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언베뢰아특강010(20170721)
환언베뢰아특강010_롬 7:15~25_20170721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그 의를 구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정말 하나님 위주로 사는 신본주의 신앙을 찾아가는 귀한 성도들이 또 이렇게 왔습니다. 주님, 저들에게 지혜를 주시고 말씀을 주셔서 귀한 일꾼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오늘도 종의 입술에 기름 부으셔서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이름 받들어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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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가면 침례교회에서는 성경 본문으로 구약성경을 거의 안 읽습니다. 신약성경만을 설교의 본문으로 삼습니다. 그냥 읽기는 해요. 구약 창세기 1장부터 읽기는 하지만, 설교를 그렇게 한다 이말입니다. 그것은 아주 철저히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대개 신약성경보다 구약성경을 본문으로 삼는 데가 많아요. 그런 설교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복음에 대한 상당한 이해의 차이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내가 전에 구약성경은 한 번 읽어도 신약성경은 열 번을 읽으라, 10:1로 읽으라고 내가 몇 번 강조했죠? 그만큼 신약성경을 아주 중요시합니다.
그것은 구약성경은 예를 들면 하나의 배경이요, 비유입니다. 비유는 한 번 읽으면 대개 아니까. 그러나 이 신약성경은 예수가 직접 말씀하시는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의 말씀과 진리를 혼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많은 예로 듭니다. 예를 들 때는 구약성경의 내용과 똑같이 글씨 한 자도 똑같이 그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하나의 비유니까요.
심지어 구약성경에는 성전 짓는 법과 그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법이 있는데, 그 모든 것이 다 하나의 비유입니다. 성전에 대한 이야기도 하나의 비유입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 성전은 예수가 성전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에 지으리라.’ 하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를 막 비난하고 조롱합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46년 동안에 세운 성전을 사람이 어떻게 사흘에 지을 수 있느냐?’ 저 거짓말쟁이, 순 허풍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후에 성령이 오신 다음에,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야 성령으로 그 일을 깨닫습니다. ‘아, 예수의 말씀이 진리고, 이 성전은 하나의 비유였구나.’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는 예수를 거짓말쟁이 허풍쟁이라고, 46년 동안 지은 이 성전을 단 사흘에 짓는다고 하니 저런 거짓말쟁이가 어디 있느냐 하고 막 비난했습니다.
또 성경에 보면, 어디에는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두 마리의 새(마 10:29)’라고 했고, 또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다섯 마리의 새(눅 12:6)’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복음서마다 이쪽 복음과 이쪽 복음이 다른 데가 있습니다. 다 성령에 감동받은 사람들이 쓴 글인데 그러면 어떤 것이 진짜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도 거짓말을 하느냐?' '그러니까 성경은 거짓말쟁이다.’ 이렇게 보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비유니까 새가 팔린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 그 한 마리 두 마리에 무슨 특별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가 들어보면, 혹자는 그럽니다. ‘성경에는 이런데, 당신이 거짓말한다.’ 합니다. 아주 거짓말이라는 말을 많이 해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그러나 진리는 아주 확실해야 합니다. 이것을 잘 깨달을 수 있도록 해서.
구약성경은 많은 비유를 사용합니다. 그것을 설교 중에 예를 들어서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의 건국사를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이스라엘 사람들의 조상의 어떤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예수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를 말합니다. 아브라함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말합니다. 모세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말합니다. 다윗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말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요한복음 5장 39~40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창세기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역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서 1장 2~3절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믿는데, 이 모든 것이 아들을 위하여 아들로 말미암아 지으셨느니라. 그 아들에 관하여는’ 하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이 창조한 것도 예수가 없으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위하여 그로 말미암아 그가 창조하셨다고 이렇게 말씀하죠?
우리가 이런데 아주 한마디 한마디를 참 잘 들어야 할 것은, 우리를 이단이라고 할 때 가장 중심이 무엇인가 하면 귀신에 관한 내용보다는 ‘양태론’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양태론이 무엇인가? 목사들도 양태론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양태론이 무엇인가? 여러분이 그런 소리를 많이 듣죠? ‘양태론’이니 ‘이중 아담론’이니. 다 거짓말쟁이들이거든. 나는 양태론을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듣는 사람들이 오해하며 들은 것이 그런 것이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 양태론이라는 것이 뭐냐? 성부와 성자와 성신, 삼위 하나님의 인격이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게 양태론입니다. 그것을 말하는 거예요. 내가 언제나 말하죠? 성부의 인격, 성자의 인격, 성신의 인격, 각각 인격이 독립적이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그런데 뭐 관심도 없고 뭐한 사람들은 ‘듣기는 들었는데 정말 그게 그건가?’ 하지만, 그렇지 않거든? 이것은 하나의 이단이 되어서 형벌을 주어서 사형을 시키는 것인데, 그렇게 무섭다 이말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모를 테지.
보통 ‘인격(人格)’이라는 것은 딱 이것이다! 하고 짚어 말하기는 좀 힘들어요. ‘사람의 격’이라 하는 뜻도 아니에요.
