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No28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구속(230709)

lks8284 2023. 7. 9. 19:57

230709주일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구속] 김성현감독(강석준집사님 정리)


에베소서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의 중심에는 구속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의 모든 부분을 사실상 결정짓는 가장 뿌리에는 구속이 있다.
소위 구원이라는 단어로 대신하는 그 개념이 있다.
구속이라는 단어는 그냥 구원이라는 말이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표시한다.
구원이라는 말은 그다지 많은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신앙의 기본을 알고 있는 전제 아래서는 구원이라고 말한다.
그럼으로 아무 의미 없이 구원이라는 단어를 외치면 안될 것이다.
구원이라는 단어 자체는 구출해 내는 것 정도 외의 개념외에는 그다지 많은 것을 갖고 있지 않다.

[받은 것에 대한 감동이 믿음을 만든다]

그래서, 구원이라는 단어로는 기독교 신앙의 뿌리가 되는 요소를 잘 설명할 수 없다.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은 부분이 있다.
진리는 감동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우리 믿음은 우리 마음에 굉장한 충격으로 와야 한다.
임팩트가 없는 것은 사실 믿음이라고 볼 수 없다.
그렇지 않은 것은 지적 사실에 대한 인식정도로밖에 볼 수 없다.
그러나, 구원은 그런 인식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한 사실에 대해, 나를 위해 죽으셨다, 나를 구원하셨다는 간단한 말로 설명해서는 믿음을 형성해주기는 어렵다.
단지 지식이 아니라, 굉장한 충격이 있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더우기 사람은 자꾸 잊어버린다.
고의로 잊기도 한다.
분명한 사실에 대해서도 부인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받은 은혜가 있는데도, 그것은 생각하지 않고, 못받은 것만 생각하면서, 이미 받은 것을 부인하는 능력이 있다.
그만큼 인간은 타락했다.
그런 인간에게 단지 지적인 진술로는 구원하기 어렵다.
은혜를 잊고, 쉽게 타락하는 인간의 성질을 극복하고, 이길 수 있는 굉장한 충격이 있어야 한다.
굉장한 충격과 감동으로 내 마음을 지배하고 있던 것을 이겨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하나님이 주시는 진리를 모실 수 있게 된다.

[구원이 간절한 충분한 이유 필요]

, 자기에게 구원이 필요해야 한다.
구원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구원을 거부하기도 한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구원을 필요하게 된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구원을 받기 좋은 옥토가 아니다.
이와 비슷하게 세상 삶에 대해서 무상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 비관적이지 않은 사람도 역시 구원에 대한 간절함이 없게 된다.
세상 삶이 덧없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현실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런 것 없이 세상에 잘 적응하는 사람은 세상에는 좋은지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좋지 않다.
세상삶에 잘 적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다.
예수님께 다가왔던 사람은 세상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과 관계가 잘되기 간절히 원하는 사모함이 없으면, 역시 복음을 받기 어렵다.
그냥 잘 되겠지 하는 사람은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구원에 대한 간절함이 없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큰 충격이 아니다.

구원이 간절하게 느낄 수 있는 조건들.
자신에 대한 직시, 세상이 덧없다는 깨달음, 하나님에 대한 사모함, 내세에 대한 두려움이 다 필요하다.
이런 것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좋은 준비가 된다.
그럴 때, 구원은 정말 실질적인 일로 다가온다.
그런데, 구원을 구출이라는 개념으로만 보면, 잘 알기 어렵다.

[구원에 대한 개념 정리]

성경은 여러가지 표현으로 구원을 말한다.
여러가지 표현으로 말하지만,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사실을 말한다.
사실은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구원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지만, 사실 구속이 더 좋은 단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죄사함이다.
그리스도를 겨우 만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죄사함이다.
죄사함은 죄를 제거해내는 것이다.
그리고, 단지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죄가 없어졌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로 인하여, 죄를 이길 힘이 생긴 것이다.
죄의 노예였던 자가 죄를 거절하고, 자유할 수 있는 것이 죄사함이 가져오는 결과다.

죄사함은 우리 이전의 죄도 제거하지만, 죄의 속박에서 구원받는 것이다.

그래서, 죄사해졌다는 수준이 아니라, 죄를 이기는 자,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이것을 더 잘 표현한 단어는 구속이다.
가만히 있다가 쓱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가치를 지불하고, 끄집어 낸 것을 말한다.

[구속이란 무슨 뜻일까?]

