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언베뢰아특강31(하나님의말씀을받은자20180112)
환언베뢰아특강(31) 2018.1.12.(금)
나의 생명 하나님(엡 6:10~20)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6:10~20)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모두 귀로 듣기만 하지 말고, 체험하게 도와주셔서, 자기가 흔들리지 않도록, 굳건한 반석에 세워주시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노파심에 말씀 드린다. 우리 교인들은 말씀을 들었다. 일일이 가르칠 수 없는 것은 책으로 써서 읽게 했다. 그렇게까지 했으면 지금은 많은 것을 알아 다져졌어야 할 텐데, 나중에 보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 사람만은 신앙이 온전케 되었을 것이다." 한 사람들마저 휙 넘어지니, 그들은 그냥 내 앞에서 일을 하기 위해서, 잠시 육체가 편하기 위해서 알아들은 체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교인들도 말씀을 들으면서 "아멘! 아멘!" 하지만, 조금 무슨 일만 있어도 금방 시험에 들어 믿음이 무너지고, 그 속에 들어 있어야 할 진리가 남아 있지 않은 것을 보면 기가 막힌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홀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실 때에 얼마나 고독하셨을까?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다는 제자에게 주님은 "네가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 하지만,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셨다. 장래 일을 훤히 보시는 주님은 참으로 답답하셨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믿음이란 것은 체험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피를 흘리셔서 우리가 그 피로 대속되었음을 침례로써 체험하는 것이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의 일이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다. 비록 시간적으로는 예수의 공생애와 우리 사이에 거리가 있지만, 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를 하나로 묶으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죽으신 것은 내가 죽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죽으면 다시 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와 연합했다. 죄인이라는 신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는 길에 들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이것은 체험이다. 내가 침례교회 목사여서 침례를 얘기하는 게 아니다. 침례가 중요한 체험이기 때문에 얘기하는 것이다. 누구나 물에 들어가는 역사적 체험을 하지 않는가? 게다가 침례의 현장에는 증인도 있다. 침례는 감각적으로 체험한 일이다.
믿음은 체험이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대로 체험한 것이다. 진리도 체험해야 한다. 히브리서 5장 12~13절에도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라고 했다. 여러분은 진리의 선생이 되었어야 할 터인데 여전히 젖이나 먹어야 하니 어떻게 하겠는가?
김기동 목사가 지금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저 분은 가르치고 있고, 나는 아직 부족해!' 하고 겸손한 체하지 말라. 김 목사는 마땅히 알아야 하고, 자기는 몰라도 되는 사람으로 편 가르기 하지 말라. 예수 제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받고 그것을 나중에 성령으로 완전히 소화했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늘로 가셨어도, 제자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가 이 땅에서 말씀하신 것과 똑같이, 예수가 자기 몸속에 들어 있는 것과 똑 같은 체험을 가지고 가르치고 설교했다. 우리도 그와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여러분이 이렇게 태만하게 하다가는 과연 자기 영혼을 지킬 수 있겠는가?
여러분은 나보다 못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먼저 본 사람, 먼저 알게 된 사람에 불과하다. 여러분은 나보다 더 많은 복을 받을 수 있고, 더 많은 능력을 받을 수 있고, 더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왜 스스로가 제한하여 "나는 그렇게까지 될 수 없다." 하고 스스로 무시하는가? 그러니까 하나님이 쓰지 못하는 것이다. 성경에 "큰 집에는 귀히 쓰는 그릇, 천히 쓰는 그럿이 있는데, 너는 귀히 쓰는 그릇이 되기 위해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라고 했다. 노력하여 자신을 갈고 닦으라는 것이다. 크게 쓰는 그릇이라니까 교회에서 큰소리 내고, 잘난 체하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얼만큼 감당하느냐 하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를 불러서 쓰신다. 그래서 목사도 성직자라고 하고, 교회에서 일하는 사람도 성직원이라고 한다. 이는 세상의 직분과 다르다. 하나님이 부르셔서 하나님 앞에 나온 사람들이다.
고린도전서 1장 1~2절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라고 했다. 사도로 택하심을 받은 자,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을 언급했다. 우리는 모두 부르심을 받은 자이다.