인간은 눈에 보이고 인간은 오랜 역사가 있기 때문에, 사람이 눈뜨면 가장 먼저 보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이가 뱃속에서 태어나서 가장 먼저 보는 것이 누구에요? 엄마입니다. 아버지의 얼굴 언니 오빠들의 얼굴을 보고 자랍니다. 금방 뱃속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닭을 보여줍니까, 개를 보여줍니까? 엄마가 ‘아가 아가, 까꿍 까꿍’ 하고 아버지도 또 그렇게 하고. 사람이 제일 많이 사람을 만나게 되고 사람을 알게 되고. 그래서 사람을 알아야 사람이 되는 거예요. 사람을 모르면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을 알아야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알게 하려고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인격이란 사람다운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로 지. 정. 의. 입니다. 지성(知性)과 감정(感情)과 의지(意志) 인격은 이렇게 세 가지의 지정의를 갖추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지성이 있고 감정 곧 감성이 있고 의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인격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를 모르고서, 예수는 인격이 아니라 신격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굉장히 복잡해집니다. 아주 지옥 갈 말은 아니지만, 복잡해집니다. 예수도, 하나님도 인격이십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이에요? 그러나 그는 분명히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사람으로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기가 아주 쉬운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격이라고 말하면 그것은 신성(神性) 곧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서는 사람과 같은 인격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존재이시다.’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을 닮았다는 이런 뜻은 아니고요, 지정의를 의미하는데 그런다는 말입니다.
(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람이 아무리 지혜롭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미련한 것만 못하다고 말씀합니다. 지성이 있고.
(정) 감정. 하나님은 사랑이 있으십니다. 분노도 있으시고. 그는 감정을 가지셨습니다.
(의) 하나님은 뜻이 있습니다. 뜻을 가지시고 뜻대로 하십니다.
그런데 아까 말한 대로 이것이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인격이 하나고, 성부와 성자와 성신이시다.' 이러면 양태론이 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라고 할 때, 인격이 하나라고 하면 안 됩니다. 저는 평생에 이렇게 말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아니고, 이것을(인격이 하나) 양태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옆에서 물어보면, 이제까지 헛되이 알고 있으면 대답도 못 할 것입니다. 어디 양태론자 있나 없나 찾아봐요. 이야기 해봐요. 다 모르거든.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신 한 분이시다. 삼위가 일체이시다 하는 것이지, 인격이 하나다가 아닙니다. 뭐예요? ‘삼위가 일체이시다.’이지, '인격이 하나다.'가 아닙니다. 아셨어요?
인격은 성부의 인격이 있고, 성자의 인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마 26:39)’ 아버지의 뜻이 있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내 뜻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 연약함을 성령이 아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신다. 하나님은 성령의 생각을 아시고 그 뜻대로 선을 이루신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은사를 받는 것도 고린도전서 12장 11절에 ‘성령이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다.’ 그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뜻, 성자의 뜻, 아버지의 뜻이 있습니다. 각각 독립적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아버지 앞에 기도할 때, 자기의 뜻을 포기합니다. ‘아버지여, 이 잔이 지나가게 하옵소서’ 하다가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자기의 뜻이 있지만 자기의 뜻보다는 아버지의 뜻을 우선하고, 또 성령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그 뜻을 행하시고, 전부 이렇게 각각 독립적입니다.
성령도 사랑이 있으십니다. 성령의 열매에 사랑이 있잖아요? 그러한 감정이 있고 사랑도 있고 노함도 있습니다. 또 예수께서도 사랑이 있으시지만, 성전에서 잘못한 사람들을 채찍으로 내쫓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울분도 있으시고 감정도 있습니다. 하나님도 아버지가 사랑도 있으시지만, 엄하게 다루시는 두려움도 있으십니다. 이렇게 인격이 각각 독립적이고 그러나 일체이시라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 삼위가 일체이시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그것이 참 이상하죠. 어떻게 삼위가 일체라고 하느냐?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세상 사람은 세상 상식으로 믿거나 세상 방법으로 믿으려면 믿어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셋이 하나가 될 수 있는가? 안 믿어집니다. 그런 수학이 어디 있어요?
옛날에 우리가 중학교에 들어가니까, 선생이 처음에 √3를 일러줍니다. 이것은 푸는 방법이 없거든요. 이것은 풀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용되고 있거든요? 풀지 말라는 것입니다. 풀 수 없다는 것입니다. √3란 절대로 풀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봉투에다가도 이렇게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도 뜯지 말라, 본인 아니면 뜯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삼위일체는 산술적으로는 맞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삼위일체를 어떻게 억지로 무슨 예를 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예를 들 수 있어야 되거든요? 상식이라는 것은 예를 들 수 있어야 하는데, 예가 안됩니다. 그러니까 예가 안되는 것은 오직 믿는 것입니다.
