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15 믿는 자들이 하나가 되도록 설계된 그리스도교 신앙(240407)
240407 [믿는 자들이 하나가 되도록 설계된 그리스도교 신앙] 김성현감독(강석준집사님 정리)
에베소서 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침례도 하나이요
하나님이 주신 우리 신앙의 삶을 통하여, 하나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삶을 이어나갈 새 삶을 주셨다.
하나님이 주신 새 삶은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에 중요한 목적이 있고, 또한 주의 뜻대로 하나가 되어 일하는 가운데,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이 다 실현된다.
모든 것의 첫단추로서 우리는 우리의 주를 알아야 한다.
[주님 되신 분의 정체를 명확하게 알아야]
모르면, 우리가 가진 신앙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닐 것이다.
유사한 신도 얼마든 묘사하여, 하나님과 나란히 둘 수 있기 때문이다.
명확하게 주님을 알아야 한다.
주님은 처음부터 계신 분이셨다.
주님은 우리를 우리가 나기 전에 이미 아셨다. 주님은 한번도 이 세상의 메인 스테이지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우리는 주님을 명확히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 주님을 알 때, 우리는 하나로 모아질 것이다.
[오직 한 가지 신앙만 있다]
주님은 여러가지로 믿으라 하지 않으시고, 한가지 신앙만 주셨다.
각 교회가 자기 스타일로 신학을 따로 세운다고 할 수 없다. 그 자체가 그리스도 교회가 추구하는 바를 처음부터 떠난 것이다.
그리스도 교회는 한분이신 하나님이 하나의 신앙을 주신 것이 근본이다.
하나의 신앙이 어떻게 주어졌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명을 좇아서, 사도들이 그 뜻을 받들어 세운 체계 위에 그 모습을 유지한 것이 우리 신앙이다.
이 신앙의 길은 우리 생각에 따라, 변화를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러는 취하고, 더러는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면, 치명적인 실수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영원히 주어진 딱 한번의 운명을 살고 있다. 그 운명은 하나님이 주신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에 있다.
주님이 주신 신앙의 방법은 딱 한가지다.
만약 하나의 교회가 분열이 있다면, 거기에 하나가 되게 하는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에 무언가 잘못이 있는 것이다.
아마도 성경을 신중하게 보지 않았을 떄, 그런 일이 있을 것이다.
주님이 사도들을 통해, 가르치라는 부분을 그냥 흘러버렸기 때문이고, 일부러 순종하지 않거나, 취사선택할 때, 분열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대단히 자유가 많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삶은 외로운 투쟁과 철저한 순종의 의미]
세상에서 말하는 방종과 전혀 반대에 있는 것이 기독교 삶이다.
기독교인의 삶은 이 세상에서는 전혀 즐겁지 않고, 외로운 삶이다. 성도들이 함께 힘을 합쳐야만 갈 수 있는 길이다.
역경이 많고, 험난한 길이다.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기독교 신앙이 마치 믿는 방식에 있어서,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신앙외적 요소다.
자유가 있다는 것은 죄에게 끌려다니지 않는다는 의미이지, 방종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신앙생활은 매우 타이트한 삶을 사는 것이다. 좁은 길로 가는 것이다.
많은 자들이 천국에 이르지 못하고, 넓은 길을 가기 때문에 실패하고 만다.
소수가 힘들지만 좁은 길로 가서, 최후의 구원을 이루게 된다.
천국에 이르기 위해 피나는 투쟁이 불가피하다.
또 교회는 누가 강제하지 않는다.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평생 누가 보든 말든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자발적 순종 정신이 가장 강한 곳이다.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삶을 용감하게 걸아간다. 자신이 원치 않는 많은 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본래 세상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삶과는 완전히 결이 다르다.
그리스도 교회의 삶은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향하는 것이다.
이 땅의 삶은 단지 인생의 몇년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주님이 이제 고난받으시고, 떠나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세상은 너희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나를 미워했다.
미리 경고하셨다.
앞으로 있을 많은 신앙인들에게 미리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불편하다고 해서, 불행한 길은 아니다.
너희는 내가 주는 평안으로 평안하고, 내가 주는 소망으로 기뻐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 그 사실을 잊지 말고, 용기를 내어 걸어가라.
이렇게 주님이 주신 신앙의 길을 따라, 우리는 걸어간다.
[사랑과 희생으로 하나가 되어 함꼐 가는 길]
이것은 굉장한 결단으로 가야 하는 길이다.
그냥 한 번 가볼까, 인정한다 수준으로 되지 않는다.
인생 최대의 결단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나를 위해 살던 것을 이제 멈추는 것이다.
이제는 주를 위해 사는 것이다.
