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예배

기쁨과 찬양으로 영접할 우리의 왕(연합231224)

lks8284 2023. 12. 31. 07:40

231224 [기쁨과 찬양으로 영접할 우리의 왕] 김성현감독

 

(마가복음 2:1~12)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쌔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오늘은 우리 주님 나신 날, 2천년이 지난 오늘의 그날을 생생한 체험으로써 기억하면서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오신 사실을 기뻐하는 우리의 마음을 나누고 있습니다.

 

주께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오늘 여러분과 나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이렇게 주님을 만나고 또 주님께 받아들여져서 이제 주님과 깊은 영원한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상태는 이 땅에 오신 주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주인이 되신 사실은 그가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보다도 훨씬 중요하고 더 열광할 수밖에 없는 굉장한 소식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을 의지하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 아래서 많은 사람을 구원하셨습니다. 그가 우리 인간을 버리지 않고 이렇게 구원하신다는 사실은 인간도 그렇게 불행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셔서 그로 하여금 십자가에 달려 인간의 죗값을 대신 치러 구원해주시지 않았다면 온 세상이 다 굉장히 흉측한 모습으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부도덕과 폭력이 난무하는, 타락의 극치가 매일의 새로운 뉴스로 경신해가는 그런 나날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은 달라졌고, 그는 우리의 주님이 되었습니다.

 

이 주님이 우리의 가 되셨다는 뜻은 그가 우리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상식에서 이 사실을 이해하려면 과거 옛날 사람들의 삶과 마음가짐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 당시에 지금과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되었다면, 엄청난 감동으로 휩싸여서 온통 기쁨에 넘치는 그야말로 잔칫날이 매일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주님을 받아들인 시대적인 배경이 옛날이기 때문에, 또 성경이 쓰여진 때가 옛날이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그 감정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한마디로 주님은 입니다. ‘는 누구를 소유한 자입니다. 이런 개념은 굉장히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지금도 노사 관계가 있지만, 사원이 주인이 싫으면 그만 두면 끝입니다. ‘회사 옮겨.’ 또 자기 사장이고, 자기 상사라도 멱살 잡고 싸울 수도 있고 고소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거 주인은 우리의 매일의 삶을 책임져야 하는 그런 상황입니다. 지금과는 엄청나게 다릅니다. 그야말로 삶이 하루 일하고, 하루 먹고 사는, 혹은 내가 일하지 않으면 가정이 당장에 굶기 시작해야 되는 그런 사회에서 주인이라는 그 존재의 높이라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도 여러 가지 주인이 있는데, 왕이 있습니다. 왕은 이 세상에서 인간이 꿈꿀 수 있는 가장 최고의 높이입니다. 인간이 헛되고 헛되지만, 달콤한 꿈을 계속 꾸고 있다면 제일 달콤한 꿈은 왕이 되는 꿈일 것입니다. 지금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지금은 ? 왕이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하고 왕이 되는 것에 대해 머리 속에 한참을 그려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순간에 왕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았습니다. 그것은 끝입니다. 가장 생각이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끝.

 

왕은 백성의 운명을 책임집니다. 물론 인류의 역사 속에는 악한 왕도 많이 있습니다. 백성을 돌보지 않고 또 타락한 왕들도 있곤 하지만, 우리가 하도 미디어에서 그런 모습을 자주 접하다 보니 그런 것에 익숙해져 있는 것이지, 본래 왕은 나라를, 백성을 책임집니다. 그들의 아비입니다. 백성의 운명은 왕에게 달려 있습니다. 백성을 보호하는 것은 왕이고, 백성을 먹이는 것은 왕이고, 백성의 미래는 왕에게 있습니다. 왕은 선하고, 왕은 그들에게 덕을 베풀고, 왕은 인내하고, 왕은 자비를 베풀어서 백성을 먹여 살립니다. 왕은 우리의 운명을 짊어진 자입니다. 오늘과 내일의 우리의 삶을 짊어진 자입니다.

 

왕이 없다면 그 나라의 주권도 없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꼭 다른 나라가 아니라도, 다른 부족들이 창 들고 와서 찌르고 하면 그냥 당하고 맙니다. 침략을 당해서 그대로 적에게 잡히면, 그들의 운명과 삶은 완전히 그야말로 다 파괴됩니다. 인권은 완전히 빼앗기고 정말로 끔찍한 삶입니다. 지금은 그런 것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지만, 과거에는 누군가 쳐 들어와서 자기들의 삶을 다 유린하는 것은 가장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왕이 백성들을 보호해줘야 됩니다. 왕은 절대적입니다. 왕은 우리를 보호해주는 전부입니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궁극적인 자입니다.