옛날에 어린아이들이 ‘아버지, 저 기차는 누가 만들었대요?’ ‘링컨이 만들었어.’ 그래서 링컨이 만든 줄 알고 우겨대고 싸우는 아이들도 봤습니다. 저의 아버지가 일러줬다고 저의 아버지의 말을 믿고 얻어터지면서도 우리 아버지가 링컨이라고 했다고 막 싸웁니다. 그 양반이 뭐 서양 사람의 이름이 생각나는 것이 링컨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는, 참으로 이것은 초신자들은 어렵죠. 우리 교인들은 여러분들은 지도자들이니까 이 정도는 알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비유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비유는 이것을 대체할 어떤 방법이 있어야 되는데,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믿어야만 하나님이 믿어지지, 믿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왜? 삼위일체가 되시는 분이니까, 이것은 보아서도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해될 수가 없습니다. 어떤 그러한 것이 없어요.
그전에 어떤 신학교 교수가 그럽디다. ‘태양, 열, 빛 이렇게 셋이다.’ 그렇게 설명하는 수가 있어요. 그것도 잘못하면 양태론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성부 성자 성신 삼위가 인격이 각각 독립적이시다. 아버지의 인격, 아들의 인격, 성령의 인격이 각각 독립적이어서 그래서 아들이 아버지께 기도하시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아버지의 뜻, 아들의 뜻, 성령의 뜻이 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아버지의 뜻을 아들이 거역하지 아니하고 또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거역하지 않은 것도 있으시고,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는 죄인을 ‘죽여라.’ ‘지옥 보내라.’ 했는데, 그런데 아들은 ‘아버지가 다 내게 주셨으니 내게 주신 자는 하나도 안 잃어버리겠습니다. 안돼요. 이것은 내 것입니다.’ 이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가 네게 주었으니 네 맘대로 하라’ 이것은 아버지의 뜻을 거역한 것이 아니라, 아들의 뜻이 있는데 아버지가 동의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병 낫는 것도, 이번에 신유집회를 통해서 정말 깊이 알아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능력이 있어야 하는 줄을 알면서도 능력이 없는 이유가 뭐냐?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열쇠 구멍을 찾지 못하면 문을 열 수 없는 것과 똑같습니다.
예수께서, 예수를 아는 자 베드로에게 ‘네가 복이 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준다. 땅에서 무엇이든지 열면 하늘에서도 열리고, 땅에서 닫으면 하늘에서도 닫힌다.’ 바로 열쇠 구멍을 찾지 못하니까 아무것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습니다 믿습니다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방식이 있다는 말입니다. 무엇이 먼저고 무엇이 뒤인가, 무엇을 하나님이 원하시는가?
그래서 이 신유집회라는 것은 보통사람들이 하기에는 참 어렵습니다만,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번에 우리 교인들 정말 그것만 안다면요, 여러분이 병도 이기고 다 이길 수 있어요.
인격이라는 말을 이해했죠? (나를)양태론이라고 하는 그 사람들이 이단이라고 하면서 김기동은 양태론이라고 하는데, 나는 이야기하지 않아요. 이야기해봐야 계속 거짓말을 하는데 뭐라고 합니까?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권능은 물건 받듯이 받는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에게 돕는 천사 돕는 영을 내게 하나님이 파견하셔서 배치해서 우리가 그것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한 사람은 더 층만하면 충만할수록 더 많이 받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권능’이라는 말은 ‘성령’이라는 말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시면’ 존칭을 하듯이 ‘권능을 받고’ 물건을 받듯이 받는다는 말입니다.
우리 할머니가 시집오실 때는 ‘사월이’ ‘오월이’이라고 하는 두 어린 처녀들을 데리고 오셨습니다. 옛날 몸종이죠. 나는 사월이는 죽어서 못 봤는데, 오월이는 봤어요. 사월에 데리고 왔으면 사월이라고 하고, 오월에 데려왔으면 오월이라고 그렇게 이름을 부르더라고요. ‘아무개야’ 하지 않고 ‘사월아’ ‘오월아’ 이러는데, 그러니까 우리 할아버지는 결혼해서 할머니를 얻으니까, 몸종 둘이 따라 들어온다는 말입니다.