처음에는 잘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세상에 살던 습관이 있으니까, 쉽게 자기를 변화시키고, 방향을 돌릴 수 없다.
그러나, 꾸준히 훈련하여, 점차 주를 믿는 삶이 익숙해지고, 재밌어져야 한다.
일단 들어오면, 그동안 나를 위해 살던 삶은 끝나고, 이제는 자기를 내어주는 삶을 산다.
희생과 사랑의 삶.
이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느슨하면, 손해를 보기 일쑤인데, 어떻게 남을 위해 사는가.
신앙생활 하다가 다 빼앗기는 것 아닌가.
맞다.
세상적으로 보면, 그렇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의 삶의 길이었다.
그는 이 땅에 오셔서, 자기 것을 모두 내어주셨다.
남을 위해 소망을 주고, 영원한 삶을 주고, 더 지속되는 기쁨을 주고, 자기 마지막 목숨까지 내어주셨다.
그는 그렇게 하여, 더 올리심을 받았고, 더 영광받았고, 그가 계획하신 모든 것을 다 얻으셨다.
가장 높은 곳에 이미 오르셨다.
그는 모든 이들의 주가 되셨다.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의 주가 되셨다.
그가 이 땅에 오셔서, 자기를 아끼셨거나, 손해보기를 싫어하셨다면, 그런 일을 이루실 수 없다.
이것이 기독교의 삶이다.
너희도 나를 따르라.
누가 보면, 아내나 남편이 교회에 가서 시간을 버리고, 돈을 버리는 것 같다.
초대 교회인들은 세상식으로 보면, 자기 삶을 다 망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삶의 방법이다.
희생, 섬김이 새 삶의 형태다.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잃는 것이 얻는 것이다.
죽어야만 살리라.
이 세상에서 자유는 방종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성경은 해방을 말한다.
고린도후서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린도후서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고린도후서 5: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제부터는 세상의 관점으로 세상을 살지 않는다.
여기서는 잃는 것이 얻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4: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정욕대로 살면 죄에 빠지는 삶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영적인 성취를 이루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에게 주신 삶은 우리가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조금 열심히 해도 되고, 아니어도 되는 것이 아니다.
굉장히 구체적인 과제를 우리 앞에 두셨다.
하나님이 명시하신 신앙의 삶을 성공시키자.
3주전까지 나누었던 말씀을 오늘 다시 접하게 되었다.
교회가 하나가 되는데, 성령으로 하나가 된다. 성령침례를 염두에 둔 말씀이기도 하고, 교회는 하나님의 공적 삶으로 부르신 삶이어서, 교회에 들어오면 공인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이 그리시는 큰 꿈을 위해 일하는 자가 된다.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떻게 아는가. 소망이 있으니까 안다.
소망을 따라 일한다.
그 소망은 나 잘되게 하소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가 예수 그리스도로 통일되게 하소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큰 계획안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교회는 오직 한 몸이다.
우리 소원은 완전한 구원과 맥이 같다.
그러므로, 주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나의 궁극적인 영광의 결과를 함께 갖고 온다.
오늘 이어서, 하나됨에 대해서 말한다.
기독교의 삶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주도 하나이요]
에베소서 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침례도 하나이요
여기서 주님이 한분이라는 개념, 누구신지 알아야 한다.
오직 한분,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구원자.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불렀다.
두꺼운 구약성경의 많은 분량은 또한 많은 세월을 말해준다.
그동안 하나님은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는데, 한국성경이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영어권에는 여호와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번역할 때, 우리나라가 잘못 들여온 것이다.
한국성경의 여호와는 영어권성경에서는 '주'로 되어 있다.
구약성경 내내 '주'로 불렀는데, 사도들이 예수가 부활승천하시고 나서, 그 주가 그리스도라고 발견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어떤 기호로 썼다.
출애굽기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출애굽기 3: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나는 스스로 있는 자
이것은 하나의 묘사이지 이름이 아니다.
그것을 기호로 썼다.
그 기호를 오랜세월이 지나니까, 어떻게 부를지도 모르고, '주'로 병기했다.
한국성경에서 그것을 여호와라고 번역했다.
잘못 번역한 것이다.
신명기 32: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
스스로 있는 자.
내가 곧 그다.
이 자체가 유대인들에게는 놀라운 말씀이다. 하나님 자신을 지칭하는 말씀이다.
이사야 41:4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태초부터 만대를 명정하였느냐 나 여호와라 태초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
그래서, 여호와는 분명히 이름이 아닌 것이다.