사도나 성도나 똑같다. 사도는 주님이 직접 데리고 훈련시킨 심부름꾼이라는 말이다. 심부름 사(使)이다. 심부름을 시키면서 체험을 시킨 사람들이다. 성도는 주님의 부활 승천 후에 성령이 직접 불러 택하신 자들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이다. 그래서 예배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나왔다고 하지 않는가? 하나님이 "아담아!" 하고 부르시듯, "모세야!" 하고 부르시듯,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목사가 되는 것도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것이다. "내게 오는 자는 부모도, 처자식도, 전토도 버리고, 네 자신을 포기하고 와야 나의 참 제자 되고, 내게 합당한 자가 된다." 하셨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돈을 버는 일을 포기하고 오직 주를 위해 살겠습니다." 하고 오지 않았는가? 그때 사람이 안수했는가? 하나님이 목사로 세운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종이다. 그런에 헤까닥 해서 타락한 소리를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사람들이 자기 신분을 그렇게 망가뜨리는 걸 보면 안타깝다. 어떤 사람은 목사를 근로자로 여긴다. 목사는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일하는 사람이 아니다. 24시간 항상 대기하며 일하는 사람이다. 정말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다.
이번 학기에는 지난 학기와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공부할 것이다. 베뢰아아카데미에서 하나님의 의도라는 것이 있다. 그것을 배워 윤곽을 잡는다.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알아야 할 것을 보충하는 것이다. 전에 배운 것을 절대 부수는 게 아니고, 보충하는 것이다. 지금와서 "그게 다가 아니었어." 하면 안 된다. 다가 아닌 게 아니다. 갓난아이라도 완벽하게 태어난다. 부족한 게 아니다. 기능은 다 있다. 더 강건해져 가는 것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다. 여러분이 이미 완벽하다. 그런데 더 배우는 것이다. 그러니 먼저 배운 것을 부정하지 말고 더 성장하라는 말이다. 일곱 살 짜리가 한살 더 먹으니까 여덟 살이 되는 것이다. 열 살을 부인하여 열한 살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위에 쌓아가는 것이다. 열두 살 짜리가 세상을 아는 것과 열 살 짜리가 세상을 아는 것은 다르다. 그만큼 성장한 것이다.
아이는 젖을 먹으면서 큰다. 나중에 이유식을 하고, 때가 되면 제 손으로 숟가락질을 하고, 나중엔 제가 밥을 찾아 먹는다. 그렇게 성장해야 하는데, 맨날 젖꼭지를 대줘야 먹는 사람 같으면 어떻게 하는가?
강의를 다시 시작하면서 우려하는 것은 과연 알아들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듣는 내용이 항상 유사하게 들릴지라도 그렇지 않다.
학교에서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면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그냥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자기가 어디에서부터 막혔는지 발견해서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막힌 곳까지 다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야 한다.
여러분은 제발 선생이 되어야 한다. 나는 학생들에게 그렇게 말한다. 뭘 듣고 암송한다고, 그것이 머리에 다 머무는 게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주면 된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자기 지식을 다 뺏어갈까 염려할 필요가 없다. 듣는 사람은 절반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가르치면 100% 알게 된다. 그래서 자꾸 증거할수록 믿음은 성장하게 되어 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란 말씀을 여러 차례 드렸다. 모든 사람이 종교성을 갖고 있다. 키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을 보면 위압감을 느낀다. 그래서 위계를 인정한다면 그것도 종교적인 것이다. 종(宗)이란 글자는 지붕 위의 용마루라는 뜻이다. 종교(宗敎), 종가(宗家)라고 할 때에 모두 사용되는데, 위계가 있으면 종교가 되는 것이다. 세상에서 아무리 잘난 사람도 어떤 종교 앞에 가면 머리를 조아린다. 그렇게 세워놓은 것이 종교이다.