그와 똑같은 거예요.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종이 따라붙는다 이말입니다. 천사가 뭐냐? 천사는 구원받은 성도들을 도우라고 보내심을 받은 영들입니다. 도우려고 왔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천사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것은, 권능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권능이 없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없습니다. 예수 잘 믿어도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욕하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지가 성경을 잘 못 보고서 지가 믿지 않으면서 한다는 소리가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김기동은 성령을 허수아비라고 했다.’ ‘성령을 천사라고 했다.’ 합니다. 지가 한 소리지, 내가 언제 그랬어요? 제 입으로 허수아비라고 했다고 글까지 써놨습니다. 지가 말해놓고서는 그럽니다. 나는 그냥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나를 욕해서 복 받는다면 해야죠. 실컷 욕을 먹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알고 해야 됩니다. 우리는 굉장한 지도자들입니다. 저는 제가 이제 나이도 있고 정말 아쉬움이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정말 우리 교회가 힘이 있어서 살아나 가지고 정말 이 환언운동을 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지금 전부가 모든 교회들이 교리로, 왜냐하면 성령의 역사가 없으니까, 그들을 어떻게 강제성을 띄워서 묶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법을 만들어서 헌법으로, 교리라는 것은 일종의 헌법이거든요. ‘교리와 장정’이라고도 합니다. 교리라는 것은 일종의 헌법이에요. 헌법의 조항과 같은 거예요. 그래서 교리라는 것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딱 묶어놓고, 그러니까 목사는 권위가 없습니다. 없는 대신에 교리가 있는 것입니다. ‘너는 교리를 위반했다.’ 뭐했다고 해서 교리로 심판하거든요. 이것이 하나님의 법은 아닙니다. 그래서 교리 때문에 교리가 조금 틀리면 교단이 바뀌고, 우리나라에 교단이 약 이백여 개가 된다고 하는데, 그것이 왜 그런가 하면 조그만 글씨 한 자 때문에 교단이 생기고 교단이 바뀌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교리로 하지 말고,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침례교회 회중 교회의 가장 이상이 무엇인가 하면 [신약성경이 헌법이다] 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을 헌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침례교회를 독립교회라고 합니다. 독립교회의 이상과 주장이 무엇인가 하면 [신약성경이 헌법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 있는 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러분이 잘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율법에서 자유하라.’ 이런 소리를 들으니까 어떤 사람이 들을 때, 율법을 부정하는 것으로 알면 안됩니다. 율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에게 ‘너 칼 만지지 마’ 하는 것은 아이들이 만지면 다칠까 봐 위험하니까 만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른이나 장군은 칼을 다루어야 됩니다. 칼은 반드시 부엌에서 어머니가 다루어야 하고, 장군은 칼을 다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러한 예리한 칼을 가지고 놀 수 없어요. 그러니까 율법이라는 임무가 있어서 그런 것이지, 그것을 잘 못 다뤄서 그러는 것이지, 절대로 그것을(율법)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오직 믿음’ 이라고 하면 율법은 무시하는 줄 알고 ‘죄를 지어도 믿음만 있으면 돼’ 이런 식으로 착각합니다.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정말 잘 아셔야 합니다. 이제부터 앞으로 잘 아셔야 합니다. 죄는 죄대로 하나님이 다루십니다. 죄는 죄대로 다루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들보가 있고 어떤 사람은 티끌이 있습니다. 들보가 무엇입니까? 집을 지을 때 큰 대들보가 있어야 지붕이 올라가잖아요? 그러니까 기둥보다 오히려 대들보가 더 큰 데가 있습니다. 그 들보를 눈에 끼고서 남의 눈에 티끌을 본다고 예수께서 나무라셨잖아요? 이르지 말라! 자기 눈에 들보를 가지고 남의 티끌을 본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고의 말씀도 있는데요, 들보와 또는 티끌 같은 이런 크고 작은 것들이 있는데, 남을 욕하고 남을 비판하면 들보를 가진 자라는 것입니다.
마 7:1~5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남의 흠을 자꾸 이야기하는 것은 들보를 자기 눈에 끼고 있는 자들이라고 그러죠? 이렇게 큰 죄도(들보) 있고 작은 죄도(티끌) 있는데.
그러나 지난주에 이야기했죠? 하나님의 나라는 죄라는 것을 크고 작은 경중, 무겁고 안 무거운 것을 따지지 않는다는 것, 똑같다는 것, 죄는 그냥 죄입니다. 접싯물에 코 박고 죽으나 한강 물에 빠져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접싯물에 빠져 죽은 것은 경하게 죽은 것이고, 한강 물에 빠져 죽은 것은 쎄게 죽은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경중이 없다는 말입니다. 행위로 한 것은 더 크고, 마음으로 품은 것은 작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잖아요? 그것은 다 율법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잘 알아야 하는데, 잘 모르고서 하면 아까 말한 대로 ‘믿습니다!’ 하고 ‘믿으면 죄를 지어도 괜찮다.’ 합니다.
믿으면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하는 것이 어디서 나온 것인가 하면, 전에 세월호의 주인이었던 그 구원파가 주장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거든요. 전에 구원파의 권신찬이라는 사람이 극동방송에 근무할 때 국장으로 있었는데, 거기에 있을 때 우리를 그렇게 욕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때 방송에 6년 동안 설교가 방송으로 계속 나갔습니다. 그것을 계속 씹어대고 이단이라고 막 그래서 6년 만에 방송을 그만뒀는데, 그 사람이 진짜 이단이거든요. 그러나 사람들은 이단이라고 막 하는 그 사람 편에 서 있고, 나는 욕먹는 사람 편에 서서 같이 욕을 먹었습니다. 그랬는데, 그 사람 편에 서 있던 사람은 지금 어디에 가 계시는가 모르겠어요.
그들은 구원받았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거예요. 그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가 잘 배우겠지만,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말도 못 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 말씀을 읽었죠? 우리는 (죄와)계속 ‘싸우는’ 것이지, 죄를 지어도 괜찮은 것이 없어요. 싸우는 거예요.
우리는 지도자들이니까 특별히 좀 복음에 대해서는 잘 알아야 합니다. 바늘 가는 데 실 가듯이, 처음에 바늘을 잘못 끼우면 아주 안 됩니다.