출애굽기 6:2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출애굽기 6: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시편 68:4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 이름을 찬양하라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자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 이름은 여호와시니 그 앞에서 뛰놀지어다
요한복음 8: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예수께서 아브라함 이전부터 있었다고 하시니, 유대인들은 깜짝 놀라고, 신성모독으로 여겼다.
그전부터 내가 있다. 그 말투가 하나님 말투다.
나중에 제사장들이 예수를 체포해서, 심문할 때도, 내가 그다 하셨다.
예수는 옛부터 계셨다.
그외에도 나는 누구다, 하나님의 말투로 하셨다.
요한복음 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히브리서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그는 변함이 없으시다기보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는 뜻이다.
요한계시록 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요한계시록 4:8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구약의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시다.
이것이 신약교회가 깨닫고, 발견하고, 공감하고, 찬양하고, 영광돌리고, 함께 이어온 것이다.
주님이 누구신지 밝혀졌으니, 우리는 너무 감사할 뿐이다.
'주'는 특정적으로 예수를 지칭할 때, 사용한다.
어떤 성경은 하나님도 있고, 주도 있다.
고린도전서 8: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위의 구절에서는 예수도 창조주요, 하나님 아버지도 창조주라고 한다.
하나님도 있고, 주도 있다.
고린도전서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성령도 예수가 주이심을 증거한다.
로마서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다른 주가 없다. 예수 나의 주.
빌립보서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립보서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립보서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자에게 예수를 주로 시인하게 하셨다.
하나님도 예수를 주로 부르라고 온 천하에 명하신다.
물론 아버지도 주님이시고, 성령도 주님이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신약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특정하고 있다.
아버지도 성령도 주라 하지만, 온 우주의 머리되시고, 교회의 머리되신,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다.
에베소서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그는 땅에서 누리지 않으시고, 남을 위해 다 잃으셨다.
그러나, 그가 하늘에 오르신 후에는 만물을 자신으로 채우신다.
에베소서 4: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그는 온 우주의 머리시지만, 우리의 머리가 되기 원하시고, 교회의 머리가 되셨다.
한분의 주를 우리는 명확히 알아야 한다.
에베소서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는 이천년전에 갑자기 나타나셨기보다는 늘 계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나기 훨씬 전부터 우리를 예정하시고, 함께 달려오셨다.
한 하나님께 속한 모든 자는 하나다.
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했으니, 하나로 달려가자.
구원의 유일한 길, 그 좁은 길로 인도하시는 유일한 하나님을 명확히 아는 자들 되자.
[믿음도 하나이요]
여기서 믿음은 무엇일까.
믿는 습관, 믿음의 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믿는다는 행위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앙의 내용의 전체가 하나라는 것이다.
하나님에 관한 교리 체제 전체, 에수 그리스도 구원에 대한 지식 체계를 통틀어 믿음이라고 표현했다.
우리 신학적 입장이 하나라는 뜻이다.
[교리라는 말만 들어도 소름 끼친다. 저리 가라?]
우리는 교리라고 하면, 나쁘게 생각한다.
너무 그렇게 말하는 것도 옳지 않다.
너무 우리가 거기에 억압되면 안된다. 교리는 일반용어다.
기독교 신앙에 관한 신조, 원칙, 이치, 크고 작은 영적 지식을 교리라고 한다.
교회에서 배우는 신앙적인 내용을 말한다.
교리라는 말을 안쓰기 위해서, 진리라는 말을 쓰는데, 그것도 맞지 않는다.
죄다 진리라고 할 수도 없고, 죄다 말씀이라고 할 수도 없다.
교리라는 말씀을 피하기 위해, 더 혼란이 온다.
교리라는 단어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우리 교회도 교리 많다. 우리가 믿고 있는 것도 죄다 교리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이것도 교리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교리다.
모든 것을 진리라고 부르기도 어렵다.
성경에 로고스라고 나오는 부분을 다 진리라고 하는데, 로고스는 로고스고 진리는 진리다.
구분해서 써야 한다.
성찬은 진실함으로 해야 한다. 진리라고 하기 어렵다.
주님은 우리 마음속에 계신다. 이것도 진리라고 하기 어렵다.
진리는 변함없는 굵직한 것, 주로 주님이 선포하신 말씀을 중심으로만 진리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교리가 나쁜 단어가 아니라, 중립적인 단어라는 것이다.
[성경은 오직 한 가지 말씀만 담고 있다]
유다서 1:3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 - 구원이 하나 밖에 없다는 표현이다.
믿음의 도 - 믿어야 할 말씀의 내용이다.
한가지 신학체제다.
본문이 말한 우리 믿음과 같은 것이다.
예수께서 주셨거나, 과거부터 있던 말씀이지만, 주께서 승인하신 말씀을 사도들이 기록하고 정리한 것이 우리 믿음의 내용이다.