인류가 오래전부터 그랬다. 옛날에는 추장의 신적 권위를 인정했다. 추장은 보이지 않는 뭔가를 자기 위에 만들고 그 권위를 인정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한마디로 말해, 하나님을 누구라고 하는가? 아버지라고 한다. 가장 위라는 것이다. 더 이상 위가 없다. 가장 높은 분이 하나님이다. 그래서 그를 '하나님 아버지'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왜 하나님이라고 말한다고 했었나?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재산도 있고, 목숨도 있다. 강도가 그에게 "너 재산 내놓을래, 목숨 내놓을래?" 하면 재산을 내놓는다. 재산보다 목숨이 크기 때문이다. 목숨을 내놓으면 살 수 없다. "목숨을 내놓을래, 복종할래?" 하면 죽기 싫어서 복종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죽기를 무서워하며 종노릇한다고 했다. 이것도 종교적이다. 그런데 우리 목숨 위에 누가 있는가?
목숨이란 것은 무엇인가? 하루살이는 하루밖에 못 산다. 하루살이가 90살 노인과 대화한다면? 저녁이 되니 하루살이가 극노인이 되었다. 하루살이가 90살 노인 앞에서 "내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랜 세월을 살았소!" 할 수 있겠는가? 하루살이가 노인의 삶을 헤아린다고 헤아릴 수 있겠는가? 이렇게 각각 수명이 있다. 그것이 다하면 끝이다. 육신의 수명은 누구나 단 한 번밖에 없다. 그래서 수명이 다 되면 끝나는 것이다.
노아 이전에는 므두셀라가 969세까지 살았다. 31년이 부족한 1000년을 산 것이다. 그 므두셀라가 노아의 할아버지인데, 홍수가 나던 해에 죽었다. 홍수에 죽은 것은 아니고, 그가 죽자 홍수가 난 듯하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므두셀라라는 뜻은 그 이름이 종말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노아 이후에는 사람의 수명을 120년으로 제한했다. 갑자기 줄은 것이 아니라, 점점 짧아졌다. 이제는 더 줄어들어서 100세 이내로 살지만 최장 120년까지 살 수 있다는 것이 육체의 수명이다. 아무튼 육체로는 누구나 죽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나도 어릴 때는 '얼마 후에 죽을 노인들은 얼마나 두려울까?'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나이가 먹어 보니 다르다. 2000년도가 엊그저께 같은데 벌써 2018년이다. 그때 나는 센터 설계 구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덧 센터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왔다. 그때부터 지금만큼만 시간이 지나면 나는 100살이 된다. 이렇게 나이를 먹어 보니, 죽음이 두렵지 않다. 아주 담당하게 마음의 준비가 된다. 내가 몇 년 후에 갈지, 내일 갈지 모른다. 나는 덤으로 사는 것이다. 그런데 떠날 때를 위해 담담히 마음의 준비를 한다. 낙원에서 어떤 위로를 받고 부활하여 어떻게 될 것인지만 생각하지 두렵지 않다. 너무 신기하다.
육체는 누구나 죽는다.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다. 우리 영이 죽는다는 뜻이 아니다. 육체가 죽기로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만물이 수명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새로운 소망을 하나님이 주셨다. 하나님의 생명 같은 영원한 생명을 사람에게 주어 사람도 영생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시고 배려하시는 것을, 사람들이 말로는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하시려 한다는 것의 가치를 좀처럼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인색하고 하나님 앞에서 원망하고, 근심하게 하고, 괴롭히는 것이다.
영생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네피림은 영이 없기 때문에 육체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개 혹은 돼지와 마찬가지다. 개나 돼지가 죽은 모습을 봐도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개나 돼지에겐 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바탕이 주어졌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생기를 부어서 생령이 되게 하신 것이다. 네피림처럼 죽으면 끝날 사람들에게 영을 부어서 영적 존재가 되게 하신 것이다.
영은 소멸되지 않는다. 생명을 가지고 있으면 생명을 가지고 영원히 사는 것이고, 사망을 가지고 있으면 사망을 가지고 영원히 사는 것이다. 영은 인격이 아니다. 영원한 존재일 뿐이다. 혼이 인격이다. 종이가 투명한 유리에 붙어 있으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종이 스스로는 공중에 떠있지 못하나 유리로 인해 그 위치에 머물러 이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인격이 영원한 인격이 되도록 잡아 주는 것이 영이다.