잘 보세요. 들보, 티끌, 이런 것이 죄인데, 티끌보다 들보가 얼마나 크냐는 것입니다. 굉장히 크죠? 이 사람은 티끌이 눈에 들어가면 훅하고 불면 빠질는지 모르죠. 그러나 들보가 들었다면 수술해야 합니다. 병원에 가서 대수술을 해야 합니다. 누가 돈이 더 많이 들겠어요? 티끌이 들어서 훅하는 것과, 들보를 빼기 위해서 큰 대학병원에 가서 대수술하는 것과 어느 것이 돈이 더 많이 들겠어요? 들보. 여기서 돈이 적게 드는 것이 어느 것이겠습니까? 티끌.
옛날에 시골 아이들이 뛰어놀다가 자동차가 지나가니까 자동차를 뒤따라 가다가 눈에 뭐가 들어가니까, 엄마가 자기 젖을 짜서 아이의 눈에다 넣어줍니다. 그때는 젖으로도 나았는지 모르겠어요. 하여튼 옛날에는 아이들 눈에 티끌이 들어가도 젖을 짜서 넣어주고, 자고 나서 어디에 멍울이 생겨도 젖을 짜서 발라주십니다. 약이 없으니까 그렇게 하는 거죠. 그래도 또 나았다고 생각해요.
들보를 빼는데 수고가 더 들겠어요, 티끌을 빼는데 수고가 더 들겠어요? 들보! 그것뿐입니다. 그래서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했죠?
롬 5:20~21 “... 그러나 죄가 더 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
여기서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고 하니까, 은혜를 많이 받기 위해서 죄를 많이 지어야 한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사람은 이 들보를 빼기 위해서 그만큼 많은 은혜를 받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죄를 많이 깨달을수록 은혜를 많이 받은 것이고, 죄를 덜 깨달을수록 그만큼 은혜를 경하게 여긴다는 그 말입니다. 은혜를 아는 정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죠?
성경에 죄라는 문제가 아주 심각합니다. 우리가 예수 안 믿고도 다 죄인 줄 알았습니다. 지난 주간에도 말씀드렸듯이, 죄라는 것이 언제부터 생겼는가? 율법이 있기 전에는 죄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율법이 있음으로써 이때부터 죄냐, 의냐? 이렇게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죄가 없었다고 해서 죄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해서 죄가 없는 것이 아니거든요? 죄를 다른 방법으로 말하면 ‘사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이 있기 전에도 사망은 있었습니다. 사망은 무슨 값이라고 했어요? 죄의 값입니다. 죄라는 명명은 없지만, 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이 있기 전에도 사망이 있었습니다. 사망은 처음부터 인간에게 왕 노릇 했다 이말입니다. 아담부터 사망이 왕 노릇 했습니다.
율법이 있음으로 비로소 죄라고 하는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그전에 옛날에는 죄를 다루지 않았어도 이미 사망이 있었기 때문에 죄가 있었지만 죄로 인정하지 않은 것뿐이지 그러나 죄의 효력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율법이 옴으로서 죄를 다루게 되었습니다.
율법은 간단해요. 전부가 ‘하라’ ‘말라’ 이 두 가지뿐입니다. 소극적이죠. 뭘 하고 싶어도 ‘말라’ 하기 싫어도 ‘하라’ 이것이거든요? 계속. 한 가지가 끝나면 그것으로서 ‘너 잘했다.’ 가 아니라, ‘또 하라!’ 계속해서 또 하게 하고 또 하게 합니다.
갈 3:10 “...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이라는 것은 한 가지를 끝내면 그것으로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또 하게 하고 또 하게 하고 그침 없이 계속하게 합니다. 그러니까 이 율법은 항상 숙제가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하지 말라’고 해서 안 하고 있으면 ‘하라’ 하고, 하고 있으면 ‘말라’ 계속 그침 없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임무는 사람에게 은혜를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세우려 하는 것입니다.
아까 본문에도 읽었듯이 우리는 두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겉사람’ 과 ‘속사람’ 입니다. 겉사람은 우리 눈에 보이는 육체를 말합니다. 육체의 사람, 정욕의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속사람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영을 말합니다.