 

과거 이스라엘은 왕권이 로마에게 넘어갔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그저 이해하도록 힘쓰면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왕이 없는 시대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동화속에 있는 얘기를 읊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해를 잘 못하니까요. 이 시대는 그냥 시민들끼리 약속을 한 것입니다. 약속을 해서 굉장히 효율적으로 왕의 기능을 다른 민간의 어떤 손에 맡겨서 한 것이지, 왕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공화국적인 체제에서는 정당하게 누구를 돕고 공정하게 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끼리 모이면 공정함이 사라져버립니다. 진정한 왕이 자기를 희생해주고 사랑해 주고, 책임감을 주고, 보호를 해줘야 합니다. 결국 이 시대는 이렇게 수천년, 수 만년을, 혹은 역사적으로 더 오랜 기간을 왕이라는 존재가 인간들을 보호해주었습니다. 단지 지금 마지막 한 2백년 정도를 세상의 시민들이 서로 약속해서 대표를 뽑아서 지켜 가고 있는데, 이것은 긴 역사 속에 마지막 작은 한 부분입니다. 금방 끝납니다. 다시 왕의 시대로 돌아갈 것입니다. 우리를 보살펴주는 유일한 왕이 우리를 돕게 될 것입니다.

 

옛날에 이스라엘은 나라를 잃고 주권을 잃었습니다. 우리의 형편과 똑같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는 원수의 포악한 횡포 아래서, 이 세상을 다 망가트려 놓은 원수의 영향력 아래서 겨우 살아가야 했던 우리는 주권도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야말로 험한 세상으로 가고 있었는데,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삶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굉장히 어렵게 살았는데, 당시에 헤롯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앞잡이입니다. 로마에게 잘 보여서 로마는 그에게 팔레스타인 지경을 치리하도록 권위를 부여하였는데, 그가 바로 헤롯 대왕입니다. 헤롯 왕은 로마 초대 황제에 의해서 뽑힌 지방적인 행정관인데, 왕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있을 때에 저 동방에서 유대 땅으로 온 동방박사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저 동방에서 파르티야라고 지금의 팔레스타인과 인접한 나라, 시리아정도 될 것 같습니다. 그곳의 사람들인데, 거기에서 보니 이전에는 전혀 보지 못했던 천문학적 그런 모습을 보았습니다. 별의 이상한 모습을 본 것입니다. 평소에 볼 수 없는 굉장한 사인을 봤습니다.

그들은 천문학자인데다가 정치에도 관련하고 나라에서 엄청난 높은 관료로서 백성의 생사와 나라의 운명을 책임지는, 상당히 나라에서 수준 높은 사람이었는데, 세 사람이 유대 땅에 왔습니다. 그 별을 보고 엄청난 왕이 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비록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자들은 아니지만, 과거의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포로로 있을 때에 다니엘의 학자적인 가르침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해서 배운 자들입니다. 그들이 와서 그 진상을 알아보려고 왔습니다.

 

그때 헤롯은 박사들에 의해서 이 땅에 자기 경쟁자가 될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정보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교묘하게 동방박사들을 이용해서 그러면 아기를 먼저 찾으시오. 그리고 알려주시오.” 하고서는 그들이 찾아올 때에 아기를 죽이려고 계획을 했었습니다. 동방박사는 기어코 그분을 만났습니다. 아기이신 분을 만났습니다. 온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유대 중의 제일 큰 왕, 과거의 다윗왕을 이을 위대한 왕이라는 사실을 별들의 조짐 같은 것으로 발견했던 그들은 이 위대한 위인을 깊이 존중하고, 그로 인해 감동받고 그에게 선물을 주고 기쁨으로 본토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비록 자기들이 섬길 왕은 아니었지만, 역사상 이러한 것을 보지 못했으므로 먼 곳에서 찾아와 남의 나라의 왕이 될 자에 대해 크게 축하하고 기쁨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나라에서도 왕을 뽑는 자들입니다. 과거 어떤 왕이 먼 나라에서 솔로몬 왕의 그 지혜를 한번 보기 위해서 보물을 들고 왔다는 것처럼, 이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본 아기는 단지 아기에 불과했고, 또 이 아기는 빈들에 있는 목자들이 제일 먼저 천사들에게서 복음을 들었습니다. “어디에 가면 그 아이가 있을 것이다. 이제 기뻐할 일이 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누가복음 2:10)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누가복음 2:14)

 

하늘에서 가장 기쁜 소식을 전해줍니다. ‘너희는 모든 근심이, 모든 외로움이, 모든 불안함이, 인간 안에서 괴로웠던 모든 것들이, 슬픈 것들이 다 끝났다. 너희의 진짜 왕이 오셨다.’