영 혼 육이라는 말을 우리가 사용하는데, 혼이라는 것은 정신 혹은 호흡이라는 뜻인데, 육체와 그것을 분리할 수가 없다. 그래서 혼이라는 말을 쓸 때에는 육체까지 싸잡아서 말하는 것이다. 짐승도 혼이라고 할 때에는 육체까지 말하는 것이고, 사람의 경우도 그렇다. 문자적으로 그렇다. 그런데 영혼이라고 할 때에는 혼이 영원한 존재가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인격이 영원한 인격이 된 것이다.
이런 영혼에게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영생을 얻은 것이다. 영생은 인격이 아니다. 그런데 영생을 얻은 우리 영혼에 성령이 오셔서 우리 안에 있는 영생을 보증하신다.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그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보증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이론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영생 얻으려고 예수 믿었고, 영생 얻으려고 과거를 침례 받아 장사 지내고 나와서 예수 이름으로 죄사함 받았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생을 받은 것이다. 예수가 영생이요, 그를 알고 믿는 것이 영생이다. 우리는 그를 영접했다. 예수 아는 지식, 예수 이름, 그 믿음이 어떻게 우리 안에 들어오는가? 성령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성령이 와서 영생을 우리 영혼 속에 영원히 머물도록 보증해주신다.
성령이 한번 들어오시면 영원히 떠나지 않으신다(요 14:16). 성령이 들어왔다 나갔다가 출퇴근하지 않는다. 예수 믿는 사람이 극한 타락을 했다 할지라도 성령이 떠나지 않는다. 예수 이름 가지고 사람의 영혼 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그 사람이 설령 타락하였다 할지라도 상이 없을 뿐이다.
우리는 본래 나중에 하늘에 올라갈 때 세마포를 입는다고 했다. 세마포는 성도의 옳은 행실이라고 했다. 세마포를 입는다는 것은 하늘에서 상을 받는 것이다. 상을 바라지 않는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했다(히 11:6). 우리가 침례를 받은 후에는 구원받으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상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바울은 "나는 육신에 유익하다는 것을 배설물처럼 뒤로 두고 돌아보지 않는다. 나는 이루었다 함도 아니고, 이루려고 부활의 푯대를 향해 간다."라고 했다.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 부활하여 영생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낙원에 들어가는 것은 부활을 확보하는 것이고, 나중에 부활해서 비로소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다. 신자에게 만일 부활이 없다면 믿는 것도 헛것이고, 누구에게 믿으라고 하는 것도 헛것이고, 순교하는 것도 헛것이라고 했다. 부활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했다.
예수 믿고도 제 맘대로 살 수는 있다. 그러나 자기 공력이 없으면 받을 상이 없다고 했다. 공력이 없으면 그 사람은 불 가운데 구원받은 것과 같다고 했다. 불로 시험할 때, 나무나 풀로 지은 것은 다 타버리고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예수 믿으니까 구원은 받지만, 그런 사람은 화재 현장에서 몸만 빠져나온 사람과 같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 이제 우리는 상을 바라는 것이다.
우리 부목사들도 나와 비교하니까 낙심하는 것이다. 사람이 다 같지 않다. 주인이 종을 불러 한 므나씩 줬다. 주인이 나중에 돌아와 보니 어떤 종은 열 므나를, 어떤 종은 다섯을 남겼는데, 어떤 종은 한 므나를 땅에 묻어 놓았다가 주인이 오니 파내서 그것을 그대로 내놓았다. 사람이 다 같지 않다. 나무에도 기둥이 있고, 얇은 가지가 있다. 다 같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주님이 제한한 것은 아니다. 자기들이 일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가 다 있다.
영이 없으면 목숨 뿐이다. 그런데 영이 죽었다. 그래서 그 영으로는 못 산다. 그래서 하나님이 영생을 주셔서 우리 영이 영생을 한다. 쉽게 생각해서 우리에게 '목숨'이 있다. 거기에 창세기 2장 7절에 말하듯 '영'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면 그 영이 산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어 계명을 어김으로써 영이 죽었다. 그래서 목숨만 남은 것이다. 그런데 '영'은 항구적인 존재이다. 하나님이 그를 불쌍히 여겨서 '영'을 살리는 일을 한 것이다. 그런데 '피'만이 영을 살릴 수 있다. '하나님의 피'만이 사람의 영을 살릴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피'를 흘리신 것이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 그래서 우리 영은 살았다. 예수는 죽고, 우리는 산 것이다.