그런데 겉사람과 속사람이 두 가지가 있어서 서로가 다툽니다. 속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하는데, 여러분이 마음은 그렇죠? ‘내가 담배도 끊고 술도 안 마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교회도 잘 나가야겠다.’ 하지만 이 겉사람이 담배만 보면 피우고 싶고, 술도 마시고 싶고 이럽니다. 속사람은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이 겉사람은 이것을 어기고 자꾸 반대로 악을 행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선생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어찌할 바, 이는 뭐 인간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나는 아주 곤고한 자로다. 그러므로 주의 은혜가 감사하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영육이 함께 가기 때문에, 여러분 속에서 그 '정욕'이라는 것이 죽을 때까지 계속 따라갑니다. 정욕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무슨 음란한 마음인 줄 아는데, 정욕이란 육체의 생각 육체의 요구 육체의 속성을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계속 같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어야 이 속사람과 겉사람이 비로소 이혼을 합니다. 비로소 갈라지는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계속 같이 갑니다. 그래서 일생을 싸우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 잘 믿는다고 한 30년 50년 믿었다고 해서 아주 죄에 대한 생각이 요만큼도 없는 줄 아십니까? 아주 자기는 거룩한 것마냥 하지만, 물론 부처 가운데 토막이 들어 있으면 모르죠. 그런데 안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죽는 날까지 이 선악간에 계속 싸우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을 왜 받느냐? 왜 예수를 믿느냐? 예수께서 우리로 하여금 죄의 노예가 되지 아니하고 성령의 종이 되게 하려고 우리의 대속 제물로 오셔서 대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을 받아서 성령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4장 3절 이하에 보면 가인에게 이르시되 ‘죄의 소원은 네게 있는데 네가 죄를 다스려라.’ 합니다. 죄를 짓고 싶어하는 마음이 네 육체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네가 다스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스리지 못하고 제 아우를 죽였죠? 제 아우에 대해서 질투, 질투하니까 미움이 생기고, 나중에는 죽였잖아요? 그래서 미워하면 살인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아우를 죽였습니다. 다스리지 못해서. 왜? 성령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지금은 우리가 우리 육체에 오는 그것을, 내 영혼에 성령을 받아서 성령의 힘으로 내 영이 육체를 이기라는 겁니다. 뭐로 이겨요? 성령으로!
“내 영혼이 성령을 받아서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소욕을 이기리라!”
육체를 이기라고 하니까 육체를 마비시켜서 병원에 뉘라는 말이 아니라, 육체의 소욕을 극복하라, 이기라는 말입니다. 계속 이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일평생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선생이 ‘나는 날마다 싸우노라!’ 요즘은 이런 말 하기도 조심스럽습니다. 싸운다고 하면 뭐 이상한 사인을 주는 것마냥 생각을 해서. 그것이 아니라, 성경은 우리 신자들을 싸우라고 합니다. ‘싸워서 이겨라!’ ‘날마다 싸우노라!’ 자기와 자기가 싸운다는 말입니다. 날마다 싸우노라! 날마다 죽노라! 무엇이 죽는가? 자기 육체가 날마다 죽고, 날마다 이기노라! 무엇이? 영이 날마다 이긴다는 것입니다.
“나는 날마다 싸우노라!”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러면 날마다 장의사 찾아다니겠습니까? 내가 성령의 힘으로 내 육체의 소욕을 이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기가 타락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아주 깨끗한 줄 알죠? 그러나 남편이 저녁에 늦게 들어오든지 남편의 와이셔츠에 빨간 것을 묻혀서 들어왔든지 뭐하면 그냥 미워서 어찌할 줄을 모를 것입니다. 그러면 이미 살인입니다. 벌써.
어떤 사람이 ‘너는 살인하지 말라’ ‘나는 살인하지 않았습니다.’ ‘네가 네 아우를 미워하지 않느냐?’ ‘나는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인이 뭐라고 했습니까?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무관심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살인은 안 했어요. 그러나 미움, 미워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무관심, 미움도 살인이고, 무관심도 살인입니다. 네가 예수의 피를 마셨으면 빨리 전하라는 것입니다. 왜? 네가 예수의 피를 마셨으면 주님이 오실 때까지 그 보혈의 능력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이미 무관심입니다. 왜? 밉기 때문에. ‘나는 상관 안 해요. 나는 관심 없어.’ 그것이 살인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답하는 방법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라!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했습니다. 무관심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니까 관심을 가져야 되고 사랑하니까 전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해야 하거든요.
‘나는 살인 안 했다.’ 그러나 날마다 남편이 늦게 들어오면 뭐라고 짜증내지 않습니까? 아주 밉거든. 남자들 보고 물어보면 부인 무섭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 왜 이렇게 늦었어?’ 하면 벌써 아주 정신없죠.
무관심은 살인입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만이 살인하지 않고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아니면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성령의 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죄라는 문제가 누가 더 있고 누가 덜 있고가 없습니다. 모두가 이 육신 곧 겉사람으로는 죄를 섬기고 죄의 종이 되어서, 그다음에 속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의의 종, 선의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매일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생각이 자꾸 왔다 갔다 하니까 ‘주여, 주여’ 하고 막 괴로워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이 죄라는 문제를 놓고,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라’ ‘말라’ 율법은 계속하는데, 그러면 당신이 지금 율법 아래 있느냐? 아니면 은혜 아래 있느냐? 은혜 아래라는 것은 ‘예수 안에’ 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율법은, 율법을 폐했다고 하니까 율법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내 앞에 율법을 폐한 것이지, 내가 침례를 받음으로 내가 율법에서 자유하고 이제는 예수에게로 온 것, 그렇지 않으면 예수에게 갈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에게로 가는 방법은 내가 아무리 회개했어도, 구약 사람들은 회개 안 했나요? 회개했다고 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래서 침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 사람들은 전부가 죄를 어디다, 그들은 마음에 죄를 짓는 것은 취급하지 않았어요. 몰라요. 저 사람이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어떻게 압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저 사람이 나를 미워하는지 죽이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사람의 마음을 안다면 뭐 두려울 것이 있겠습니까? 마음을 몰라서 무서운 것입니다. 마음을 전혀 모르는데.