한 믿음은 모든 신자가 하나가 되게 하는 자체적인 목적이 있다.
이것이 본문의 요점이다.
믿음이 하나라면, 모두 하나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 하나가 되지 않으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골로새서 1: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믿음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리 체계
골로새서 2: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의 내용이 믿음이다.
그래서, 사도들이 전한 복음과 유사하거나, 다르면 절대 받으면 안된다.
갈라디아서 1: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오직 사도들이 전한 것만 받아야 한다.
성경에 편입되지 못한 외경들도 다 제거되었다.
유사하게 만들어도 안된다.
절대로 하늘의 천사가 와서, 왜곡해도 믿으면 안된다.
다른 복음을 받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
교회가 하나가 되지 않는 것은 교리적 체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성경 해석을 사도들이 보는 시각으로 하지 않고, 개인이 자기가 원래 갖고 있던 것을 도구로 삼아 해석하면 잘못될 것이다.
성경 전체의 기조와 딱 맞아야 한다.
자율적인 해석은 안된다.
성경의 기조가 있는데, 자기가 임의로 분해해서, 뽑아내면 안된다.
성경에 많은 내용들이 있는데, 중구난방처럼 보이지만, 빛을 다양하게 반사하는 보석과 같다. 하나의 결정체다.
성경을 조심스럽게 봐야 하는데, 기존 사고관념으로 보면, 안된다.
모순되거나, 변형되거나 하면 안된다. 그러면 복음과 싸우는 자가 된다.
주님이 주신 믿음 안에서 마땅히 하나가 되어야 하고, 당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 기대된다.
한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기 바란다.
[침례도 하나이요]
여기서 침례는 물침례를 말한다.
물침례는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고,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의식이다.
물침례가 하나라는 것은 형태가 하나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주를 발견하고, 한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결단하는 것을 말한다.
침례 자체도 엄청 결단을 보여준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도무지 하나가 될 수 없다. 물과 불의 관계다.
그러나, 그들이 침례 받으므로, 하나가 된다. 이것은 모든 조건을 초월한다.
신학적으로 침례는 나는 주님의 죽음처럼 죽고, 주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다시 산다. 주님과 끝까지 같이 간다는 것이다.
영적인 의미다.
사회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침례 받을 때, 물에 들어가니까 몽롱해지면서 영적으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물에 들어가는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시인하는 것이다.
유일하신 주를 따르겠다 선언하는 것이다.
[하나가 되겠다는 맹세]
물침례는 초대교회에서 대단히 중요했다.
물침례는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축복받는 것도 아니다.
물침례를 통해, 주와 하나가 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사이에 누가 끼어들면 안되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것이다.
사람들앞에서 자기가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문제였다.
사회에서 침례 받았다고 하면, 일반 유대인들에게 핍박 대상이 되고, 죽는 날까지 삶이 평안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냥 오명을 뒤집어 쓰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침례 받을 때, 그래서, 누구도 다른 사람이 끼어들면 안된다.
고린도전서 1: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침례를 받았느뇨
고린도전서 1:14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침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고린도전서 1:15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함이라
침례에는 성도와 주님만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그리스도로 옷입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라디아서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우리가 이렇게 한 하나님을 발견하고, 누구신지 알고, 그 주께 우리가 속한다.
갑자기 나타난 주가 아니라, 영원전부터 나를 예비하시고, 구원하신 주.
세상에 의해 변형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주.
주님처럼 자기를 내어주고, 희생하고, 끝까지 사랑하는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음에서 할까, 말까 하는 것이 아니라, 침례라는 엄청난 결단으로 하는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행위로 나타낸다.
하나님이 보신다.
물속에 들어가는 사람의 심정이 하나님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거기에 중요성이 있다.
많은 침례 받은 자들이 침례 하는 자를 보았을 것이다.
그 사람은 사람들앞에서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나도 주님처럼 나를 희생하며 살 것이다. 주께서 내게 생명을 주셨으니, 나도 교회를 위해 생명을 쏟아놓겠다.
사회적으로 공개했다.
이것이 침례다.
침례 받을 때, 원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저 형제, 자매가 나를 위해 자기를 희생할 자라고 받아들였다.
한분이신 주님, 한 믿음, 한 침례
이렇게 오는 동안 우리는 분열될 수 없다.
하나가 되기 바란다.
영원한 주님을 따라, 그 믿음을 따라, 그 결단을 주가 인정하고, 주의 길로 인도하시기 바란다.
우리는 주를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
영원한 나의 하나님.
내게 믿음 주셨으니, 믿음으로 달려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