그런데 죽은 예수가 어떻게 살았나? 하나님이 성령으로 그를 살린 것이다. 로마서 8장 11절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라고 했고, 사도행전 2장 24절은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라고 했다.
예수는 하늘에 가실 때에 자기 목숨 가지고 가신 것이 아니다. 자기 생명 가지고 가신 것이 아니다. 자기 생명은 어디 있나? 우리에게 있다. 그의 피가 어디에 있나? 그 피가 우리에게 오는 바람에 그가 죽었다. 피에 생명이 있다고 했다. 예수가 자기 피로 인해 살았다면 하나님이 그를 살릴 필요가 없다. 예수가 자기 피로 살았다면, 생명이 여전히 그에게 있는 것이지, 우리에게 옮겨진 것이 아니다. 예수가 죽어야 우리가 사는 것이다.
어찌 보면 잔인하다. 예수가 겟세마네에서 기도했지만, 아버지는 듣지 않으셨다. 그가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셨다. 하나님은 그를 버리셨다. 그의 생명은 그에게 없다. 우리에게 왔다. 우리는 침례로 그 사실을 체험했다. 침례가 물속에 들어갔다는 의식이 아니라, 침례이다.
예수는 하나님이 살리셨다. 예수께서 원하신 것이 그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하늘을 지으셨다. 그런데 아버지 품속에 있던 아들이 바로 하늘에 들어가면 아버지와 아들은 동등한 권위가 된다 아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그는 자기를 낮추되 천사보다 더 못한 존재가 되셨다. 천사는 부리는 영으로서, 비교적 낮은 존재이지만, 그래도 사람보다 낫다. 공간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공간을 초월하지 못하는 존재가 사람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이 되고자 하셨다.
사람이 되고자 한 이유가 무엇인가? 육체를 입은 것은 죽음을 맛보려 하신 것이다. 그래서 순종하고 복종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순종은 알고 따르는 것이고, 복종은 이유를 모르지만 따르는 것이다. 빌립보서 2장 6절 이하에는 그가 사람이 되어 순종하고 복종하셨다고 했다. 때로는 알고 따르셨고, 때로는 모를지라도 명령하시니 따르셨다.
이렇게 하나님이 아들보다 사람을 더 사랑하는 모양이 되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아들이 기도했지만, 아버지는 듣지 않으셨고, 결국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하셨다. 그렇게 예수는 죽으셨다. 그런데 스스로 살아나면 그것은 기절했다가 깨어난 것이다. 그가 기절했다가 깨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리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예수가 살아난 것을 기적이라 말한다. 예수가 살아난 것은 기적이 아니다. 기적이라고 하면 신앙이 아니다. 예수 부활은 기적이 아니고, 하나님이 살리신 것이다. 기적이라면 그가 기절했다가 구사일생 살아난 것이다. 그는 분명 옆구리를 찔려 물과 피를 다 흘리셨다. 죽으셨다. 자기 것은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살리신 것이다. 성령으로 살리신 것이다. 그런데 그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다. 이는 우리 죽을 몸도 살리려 하시는 것이다. 기적을 일어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려는 것이다.
예수가 살아난 것은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리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심은 우리를 살리려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믿어야 한다. 이것이 확고부동해야 한다. 내가 성령을 받은 것은 장사 잘되게 하려고 주신 것이 아니다. 성령이 이 세상에 직업소개소 소장으로 오신 것이 아니다. 성령은 우리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려고 오신 것이다.
예수는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이를 섬겼고, 순종했고, 간구했다. 그가 부활하셨다. 누구에 의해서?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그는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하늘에 올라가 계셨다.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서 하늘에 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살리셔서 하늘에 오르게 하신 것이다. 그전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과 아들의 생명이 각각이었다. 그러니 아들이 죽은 것이다. 그때 아버지는 안 죽었다.
지금 인자는 아버지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도 아버지의 생명을 주신 것이다. 영생은 아버지의 생명이다.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의 생명으로 살게 하신 것이다.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 것은 아버지의 생명으로 살게 한 것이다(요 12:49~50). 말씀을 준 것은 영생을 준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는 게 문제다.