구속의 뜻에는 속량이라는 의미가 있다.
마땅한 값을 지불하고 사 온 것이다.
속량이 가능하게 된 것은 은혜다.
빵 한조각 주어도 은혜인데, 이것은 말로 할 수 없는 풍성한 은혜다.
죄사함은 죄를 이기는 것이지만, 동전의 반대편의 의미는 용서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죄사함을 받았으면, 용서받은 것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9: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죄사함이라는 단어가 히브리 문화에서 헬라 문화로 올 때, 굉장히 심각한 고민을 갖고 왔다.
그래서, 단지 한국어 번역으로만 보면, 오해할 수 있다.
구속은 두가지로 크게 설명할 수 있다.
사하심 받음.
단어로는 내어보내다는 의미를 바탕으로 두고 있다.
사실 우리에게는 용서받은 것으로 개념이 들어있다.
법적 용어로는 사함받은 것은 빚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네 죄사함받았다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네 죄를 내가 용서한다는 의미다.

로마서 4: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불의를 행했는데, 사함을 받는다. 용서받았다는 의미다.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성경에서 쓰는 말이 있다.
영어로는 redemption이다.
구속이라는 단어 자체가 MARKET에서 왔다.
사고, 파는 것을 말한다. 우리 말로는 속량이라는 단어가 있다.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속량, 값을 내고 사하신 것이다.

요한계시록 5:9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리스도가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린다.
값을 치르고 사셨다.

요한계시록 14:3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 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요한계시록 14: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리스도에게 팔려서, 그리스도만 따라 다닌다.
구속이라는 단어에는 그 값을 치른 자가 있다는 의미가 있다.
신약성경에서 그 개념을 명확히 하기 위해, 헬라 단어를 들여왔다.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풀어주기 위해 쓰는 개념이다.
초대교회 때는 로마제국이 노예를 많이 부리고 있었다.
당시 인구는 오늘에 비해서 상당히 적지만, 2천만명 이상이 노예로 있었다.
그래서, 노예를 사고 파는 일이 많았다.
자기 가족이 노예가 되었다면, 어떻하든지 사서 자유하게 하려고 할 것이다.
원칙적으로 노예를 값을 내고, 사서 자유인으로 만든다.
이것이 성경이 명확히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다.
우리를 속죄하기 위해 희생하신 모습이 바로 속량의 개념이다.

인간의 현실은 아담에게서 나온 모든 자가 다 타락했다.
날 때부터 노예로 태어난다.

[죄를 범함으로써 노예시장에 팔린 인류]

인간은 몹시 타락했고, 악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는데, 우리를 만드신 분의 성품과는 너무 다른 자로 변해있다.
그래서, 인간은 그냥 죄를 범한다.
죄에서 도무지 자유하지 않고, 죄의 형벌이 계속 따라 다닌다.

에스겔 18:4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범죄하면 그 영혼은 죽는다.

로마서 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죄인은 죄의 속박으로 팔린 자다.

요한복음 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다.
육체의 연약함으로 사람은 계속 죄를 범한다.
그래서, 죄가 죄의 노예가 된 인간의 주인이다.
여기서 인간이 풀려 나오려면, 값을 치러야 한다.
무엇을 내서 값을 치를까.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죄의 값은 사망이다. 죽음으로 값을 치른다.
너무 불행하다.
죽음은 사람을 계속 구속하는 정당한 값이다.
노예시장에서는 돈을 주고, 노예를 사오는데, 영적 죄인은 죽음으로 지불해야 한다.
정당한 결과다.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속량할 수 있다]

그래서, 본문의 말씀이 중요하다.

에베소서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았으니.
그 사람을 사와서, 살려내는데 필요한 값은 그리스도의 피다.
예수는 죄에 사로잡힌 노예시장에 가서, 그 사람을 사 오셨다.
피를 흘린다는 것은 죽음이라는 말을 달리 표현한 말이다.
, 피를 흘리는 것은 죄의 형벌이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
또는 죄값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레위기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피가 죄를 속한다. 값을 치르고, 없앨 수 있다.
피흘리지 않으면, 죄의 값을 치를 수 없다.
결국 죽어야 한다.
예수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
우리는 그것을 요구할 자격도 없고, 우리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도 없다.
그런 상황에서 구주 예수는 자기가 그것을 짊어질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떠맡으셨다.
그가 그렇게 하지 않으셨으면, 우리는 아무도 살 수 없었다.
우리는 곧 사망과 지옥으로 떨어질 자였다.
그러나, 주님이 값을 치르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것은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라, 구약시대부터 계속 암시되었고, 인식시켜온 결과다.
구약시대 때, 계속 짐승의 피로 제사지냈다.
그것으로 이스라엘의 죄가 100프로 사해졌다고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히브리서 10: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다만, 임시적으로 징검다리 삼아 계속 그렇게 해왔다.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다른 것은 안되고, 흠없는 것으로만 제사를 받으셨다.
그러다가 마침내 예수께서 오셔서, 자기를 희생하셔서, 자기 피로 제사를 드리셨다.

요한계시록 5:9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계시록에 보면, 24장로와 천사들이 영광을 돌리는 장면이 나온다.
각 족속을 피로 사셔서, 하나님께 드린다.

