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32 교회의 표, 믿음과 사랑(230806)
230806주일 [교회의 표, 믿음과 사랑] 김성현감독(강석준집사님 정리)
에베소서 1:15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에베소서 1:16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 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에베소서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에베소서 1:18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옳은 모습이 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원형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잘 알고, 우리 신앙으로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의 신자들은 그렇지 않은 자도 있다.
[주권의 주님 안에 있는 자들]
많은 신자들에게 예수 믿는다는 것은 단지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수 있다.
물론 말은 그렇게 하지는 않겠지만, 예수 믿는 것을 통해, 자기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으려 하는 것이다.
특히 일단 구원은 이루고, 그 외의 것은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중요한 것, 예수 믿는 것이 왕(그리스도)에게 속한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
실상을 놓치고 지나가는 것이다.
왕, 그리스도의 주권을 말한다.
임금의 권리. 지배하는 권리다.
주님은 주권을 갖고 계시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예수를 볼 때, 아름다운 겉모양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을 봐야 한다.
예수님의 주권에 대해 바로 알지 않으면, 혹은 오직 구원자로만 생각한다면,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그렇게만 한정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유지하는 길이다.
우리 신앙은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 속에서 시작하고, 지속해 나가는 것이다.
예를들면, 우주에 나가기 위해, 우주복을 입고 있는 것과 같다.
언젠가 목적지로 가게 될 것이다.
우주복을 입으면, 이 땅에서는 참 거추장스럽다.
그러나, 이미 옷을 입었다.
불편하더라도, 가기 위해 입을 수 밖에 없다.
이와같이 우리 삶은 하나님의 생명을 이미 우리 생명으로 받았다.
그리고, 이 생명을 지탱해 나간다.
내가 받은 것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예수 믿는 것은 구원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날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구원은 하루에 속하는 날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진행되는 날이다.
필요한 것을 얻은 날이 아니라, 그 날부터 주님의 주권앞에 우리 모습을 드러내고, 사는 것이다.
주의 주권 앞에 나가는 것은 우리에게 강요된 것이 아니다.
싫으면 안해도 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에는 평생 주님의 주권적 영향 아래서, 참 신앙생활을 해 나간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단지 구원받는다는 간단한 성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구원을 유지하기 위해 주님께 나를 맡길 필요가 있다.
그래서, 그가 누구이신지 알아야 한다. 그가 나와 무슨 관계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잘못이해하면, 나의 영원한 운명도 망치게 된다.
그의 진정한 정체와 무관한 부분이 있다면 큰일이다.
우리가 예수 믿을 때,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알아야 하고, 그와 나의 관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
[성도 사랑은 자신의 정체에 대한 증거]
교회에서 우리는 성도를 서로 사랑한다.
이것은 자동적으로 교회사랑을 이루게 한다.
성도사랑은 우리가 구속받은 은혜에 대한 증거다.
이 증거는 증언이다. 내가 아는 대로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구속받은 바를 밝히는 것이다.
그분은 나에게 아무 빚진 것도 없고, 나로부터 받은 사랑도 없는 분이다.
내가 오히려 원수된 자인데, 자기를 포기하고, 죽어주시므로, 내게 영원한 행복을 주셨다.
이것에 대한 사실을 밝히는 것이 내 증언이다.
형제 사랑은 적극적인 면도 있고, 소극적인 면도 있다.
나는 은혜받은 자다. 이것은 내 속에서 무언가를 드러낸다.
증거물로서, 나의 모습이 소개된다.
이것은 내가 자진해서 해야 한다.
자진해서 하지 않으면, 이 증거는 나오지 않는다.
평소에 의식하고, 습관이 되어 하는 것이다.
이것은 강제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덕이다.
이것이 복음증거다.
복음증거는 내가 기뻐서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권유된 의무를 하는 것이다.
이 의무는 강제성이 없다. 안해도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전파해주겠니 하실 때, 네, 하겠습니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진리를 세상에 나타내는 일을 한다.
꼭 나가서 전도하지 않아도, 우리 자신이 평소에 전하는 자가 된다.