 

이 왕은 영원히 사시는 왕입니다. 이 왕은 이 땅의 왕처럼 변하는 왕, 생명이 짧은 왕 또 자기를 생각하는 왕이 아니라 영원토록 사랑하는 왕, 자기의 목숨을 내어 놓는 왕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없지만 우리 오늘날 현대사회에서 꿈꾸지 못하는, 기대할 수 없는 진짜로 우리가 기댈만한 가장 궁극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종말론적인 우리가 우리를 맡길 우리의 위로자 또 우리의 부모와 같은 또 우리의 영원한 친구, 영원한 행복, 우리에게 있는 가장 기쁜 소식 그 자체입니다.

 

이렇게 본문의 말씀은 그냥 임의로 우리에게 그 당시에 있던 사실에 대해서 말한 것은 아니고, 이것은 오래 전부터, 예수 나시기 훨씬 전부터, 수백 년 전부터 이미 예고했던 것입니다.

 

이사야에서 보면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이사야 9:6)

 

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다니엘서도 그렇고, 여기에도 그렇고 과거의 많은 구약 신자들이 그날 오실 예수에 대해 미리 얘기했습니다.

 

우리에게 이분이 오신 것은 오늘 우리가 그분을 영접하고, 우리의 신으로 모시고, 우리의 하나님, 우리의 구주로 모시고 사는 것, 그런 것들을 놔두고도 그는 우리의 기쁨입니다. 그가 오신 것은 우리의 모든 슬프고 답답하고 어두웠던 시절이 다 끝났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2천년 동안 하는 일은 매일 삶에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주의 오심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구원하신 것뿐만 아니라, 그가 오셔서 우리의 주님 되시고, 왕이 되신, 그분이 우리에게 오신 자체가 너무나 기쁜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또 그리스도 교회에게 하나님께서 따로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얼마든지 자기를 내어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분입니다. 사랑이 많으신 분이고, 자기 목숨을 던져서 피를 다 흘려주어 우리를 살리실 분입니다.

 

그가 계신 것은 우리에게 기쁨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2천년 동안 그 기쁨에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난 후 애굽에서 자신들을 구출해주신 하나님께 수 백 년간 노래하고 춤추고 기뻐했던 사실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가 나타나셨으니 우리의 구원자, 원어로는 소테르(σωτήρ)’라고 합니다. 구주, 그리스도 또 주. 그리스도는 다니엘이 예언했던 왕, 하늘에서 오실 왕,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기름 부어서 우리에게 보내신 메시아 또 그는 구원자이십니다. 종말론적으로 우리에게 마지막 왕입니다. 더 이상 왕은 이제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꿈꾸고, 꿈 속에서도 또 꿈을 꾸었던 최고의 왕, 가장 우리가 의지할 분입니다.

 

주의 교회는 주님 오시는 날까지 계속 기뻐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기뻐하는 자들입니다. 교회에 와서 사실 심각하게 뭘 더 달라고 고민하는 것은 사실 저에게는 가장 우선되는 일이 아닙니다. 나는 평생 하나님께 찬양드리고 감사하고 기쁘고 영광 돌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춤추고 노래하는 문화에 다소 어울리지 않는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교적으로 오다 보니, 조금 과장해서 심장마비가 왔는데도 어험아이고나 이제 심장마비가 온 것 같네. 잠깐 기다리시게나.” 할 정도입니다. “!” 하고 쓰러지지 않습니다. 우리 문화가 좀 그렇습니다. 예배 시간에 찬양을 하면 다들 뻣뻣하게 서 있습니다. 너무 경직 돼 있어서 쥐가 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기 다른 나라에서는 예배 시간에 춤을 추고 노래합니다. 저는 인간의 삶에서 슬픈 것들, 불행한 것들,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들, 슬프게 하는 것들, 인생의 어려운 짐을 지우는 것들을 잊으려면 주님 앞에서 그냥 주님의 큰 영광에 황홀하게 춤추고 싶고, 또 미치도록 노래하고 싶고, 영광 돌리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건 그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인하여 기뻐하고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행복을 주었느냐? 너희가 나로 인하여 멈출 수 없는 찬양과 기쁨에 충만하겠느냐?’

 