그러나 전부가 육체로 보응을 받고 또 보상도 육체로 받는 것입니다. 복도 육체로 받는 것이죠. 과일도 잘되고 키우던 닭도 잘되고 양도 잘 되고, 이렇게 모든 것이 우양이 복을 받고 채소가 복을 받고 그 육체로서 보상을 받습니다. 보이는 것으로서.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그것으로(육체) 저주를 받고. 이렇게 전부가 다 보이는 것으로만 했는데, 왜냐하면 율법은 육체의 예법이라고 했죠? 보이는 것으로 다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예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되 내 육체를 잘 되게 하고 내 육체가 편안하면 내가 죄가 없는 것이라고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비유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매우 오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영이시라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의 영이 하나님을 뵈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가 하나님을 뵈오려고 합니다.
그래서 침례 요한이 침례 줄 때 ‘회개하라’하는 말과, 예수께서 침례줄 때 ‘회개하라’하는 말은 뜻이 조금 다릅니다. 침례 요한이 침례를 줄 때 회개하라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고쳐라.’ 그래서 ‘메타노에이테(μετανοειτε)’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내 육체의 하나님도 되시지만 육체의 하나님이 아니고, 내 영의 하나님이거든요? 우리 신약 성도들은 하나님을 육체의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영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거듭난 영혼들이 ‘우리 아버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육체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하나님이시다!”
그렇다고 해서 육체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같이 포함되지만, 우리의 영! 그래서 육체는 죽어도 우리의 영은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있는 거예요.
여러분의 가정이 돈 좀 벌고 잘되고 하면 하나님이 나를 도우셨다고 하고, 가정이 돈을 좀 못 벌고 어려움을 당하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전부 이렇게 따지잖아요? 육체의 일로. 그것이 다 구약의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이 자기 가정이나 자기 형편이 ‘죄가 있구나, 벌이 있구나.’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왜? 육체로 모든 것을 기준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침례를 받아서 영적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침례를 받지 않으면 방법이 없어요.
유대인들이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았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나고 해결되는가요? 아니요! 하나님에 대한 오해만 고쳤을 뿐입니다.
사도행전 19장 1~6절까지 ‘너희가 무슨 침례를 받았느냐?’ 하니까 ‘요한의 침례를 받았도다.’ 그러나 예수에 대해서 말씀을 다시 전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다시 받게 하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요한의 침례를 가지고, 침례는 한 번이라고 하니까 그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왜?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 내 육신의 하나님인 줄 알았는데, 육신뿐 아니라 내 영혼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주일설교 때도 말씀드리지만, 여러분이 하나님에 대한 각오가 좀 있어야 합니다. 생각을 달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니까 신본주의 신앙생활을 못 하는 거예요. 하나님!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우리가 몇 번 들었죠? ‘너에게 하나님이 있느냐, 너에게 하나님이 계시냐?’ 이렇게 물을 때, 여러분이 당황할 수 있죠. 왜? 모르니까.
하나님이 누구시냐? 그는 전지전능하시고 창조자가 되시고 생명의 근원이 되시고 복의 근원이 되신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김기동 나의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 내 영혼을 살리시는 하나님! 내게 생명 주시는 하나님! 진리이신 하나님!
당신이 지금 어려운 일을 당합니다. 영혼과 육체가 어려움을 당합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당신을 살려줄 수 있는 분이 누구입니까? 청와대에 있는 분입니까? 누구입니까? 그러나 당신이 당황하고 어려움을 당하면 이러죠. ‘경찰이나 청와대에 누구 아는 사람 좀 없어?’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나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입니다! 누구예요? 하나님! 하나님만이 유일하십니다. 그러니까 내가 그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상상하는 추상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실존이십니다. 그가 육체로 오셔서, 시편에도 말했거니와 우리는 ‘벌레 같은 인생’이라고 했습니다. 아주 가장 작은 그런 벌레 같은 인생도 그가 오셔서 맛보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뱃속에서 자라는 것도 맛보시고, 해산의 수고하는 것도 맛보시고, 자라실 때 고통도 맛보시고, 억울함도 맛보시고, 친구들이 욕하는 것도 들어보시고, 그 모든 경험을 다 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하는 것까지 일생을 다 맛보셨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맛보시려고 육체를 입으셨다고 히브리서 2장 9절에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는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뱃속에서 아주 작게 잉태하여 그가 거기 들어와 계셨잖아요? 인간을 다 맛보신 것입니다. 모든 것 가장 작은 것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다 맛보신 분입니다.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정말 나를 구원하실 분은 하나님만이 유일하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이 일을 당해보세요. ‘아유 목사님, 어디 누구 좀 아는 사람 없어요?’ 그런 소리 많이 듣거든. 물론 급하니까 검부락지라도 잡으려니까 그렇게 되죠.