다른 각도로 보면, 우리가 다른 성도를 사랑하면, 우리는 우리를 구속하신 그 은혜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나를 구속하신 것에 대해서, 나는 두려울 것이 없다, 안심이다 기억해야 할 것이다.
나는 다른 성도를 사랑하면서, 기억한다.
닮은 꼴 모양을 베풀면서, 기억하는 것이다.
내가 사랑을 베풀 때, 내 자신의 신앙이 견고하게 된다.
내 믿음을 확신할 수 있고, 저쪽 성도는 사랑받는 모습에 대해서, 하나님 사랑받는 모습을 기억해낸다.
그래서, 그 마음속에 가득한 것이 무엇인지, 그 감동을 보고, 서로 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거기 있구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산 자.
이것은 우리 믿음을 강화시킨다.
성도를 사랑하면서, 증거도 하고, 자기가 증거물로서 자기 신앙을 지킨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자세는 받는 것은 좋아하지만, 베푸는 것은 싫어하는 인간의 심리다.
부덕하다, 배은망덕하다고 할 수 있다.
배은망덕에 대한 법적 구속은 없지만, 분명하게 성격은 규명된다.
한마디로 악한 마음이다.
사랑하지 않는 자세를 가진 자들은 나중에 보니, 은혜 받을 가치가 없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혹은 구속받은 사실을 믿고 있지 않거나, 배반하거나, 아예 구속의 의미를 이해조차 못하고 있는 것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주셔서 산 자들이다.
온전히 그의 목숨을 내어주시고, 베푸신 사랑으로 살아났다.
더불어 그가 가지신 기업까지 그와 함께 나눈다.
나는 내 자신을 구원하지도 못하고, 지옥에 갈 자였다.
예수 믿은 후에도 내 원래 형편을 잊지 말고, 내가 받은 은혜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 뒤에 그 배경이 있는 것이다.
사랑은 주님께 명령으로 내려왔지만, 강제성은 없다.
응하지 않으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무시하는 것이다.
당신이 주장하는 것은 모르겠고, 나는 내가 원하는 것만 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은 어떤 시스템이나 종교적 습관, 의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큰 마음의 감동이다.
견딜 수 없는 마음의 빚진 사랑과 은혜가 그리스도 신앙의 정체다.
진실로 고마워하는 것이다.
어떤 차가운 신학적 이론으로 지배되는 행동양식이 아니다.
지식적 탐구, 천국가는 요령, 복받는 요령, 그런 것과는 전혀 본질이 다르다.
우리가 그리스도라는 신분을 가진 분에게 무슨 관련이 있는지 잘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의 종이다. 그의 종이라서 너무 다행이다.
그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주시고, 사 주셨다.
놔두면 죽으니까, 자유케 하려고 하신 것이다.
그가 우리를 착취하려고 구원하신 것이 아니다.
자기 주권하에 두어서, 우리를 이용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려고, 사 주신 것이다.
그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자유를 주셨다. 그러나, 강제성이 없어도, 내 주인이 누군지 알아야 한다.
내 주인에게 자발적으로, 사랑으로 다가가서, 주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받아주소서, 해야 할 것이다.
우리 신앙생활은 중요한 몇가지 요소가 있지만, 주님과 나의 관계는 무엇인지, 주님의 주권에 대해서, 어떻게 단정을 내려야 하는지 확실해야 한다.
이것을 잘 성공시키면,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을 함께 받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이 마음에 두시는 길을 가게 된다.
사랑하지 않으면, 내 신앙을 지키기 어렵고, 복음의 증거를 하지 않게 되고, 하나님의 구속으로 인한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다.
예수님의 계명은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지만, 바로 거기에 우리가 주님을 구주로 섬기는 참 진실이 있는지 여부가 결정된다.
훌륭한 주 예수 믿는 믿음과 계명을 순종하는 자들 되자.
[신앙을 침해하는 거짓 가르침들]
본문은 굉장히 교과서적으로, 사전적으로 적은 단어로 구성한 그리스도 교회의 자원이다.
에베소 교회에 있는 거짓 이론과 가르침을 상대해야 하는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기독교의 진수를 바울은 고스란히 알려주어, 우리 신앙 전체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성부, 성자, 성신께서 하나가 되셔서, 신령한 복으로 복주고 계시다.