왜 하나님이신가? 목숨이 재물보다 크다. 그래서 재물을 포기하고 목숨을 살린다. 그런데 영을 줬더니 영이 죽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영을 살려 놓았다. 거기에 성령으로 말씀을 받아야 한다. 성령으로 받는 말씀이 진리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한다는 말은 진리를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살리는 것은 진리다. 그래서 진리의 생명을 말하는 것이다.
누구를 하나님이라고 하는가? 아주 마지막, 진리의 생명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할 때의 진리다. 나를 살려줄 이가 누구인가? 마지막이다. 여기저기 있는 것이 아니고, 유일한 분이다. 그분만이 나를 살릴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라고 한다. 하나님이라는 말은 마지막이라는 말이다. "너를 살릴 이가 있느냐? 지옥에서 멸망하게 된 처지에서라도 살려줄 이를 믿느냐?" 이것이 "네가 하나님을 믿느냐?" 하는 말이다.
하나님을 치사하고 인색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나의 마지막이다. 어떤 사람이 이랬다. 40년 정도 됐다. 어떤 분이 와서 남편이 죽게 되었다고 강청하기에 병원에 갔다. 그분이 돈을 수백 억을 벌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암으로 죽게 된 것이다. 이게 웬일이냐며 울고불고 난리였다. 환자는 자기가 중학교 때까지 교회 다녔다면서 살려주시면 수백 억 번 것에서 절반을 내서 교회를 짓겠다고 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다 죽게 되었어도 다는 아니고 절반을 내놓겠다고 흥정을 했다. 내가 그를 위해 기도하니 편해졌다고 했다. 부인이 옆에 있었다. 내가 내일 오겠다고 하니까 부인이 따라 오면서 "내일 안 오셔도 됩니다." 했다. 이백 억 날라 가는 것보다 남편이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사람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일을 놓고 흥정을 했다. 과연 당신의 하나님이 누구인가? 돈인가, 부처인가, 진리와 생명인가?
성경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고 진리, 즉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고 했다. 당신을 살릴 수 있는 마지막이 진리의 생명이다. 종교는 하나님이 없는 수양을 한다. 그런데 우리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
마지막 생명이 누군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들어와야 할 진리와 생명, 과연 그것이 있느냐? 하나님이 있느냐?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고 했다. 이는 하나님의 영이라는 말이다. 예수가 진리라는 말도 그가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내가 곧 생명이다."라는 말도 그가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육신도 귀하고 재물도 귀하나 마지막은 그 생명이다.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살려주지 않으면 다 끝이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이해해야 한다.
무엇을 하나님이라고 한다고? 내게 임한 생명! 영원 전부터 계신 그 생명! 그를 하나님이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생명을 얻으려는 것이다. 영생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누가 영생이냐? 예수를 믿는 것이 영생이다.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는 하나님을 생명으로 보지 않고 다만 전능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불신자들도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라면 살려줄 수 있을 텐데!" 이런 말을 한다. 하나님은 마지막이다. 죽은 자들 중에서 당신을 살릴 수 있는 최후의 보장을 가진 분이다. 최후에 내 생명을 보장해 주시는 분, 그가 하나님이다.
예수가 나의 최후 생명을 보장하신다. 그를 누구라 하나? 하나님! 성령이 나의 생명을 보장하신다. 그를 누구라 하나?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나님이다. 삼위일체이다. 아버지의 말씀은 듣고 아들의 말은 안 듣는다는 사람은 생명은 없는 것이다. 성령은 좋고 말씀은 싫다는 사람도 영생이 없는 것이다. 영원하고 완전하고 생명이신 이, 내가 최후에 의지할 이가 하나님이시다. 당신에게 하나님이 있는가? 하나님이 없으면 못 사는 것이다.