마태복음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약속하신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만 그렇게 할 수 있다.
너희가 조상 때부터 물려온 망령된 행실, 거짓이 가득하고, 배반이 가득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금이나 은으로 한 것이 아니라, 흠없고, 점없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다.

베드로전서 1: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베드로전서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죄의 노예가 된 자를 사셔서, 자유하게 하셨다.
하나님께 드려주셨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은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
먼저 죄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하게 하셨다.
, 정죄에서 자유하게 하셨다.
이제는 누구도 정죄할 수 없다.
, 속박에서 해방시키셨다.
죄를 안지으려고 해도, 피할 수 없던 것에서 해방시키셨다.
, 형벌에서 해방시키셨다.

원래 구약시대는 예수님이 오실 것을 명시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말하면서, 이상하게 구속이라는 표현을 썼다.

신명기 7: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심지어 속량이라는 단어도 썼다.

신명기 24:18 너는 애굽에서 종이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하노라

그 때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지만, 양을 잡아 죽여, 피를 문지방에 바르고, 양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그 의미는 나중에 예수님이 오실 때, 분명히 이유가 밝혀지게 되었다.
특별히 바울 사도에 의해서, 구약의 일이 명확하게 확인되었다.

그래서, 구속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구속이 항상 속량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종말에 이르기까지 무사히 하늘에 오르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누가복음 21:28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구속.
예수 피의 값은 비용이 아니라, 방법이다.
주님이 자신을 내어주어, 죽으신 것을 말한다.

[속량하신 결과인 죄사함(용서)]

구속한 결과가 죄사함이다.
용서를 가득 머금고 있는 단어가 죄사함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충격을 받고, 주님을 만나서, 영원한 변화를 갖고, 영원한 의의 종이 된다. 노예에서 해방된 자가 갖는 충격은 용서함에서 온 것이다.

마태복음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흘리는 내 피다.
이스라엘에게 가장 중요한 성일은 속죄일이다.
속죄일에는 흠없는 염소 한마리를 잡아, 피흘리고, 또 하나는 그 머리에 안수하여, 죄를 옮겨 놓는다. 그리고, 광야로 보낸다.
우리에게서 제거한 죄가 다시는 오지 않도록 버리시는 것이다.
내어 보낸다. 속죄다.
그 제물이 진짜 자기 죄를 멸하는 것이 아님을 알지만, 소망을 갖고 이스라엘은 계속 해왔다.
예수께서 피흘리심을 통해, 인류의 죄를 자기 머리위에 얹고 가셨다.
죄를 다시 돌아오지 않도록 멀리 보내는 속죄를 이루셨다.

[은혜를 결코 잊지 말자]

죄사함은 우리에게 자격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데, 신앙생활 하다보면, 마치 우리에게 자격이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주신 것이다.
우리 자신이 가진 것으로는 결코 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에게 우리 교회를 위해 헌금을 해달라고 하면, 오만원, 십만원 할 것이다.
이것은 풍성한 가운데 낸 것이다.
그런데, 풍성함을 따라 낸 것은 이억, 삼억을 내는 것이다.
그 사람이 풍성한 만큼 낸 것이다.
많으니까, 그냥 낸 것과 많은 만큼 낸 것은 다르다.
왜 풍성한 은혜라고 썼을까.

요한복음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은혜를 절대 잊지 말라는 것이다.
너희가 속량으로 구속받은 자임을 잊지 말라.

고린도전서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자유를 주셨는데, 다시는 죄의 멍에를 매지 말라.
성경에서 가장 큰 죄는 이것이다.

신명기 13:1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신명기 13:2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신명기 13:3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신명기 13:5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는 죽이라 이는 그가 너희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여 취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케 하려 하며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 내려고 말하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거짓 선지자가 나타나, 백성을 속여 멸망시킨다.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 값을 치르셔서,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었다.

로마서 6: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이제 우리는 의의 종이 되었다.
우리는 평생 주님께 속한 자로서, 주님께 기쁨이 되고, 영광돌리는 자가 되자.
주께서 당신을 희생하여, 피로 사신 은혜와 사랑을 잊지 않는 자가 되자.

 

설교요지

우리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과연 어떤 의미의 관계일까?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어떤 관계에 있는 분일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것은
단지 죄로 인한 심판의 위기에서
우리를 구출해 주셨다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이다.
그는 우리를 지옥 형벌의 운명에서 구하시기 위해
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사 주시고
이에 따라 자기의 소유로 삼아 주심으로써
우리를 완전한 법적 자유로 옮겨 주셨다.
그러므로 그가 손해를 감수한 사랑으로
우리를 구속해 주신 것이다.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우리를 구하기 위해 내신 값은
하나님 아들 자신의 목숨이었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 주님이시며,
우리는 하나님 아들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아들의 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