이렇게 엄청난 배경이 있으면, 너희가 잘해야 하지 않겠느냐.
너희 잘하고 있다. 믿음이 훌륭하다.
너희는 내가 가르치는 대로 잘 하고 있다.
너희 영적 상태는 좋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내가 안심한다.
바울 사도는 그들의 믿음과 사랑 때문에 안심하고 있다.
그래서, 영원전부터 이루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그리스도안에서 성령으로 지키시는 하나님의 뜻을 잘 맞추어 가고 있다.
순전한 믿음과 사랑으로 그렇게 하고 있다.
간단한 것 밖에 하지 않았는데, 훌륭하다고 하니,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에베소서 1:15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여기 중요한 것은 주 예수라고 붙이는 것이다.
당시에 유일신을 믿고 있는 유대인들이 주 예수라고 붙여서 말한다.
거기에 주를 붙인 것은 하나님과 동격으로 붙이는 것이다.
지금 바울은 감옥에 들어가 있고, 밖의 악한 세력들이 교회를 흔들고 있다.
바울은 거기서 4년정도 사역했다.
그동안 감옥에서 이 교회가 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주 예수를 향한 믿음과 성도를 향한 사랑이 있다.
그들은 구원자이신 예수를 주님으로 믿고 있다.
[구원자이신 것은 믿지만, 주님이신 것은 믿지 않는 경우]
예수께서 구원자가 되신 것은 주님이 되신 것과 동시적이다.
다른 것은 다 필요없고, 구원만 달라고 하는 믿음인가, 아니면, 주를 믿는 믿음인가.
내 신앙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주님의 주권을 그렇게 명확히 두려고 하지 않는다.
자기가 거절할 수 있도록 선을 두는 것이다.
주님이 다 가져가실까봐 무서워한다.
자기도 모르게 어느 정도 한계를 둔다.
그리고, 단지 구원받는데 필요한 것만 맞추어 신앙을 꾸려간다.
여기 나오는 주는 주권을 가르킨다.
어떤 사람을 높이기 위해, 의미 없이 부르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는 그 경우가 아니다.
그의 주권 아래 있는 자가 부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주권을 그냥 높여주는 것이 아니다.
주라고 부르는 자가 그 주권 아래 있는 자다.
그 자체가 신성을 암시하고 있다.
신약성경은 구원자 예수를 주이신 예수와 구별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앙을 가지려면, 예수님을 구원자로도 알고, 주님으로도 알아야 한다.
그중에 하나만 알면, 양쪽이 다 빠진다.
로마서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이것은 분리할 수 없다.
예수를 주로 시인해야 구원이 있다.
로마서 14: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성령은 예수의 주권을 갖고 임하심]
성령은 그리스도의 주권을 갖고 오신다.
성령을 모시는 자는 예수를 주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고린도전서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성령이 오시니까, 예수는 나의 주인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정상이다.
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누구든지 성령을 모신 자만 그리스도인이다.
성령은 하나님 아들의 주권을 가지고 오셨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고, 그는 예수의 주권으로 보전되고 있는 자다.
구원자로만 받아들이고, 주인으로 받지 않는 것은 본질을 잘라내는 것이다.
하나님 나는 당신을 온전히 받기 원합니다.
당신 그 자체를 환영하고 받습니다.
[예수의 주권에 대한 흔들리는 인식]
우리는 처음 예수 믿을 때, 예수의 주권을 다 알고 믿지 않는다.
처음에는 말은 주님이라고 하는데, 의미를 모르고 예수 믿는다.
그리고도 은혜를 받는다.
마태복음 8: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마태복음 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마태복음 8:21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마태복음 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그러나, 이제 이후에 내가 그에게 속한지 아닌지 빨리 확정해야 한다.
내가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면 안된다.
주님의 주권에 대한 개념이 서 있지 않은 자들은 예수 믿어도, 처음 가졌던 첫사랑을 쉽게 잃어버릴 수 있다.
주권이 없이는 가졌던 사랑이 자연히 스러질 수 있다.