이번 학기는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할 것이다. 오늘은 서론을 조금 다룬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 알아야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여러 신들 중의 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를 살리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당신은 하나님을 믿는가? 정말 믿는가? 하나님을 섬기는 데 돈이 들어가고 피곤하니 인색해지지 않는가? 자식을 키우는 데에도 그 정도는 들어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키운다. 하나님은 그보다 더 귀한, 우리 생명의 마지막이다. 우리가 생명을 지키는데, 자기 모든 것을 드리고서라도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나의 생명이시다! 하나님은 우리 자녀들의 생명이시다! 구원은 부모가 대신 받을 수 없다. 목사도 대신할 수 없다. 각 사람이 하나님을 모셔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한다. 가장 마지막, 극치로 여긴다. 가장 높은 분, 오직 한 분, 극치로 여긴다. 하나님 말씀 외에는 누구 말도 안 듣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 외에 다른 생명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생명과 진리, 진리와 생명을 하나님이라 한다.
우리는 종교가 아니다. 여러 종교가 있고, 위인이 있다. 또 유상, 헛것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아브라함이 생각하고 믿는 그 믿음과 똑 같은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것을 의로 여기셨다. 법으로 여기신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면 다른 신을 둘 수 없다. 그리고 우상을 만들거나 섬길 수 없다. 우상은 헛것이다. 그것을 섬기면 삼사 대 저주 받는다.
여러분이 명절 때 되면 어렵다. 아브라함처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지 않는 한 어렵다. 제사 때에 절을 했다고 치자. 하지 말라고 했는데 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했는데 먹었을 때, 아담은 영이 죽는 줄도 몰랐다. 우상 앞에 절을 꾸뻑 하면? 우리의 육체에 들어와 있는 귀신들이 할아버지라는 것이 들어와 있기도 하고, 아버지, 고모부 등등이 들어와 있는 것을 발견한다. 삼사 대가 머물러 있는 것이다. 삼사 대가 저주 받게 되어 있다.
그런데 안식일을 범하면 그날로 돌에 맞는다.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제해진다 하셨다. 예수께서 마가복음 2장 27~28절에 말씀하시길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하셨다. 안식일을 어기는 사람은 돌에 맞아 죽었다. 그렇게 엄격하게 지켰다. 예수는 주일에만 주인이 아니라, 안식일에도 주인이다. 그 엄격한 주인이 주일도 다루는 것이다. 우리가 주일을 무시하면 백성 중에서 제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10장 23절부터 소망을 가진 사람은 굳게 잡으라 했고, 모이기를 폐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했고, 또 짐짓 죄를 짓는 자가 되지 말라고 했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두렵다고 했다. 성일을 무시한다는 것 자체가 신앙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것으로 드려야 한다. 시간도 그렇고, 재물도 그렇다. 재물은 십일조를 드리라고 했고, 월삭을 드리라고 했다. 월삭(月朔)이라는 것은 매월 초하루에 지키는 것인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것을 유월절처럼 중요하게 여겼다. 그날에 공수로 나오지 않고 제물을 드렸다. 월정헌금도 여기에 근거를 두어서 매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성경에 월삭에 대한 말씀이 많다. 이스라엘 백성이 월삭을 무시하여 저주 받기도 했다. 월정헌금이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자신이 성락 교인이라는 것은 월정헌금을 드림으로써 성락 교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버리운 사람들이 가져오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내가 너희들의 십일조와 월삭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그가 생명의 극치라는 것을 자신의 행위로써 인정해야 한다. 자기가 자기 생명을 얼마나 사랑하고, 자기 생명을 위하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오늘은 우리가 부르는 '하나님'이라는 명사에 대해서 그 이유를 분명히 알고 부르자는 의미에서 설명했다. 본문에 대해서는 나중에 계속 다룰 것이다.
나의 생명 하나님! 나의 생명 하나님! 나의 생명 하나님! 나의 생명 하나님! 나의 생명 하나님! 나의 생명 하나님! 나의 생명 하나님! 나의 생명 하나님! 나의 생명 하나님! 나의 생명 하나님! 나의 생명 하나님!
사람들보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는 이유를 알았는가? 하나님은 생명이다. 생명을 하나님이라 하는 것이다. 생명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극치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를 누구라 하는가? 아버지라 한다! 가장 높은 분, 극치로 여기는 것이다!
현장녹취 : 성락교회 성락선교센터 이기택 목사
[출처] 환언베뢰아특강(31) 나의 생명 하나님(엡6:10~20) 성락교회 김기동 감독|작성자 이기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