우리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에 쉼 없는 여러분 되시길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광 돌려라. 하나님께 감사드려라. 영광 돌려라.’ 하나님은 여기서 우리가 잘 하는 가 안 하는가를 지켜보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감시하고 있다가 잘 지키네? ! 좋다!’ 하신다거나 , 기독교의 교리적 신조를 잘 따르냐? 말씀 잘 듣냐? 잘 들어? 우와, 내가 행복해.’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를 왜 드립니까? 우리 예배는 옛날 유대식으로 하자면 그냥 하나님, 우리가 얼마나 기뻐하는 걸 보십시오!’ 하는 것이 주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배는 우리 마음입니다. ‘우리, 형식을 잘 갖춰서 예배를 잘 드립시다.’ 해서 우리가 어떤 신학적 이치에 맞게 , 하나님~ 이제 찬양시간입니다. 찬양을 하나님께 바쳐 올리겠습니다!” 학예회 하듯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뻐하는 것이 우리 예배입니다. 우리의 어떤 형식이 아니라, 마음이 예배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내가 드리는 예배입니다. ‘나 하나님 기뻐합니다! 나 하나님 좋아합니다! 나 하나님 사랑합니다! 나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내 삶에 오셔서 감사합니다! 내 주인이 되셔서 감사합니다! 내 왕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를 영원한 나라로 이끌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게 우리 예배입니다. ‘예배합시다.’ 하고서 하루 종일 노래해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쁜데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기뻐하는 것을,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모시기에 너무 황송하지만 그를 모시기를 사모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에서 어떤 의식적 요소로 자기를 꽉 붙들어 놓고, 이유 없는 포박 속에 자기를 묶어 놓는 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예배할 때 유럽쪽은 굉장히 정중하게 합니다. 찬양할 때는 항상 일어섭니다. 앉아서 찬양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배 시간에는 계속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해야 합니다. 나중에는 허리가 아플 정도입니다. 교회마다 신성도가 차이가 있습니다만, 전통적인 교회는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바닥에 방석이 있습니다. 무릎 꿇고 예배 드리고, 앉는 데에도 우리처럼 편안하게 뒤로 기울어져 있지 않습니다. 거의 앞으로 쏟아지려고 합니다. 혹시 졸면 그대로 땅에 받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너무 딱딱합니다. 그것은 너무 예식적으로 흘러간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 하나님을 기뻐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우리 여러분의 왕, 궁극적인 왕, the ultimate king! 진짜 마지막 왕! 종말론적인 왕! 우리를 책임지고 내 영혼을 책임지고 내 삶을 책임지고 내 가정의 영원한 미래를 책임질 자! 그분에게 여러분의 마음을 드리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여러분의 미래를 드리길 바라겠습니다! 여러분의 정말 사랑과 봉사를 드리길 바라겠습니다! 그로 인하여 여러분 마음에 멈추지 않는 기쁨이 가득하길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 교회 소개를 받고 오늘 처음 오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오셔서 편안한 마음으로 우리 교회를 보시고,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앞으로 가끔 성락교회 가도 좋겠다.’ 이렇게 하셔도 좋고, 여러분 마음 편하게 하시기 바라겠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주신 은혜로 우리는 대단히 기뻐하는 자들입니다, 소망이 가득한 자들입니다. 우리에게는 미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아무리 험악하고, 삶이 아무리 잔인해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절대 슬픔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행복합니다. 영원한 약속, 영원한 나라를 보증받았습니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 정말 확실히 갈 것을 알고 너무나 너무나 기뻐하고 있고요, 하늘나라 능히 가는 자로써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많은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눌 자신이 있습니다. 우리 여러분과도 나눌 자신이 있고요. 그런 우리 하나님을 여러분께 소개하고 있고, 우리의 궁극적인 임금, 여러분의 왕, 세상에서는 도무지 맛보지 못한, 상상해보지 못한 그렇게 정말 의지하기에 너무도 영광스러운 우리의 왕을 모시고 있음을 여러분께 또 알리고,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여러분도 언젠가는 우리와 같은 신앙인이 되기를, 성락교인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 열광적으로 기뻐하는 마음을 보시고 우리 교회에 처음 오신 분들도 박수를 쳐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여러분도 그런 많은 기쁨을 함께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경에 중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복의 창구입니다. 신앙인들은 개인적으로 살다 개인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복이 나뉘어지는 그러한 기점입니다. 복을 주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복주시기로 한 자를 사랑하면 자신도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를 미워하면 그 사람도 미움을 받을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단지 개인이 믿으러 온 자들이 아니라, 여러분을 복 주고, 처음 오신 분들에게도 복 주길 원합니다. 우리로 인하여 여러분의 인생이 정말로 영원토록 너무 너무나 훌륭하고 아름답게 변화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오늘 크리스천들과 있는 함께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복이 여러분을 북돋아 주시고, 온기로 감싸 주시고, 여러분에게 좋은 희망의 느낌을 부어주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할 때에 우리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우리의 심령, 신앙의 가장 우선적이고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본질적인 것이 우리 마음에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위로자, 우리의 영원한 인도자, 우리가 영원히 의지할, 우리를 책임질 우리의 영원한 왕, 우리 하나님이 우리 마음 속에 있어서 너무 기쁩니다. 이 땅에 오셔서 너무 기쁩니다! 우리 하나님이 되어 주셔서 너무 기쁩니다! 우리를 받아 주시옵소서! 다같이 합심하여 기도하겠습니다.

 

녹취 : 성락교회 성락선교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