배고플 때는 간절했는데, 이제는 배고프지 않으니까,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 사람은 주님을 순종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주인이신 예수님이다.
부분적으로 분리할 수 없다.
내게 맞는 부분만 달라고 할 수 없다.
주님 전체가 내 구주, 내 주님이시다.
우리는 의식이 변한다.
내 의식에 맞추어 주님을 계속 재조정해갈 수 없다.
주님이 주권 가지신 주가 되심은 바꿀 수 없다.
우리 생각은 계속 바뀐다.
좀 뜨겁고, 감동이 있으면, 커지고, 시들면, 예수님의 주권에 대해 경솔히 대한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주님 되심이 없어지지 않는다.
내가 소홀히 했다고 해서, 주님이 주님되심이 보류되지 않는다.
예수 믿는 순간부터 주님이셨다.
그는 나를 구원하실 뿐 아니라, 나의 주님이시고, 나를 영원히 이끄실 분이시다.
[믿음의 순종은 절대적 근본]
주님은 내게 명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내 복종을 받으실 분이시다.
그는 명령하시고, 이는 주권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우리 신앙은 한마디로 믿음의 순종으로 부르기도 했다.
로마서 1: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신앙은 복종하는 것이다.
진짜 신앙의 모습은 복종이다.
강제성은 전혀 없다. 싫으면 가면 된다.
여기서 바울 사도가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기뻐한다.
그들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무엇을 더해서 한 것이 아니라, 가장 기초가 구원자이신 주님을 자기 주로 모셨기 때문이다.
옳은 믿음이다.
그래서, 칭찬하고 있다.
주님, 간단하게 말하고 지나가는 것이 그들에게는 매우 중요했다.
주님이라고 할 때, 자기의 주님이시다.
믿음은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의 삶으로 처음 들어올 때, 갖기 시작하지만, 이 믿음은 주권자이신 주님을 믿는 것을 바탕으로 한다.
예수 믿을 때, 구원이나 주시는 분으로 한정짓는 생각을 하지 말기 바란다.
그는 예수 믿는 순간부터 내 주님이셨다.
강제하지 않으시지만, 내가 사랑으로 다가가야 할 분, 복종해야 할 분이다.
[차별이 없는 성도 사랑]
또, 에베소 교회에서는 성도 사랑을 잘하고 있었다.
누가 옷차림이 좋으면, 사랑하고, 초라하면, 싫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이길 수 없는 부분이다.
죄로 물든 모든 것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는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자기의 사랑을 다 주셨다.
그들이 우리가 사랑할 자들이다.
너희는 같은 사랑을 유지하라.
빌립보서 2:2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때로 어떤 이는 나는 주 안에서 사랑한다고 말한다.
무슨 뜻일까.
실제 전혀 사랑하지 않지만, 신앙적으로 사랑한다고 친다는 말이다.
사랑하기 싫어하는 것이다.
이것은 소위 영적화된 사랑이다.
이것은 주님 앞에 도저히 보여드릴 수 없는 자세다.
주님이 우리에게 하신 것은 그렇게 가식적으로 하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셔서, 자기 피를 내어주셨다.
실질이다.
속임없이, 진정한 참 모습으로 오셨던 것을 증명해 주셨다.
[사랑 의무 VS 이기심 : 끊임없는 갈등]
어떤 이는 하나님만 사랑한다고 한다.
그래서, 세상의 때묻은 사람과 연결되기 싫다고 하는 느낌도 있다.
하나님만 사랑한다는 말은 자기는 자기 욕심대로만 하겠다는 것이다.
성도 사랑 듣기 싫다, 하나님만 사랑한다.
하나님을 내세우고, 자기 욕심만 채운다.
요한1서 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요한1서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성경은 사랑하지 않으면, 구속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아직 불신자라는 것이다.
형제를 사랑해야 사망에서 벗어난 자다.
오히려 성경은 미워하는 자는 살인한 자라고 한다.
어떤 이는 나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유대식의 표현은 미워하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사랑하지 않는 자는 미워하는 것에 해당된다.
그래서, 살인하는 것과 다름없다.
살인하는 자니 그 속에 영생이 있을리가 없다.
