이 쫓겨 나가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임하였느니라 하신 말씀처럼 귀신이 그 말에 놀래서 듣고 나갈 수 있는 귀신도 들을 줄 아는 영혼이 들을 줄 아는 말을 전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이름 받들어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