그런데 나를 구원할 수 있는 분이 누구예요? 하나님! 나를 살려주실 분은 누구예요? 하나님! 내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는 분이 누구예요? 하나님! 내 억울함을 알아줄 수 있는 분이 누구예요? 하나님! 나에게 영생을 주실 수 있는 분이 누구예요? 하나님! 그렇죠. 오직 하나님!
여러분이 ‘나에게는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구원이시다!’ 이것은 여러분이 그냥 꾸며낸 것이 아니라, 진리란 말입니다. 그분이 나를 도우신다면, 그분만이 나를 살릴 수 있다! 하는 이것은 변동시킬 수 있는 변경될 수 있는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할 때 그냥 하지 말고, 기도할 때 우표딱지 붙이듯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 하나님! 나를 살리신 하나님! 내 사정을 아시는 하나님! 나의 이 억울한 사정을 알아주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나도 요즘 그래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하시다! 나를 구원하실 이는 하나님만이 유일하시다! 나를 살펴주실 분은 하나님만이 유일하시다! 우리 가정을 지켜줄 분은 하나님만이 유일하시다!’ 문이 아무리 있어도 문을 때려 부수니까 아무 소용이 없더라고요. 하나님만이 유일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우리가 알고 해야 됩니다. 그냥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기도하실 때, 정말 그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세요.
그 하나님을 알고서 우리가 이제 침례를 받는 것입니다. 침례를 받아서 율법 아래 있던 나는 장사지내고 그다음에 예수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율법 아래 있느냐, 예수 곧 은혜 안에 있느냐? 이 차이가 엄청나거든요? 신앙생활 몇십 년 하면서도 여전히 은혜 안에 있지 못하고, 그저 목사가 설교할 때 재미있는 이야기나 하면 ‘오늘 은혜 많이 받았어요. 허허허’ 뭐가 은혜인지도 모르고, 개그 하면 좋아서 허허허 이럽니다. 답답합니다. 참 답답합니다.
그런 것이 아니고, 정말 내가 은혜 안에 있는가! 세상이 나를 죽일 놈이라고 해도 나는 은혜 안에 있기 때문에 평안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안에(율법) 있으면 두렵습니다. 모든 것이 두렵습니다. 은혜안에 있어야 합니다.
오늘 시간이 지났지만, 좌우간에 앞으로 이 문제를, 오늘 이것은 기초입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가갸거겨를 배우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정말 앞으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진정한 하나님의 의도를 전할 수 있는 종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그러니까 말로만 하죠. 정말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기왕이면 정말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일꾼 되기를 원하고 여러분의 가정이 하나님의 일꾼 되는 가정이 되기를 원하고 죽어도 하나님을 위해서 죽어야지, 요즘 여러 가지 애를 쓰는 분이 많은데, 저를 위해서 죽지 마세요. 저를 위해 죽는 것은 그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죽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그래서 교회 와서 기도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을 위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자, 우리 다 같이 기도 하십시다. 기도할 때, 내 육과 영이 있는데, 당신이 영적 사람이면 아멘 하시오! 아멘. 영에 속한 사람이면 아멘 하시오! 아멘.
롬 8:6~9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
육과 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사람들이 자기의 육신도 아주 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요. 내가 어디서 들었는데, 집에서는 그렇게 착한데 자동차 운전대만 잡으면 ‘썅, 저 새끼’ 이런다는 거예요. 왜 그렇게 운전대만 잡으면 사나워지느냐고 하는데, 여러분이 지금 육에 속했느냐? 영에 속했느냐? 육에 속한 자는 끝없이 율법 아래 머물게 되는 수밖에 없는 것이고, 영에 속한 사람만 은혜 안에 머무는 겁니다.
지금 다시 말씀드립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끝없이 율법 아래 종이 되는 것이고, 영에 속한 사람은 은혜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죠? 그러나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바로 은혜 안에 있어야 구원받고 영생 얻고 그런 것입니다. 율법 아래서는 전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당신이 율법 아래 있느냐, 은혜 안에 있느냐? 무엇에 속했는지는 자기가 알 수 있죠?
요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우리는 눈을 감으세요. 눈을 감고, 지금 당신은 무엇에 속해 있는가? 벌써 육에 속한 사람은 자기 눈에 들보를 가지고 있어서 남의 눈에 티를 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끝없이 정죄하는 것밖에 배운 것이 없어요. 아는 것이 그것밖에 없어요. 능력이 그것밖에 없어요. 끝없이 정죄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자기도 정죄하고 남을 정죄하고 한없이. 그래서 자기 육체가 저 사람보다 좀 깨끗한 것 같으면 아주 행복한 줄 알고 있고 많이 착각합니다.
그러니까 영에 속했느냐, 육에 속했느냐를 잘 아셔서, 정말 우리는 아까 말한 대로 육에 속한 자는 그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거니와 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성경에 다 말씀하고 있죠?
오늘 여기서는 내가 누구에게 속할 것이냐? 영에 속할 거냐, 육에 속할 거냐?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 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