고린도전서 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사랑이 없으면, 신앙적으로 나타내는 것도 진실이라고 볼 수 없다.
엄청난 신령한 것을 나타내고, 행실, 영적 지식을 나타내도, 사랑이 없으면 거짓이다.
울리는 꽹과리 소리와 같다.
그냥 시끄러울 뿐이다.
고린도전서 13: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우리는 사랑하라고 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니다.
요한1서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하나님의 아들을 만난 진실한 반응이 나와야 한다.
구원이 임했으면, 사랑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구원받지 못했으면, 사랑을 만들지 못한다.
나는 말로 사랑한다는 소리 많이 들었다.
이제는 사랑한다는 말이 거짓말 같다.
속이 이기심이 가득한데, 어떻게 사랑인가.
사. 친. 존. 배
사랑, 친절, 존중, 배려.
하늘가락 같지 않은가.
옛날 우리 몽산포 가서 체육하면, 반칙들을 많이 했다.
내가 지더라도, 정직하면 좋지 않은가.
이겨서 무엇하는가.
나는 무서워서, 운동회하자는 말을 못하겠다.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마음이 끌려서가 아니다.
그래서, 인간 본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겼다.
가장 천한 사람이 해야 할 일이다.
흙묻은 발을 씻기면서,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예를 보여주셨다.
요한복음 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예수께서 나는 너희의 주이지만, 너희 발을 닦았다.
내가 했으면, 너희는 더한 것도 하라.
행하라, 나는 거기 함께 있을 것이다.
보낸 자가 시키는 것을 행하면, 너희 안에 기쁨이 있을 것이다. 나는 거기에서 너를 만날 것이다.
너를 시키는 자가 행하도록 하셨으니, 네가 그 일을 할 때 영광스러운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목숨을 내어주어 사랑하셨다.
요한1서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주를 원하는 자라면, 누구도 다 사랑해야 한다.
살기 원하는 자는 누구도 다 사랑한다.
너희도 사랑하라.
그래서, 주님이 발 닦으신 정도가 아니라, 목숨도 버리셨으니, 우리도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
[사랑은 교회보전의 능력]
하지만, 에베소 교회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요한계시록 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요한계시록 2: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요한계시록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요한계시록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너희는 사랑을 잃어버렸다. 회복하지 않으면, 촛대가 옮겨갈 수 있다.
그 때, 칭찬받았는데, 이후 나쁜 영향력이 들어왔던 것 같다.
그들은 교회를 지키지 못했던 것 같다.
주님의 사랑이 있어야, 교회를 지킨다.
강제성이 없어도, 사랑의 결단을 하지 않으면, 교회는 지킬 수 없다.
전부 자기의 이기적인 생각에 맞추어 판단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구속에 관련된 것이고, 우리 사랑도, 그리스도의 사랑에 직결되는 문제다.
받은 사랑이 없어도 희생하신 분.
되갚음 받을 약속없이 사랑하신 분.
그래서, 믿음과 사랑을 분리할 수 없다.
요한1서 2:9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요한1서 2: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요한1서 2: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그래서, 믿음과 사랑 둘 다 있어야 한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홀로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할 때, 분열, 붕괴, 자멸이 있었다.
사랑이 없으면, 이단 잡아내고, 남을 잡아내고, 다툰다.
교회가 살아나지 못한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사랑한다.
내 인간은 사랑할 수 없어도, 내 삶은 구속의 증거다.
사랑이 따르지 않는 신앙은 위기를 맞을 때, 지켜낼 힘이 없다.
요한1서 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에베소서 1:16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 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우리는 주님의 주님되심과 성도에게 명하신 계명을 자진하여 실천하여, 주의 구원하신 구속을 증거하는 자로서 부족함이 없는 자가 되자.
그리스도로 가득 채워지는 교회 되자.
여러분이 사랑하는 곳에서 주님이 격려하시고, 많은 복을 내려주시기 바란다.
주님의 주님 되심에 감사합니다.
내가 주님을 구원자로서 만난 날 부터 나의 주님이셨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대로 사랑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나를 위해 하신 일을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를 받아주시고, 큰 영광으로 맞아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