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저버리지 않는 성도들(연합241208)
은혜를 저버리지 않는 성도들(디모데전서 1:12~17)
2024년 12월 8일 성락교회 주일연합예배 설교: 김성현 감독
(디모데전서 1:12~17)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인의 가장 근본이 무엇일까요? 그 믿는 바의 바탕은 무엇일까? 동기를 묻는 것입니다. 왜 믿을까? 질문이 두터운 모양으로 나오면 대답도 여러 가지가 되겠는데, 제가 원하는 답은,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게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 은혜입니다. 신앙인들이 믿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 속에서 그때그때 우리를 이끌어주는 여러 가지 하나님의 다른 이끄심이 있고, 거기에 상응하는 우리의 반응이 있겠지만, 우리 모두는 주님의 은혜 때문에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임금이 있는 시대에 살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임금과 신하의 관계 보다도 훨씬 수준 높은 것입니다. 차원이 다릅니다. 절대적 유일한 최고의 신과 ‘나’라는 어떤 인식을 가진 내가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입니다.
우리 신앙은 은혜 때문에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어떻게 보면 정말 미물, 대단히 천한 이 인격체를 기억하시고 생각하시고 사랑을 온통 부어주셔서 살려 내시려는 것이 그분의 뜻인데, 그것도 큰 단체 가운데 임의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셔서 영원무궁하신 하나님 삶 속에서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광범위한 것까지 다 펼치려면 우리의 감각도 상당해야 되지만, 하나님은 나를, 또 여러분을 큰 사랑으로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 세상 사는 동안 고생을 지긋지긋하게 하고 난 뒤에는 영원한 형벌이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런 것을 다 말해줍니다. 그런 인간이 무슨 하늘의 궁전에 가겠습니까? 못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부족한 것을 다 커버해 주시고, 우리가 설령 죄를 범하는 일이 있어도 다시 회복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체에 어떤 생명력이 없지만, 그가 당신의 생명을 부어주셔서, 하나님의 아들의 모든 생명으로 생명을 보장받았습니다. 현실적으로는 그가 목숨을 내어주고 우리를 살려주신 것인데, 그의 목숨이 내 안에, 그의 생명이 내 안에 온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전에 우리가 함께 말씀을 배웠습니다마는 에베소서 2장 5절 이하에 보면, 우리가 정말 허무하게 죽고, 굉장한 고통 속에서 영원히 지낼 우리를 그가 은혜로 살리셨습니다. ‘값없이’란, 내가 값을 치르지 않았는데도 날 살려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혀 주셨습니다[1]. “감독님, 나 지금 여기 한국의 서울 신도림동에 있는데요?”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하늘에 있습니다. 물론 아직 하늘에 거처가 아직 있지 않은데도 ‘나도 하늘 가기로 정해 놨다~’ 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는데, 그런 자들도 다 하늘에 속한 자로 다 바뀌어서 모두가 하나같이 되길 원합니다. 우리는 하늘에 우리의 거처가 있습니다. 주님의 생애 속에 들어가서 주님처럼 우리도 그대로 올라간다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그가 살려주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에게는 거룩한 임무도 주셨다는데, 임무를 주신 것, 그것도 은혜입니다. ‘거룩한 임무’를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임무는 복음 전도하는 임무입니다. 우리가 받은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하라’고 하신 것은 무엇을 의미하냐? 바로 그가 내게 은혜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베풀지 않은 사람에게 “가서 전해, 가서 이 사랑을 전해라. 이 은혜를 전해.” 한다면 “예?! 나 은혜 받지도 않았는데요!?” 이렇게 됩니다. 이치상으로 은혜 받은 자에게 ‘가서 전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거짓말이 없으신 우리 하나님의 유연성은 이런 부분에서 정말로 명확합니다. “너 와라.” 주가 승천하기 전에 명하시다 금세 성령 오셨고, 금세 사람들 가운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늘에 다 그들의 소속이 주어지게 되고, 그들에게 나가서 ‘전파하라’ 하십니다. 엊그저께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멸하시고, 엊그저께 우릴 소유하시고는 오늘 “나가서 전하라.”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만민에게 말씀 전하라.” 하고 명령을 주신 주님입니다. 우리 주님은 명령하시는 주님입니다. 은혜 주신 주님입니다. 우리에게 사명을 주신 주님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다들 무언가 열심히 합니다. 얼마되지 않는 인생이지만 주께 영광 들려야 될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기회입니다. 정말 수많은 세월이 지나고 나면, 몇 백 년 정도가 아니라 수많은 세월이 지나간 다음에 ‘이거 정말 주님의 은혜 위에 또 은혜다.’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육신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은혜를 잘 잊습니다. 잊어버립니다. 은혜를 잘 잊어버리게 되는 이유는 교회에서도 은혜를 기억할 수 있도록 그 사실 깨워주는 일을 게을리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것을 해서 그리스도인의 가장 기본인 바, ‘너는 은혜 받은 자다.’ 이 사실에 대해서 경각심을 주지 않으면 자꾸 잊어버리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 일반 생활에서도 은혜를 줘도 잊어버립니다.
나는 내 평생에 인생에 대해서 가장 비관적으로 느끼는 것은 은혜를 베풀어도 나를 되려 공격하는 그런 점입니다. 내가 조금 손해보고 내가 굶주리고 내가 아파도, 은혜를 기억해 주면 감사할 것입니다. ‘그래도 살 만하다. 가치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서는 굉장히 인정받은 신앙인들, 베뢰아의 선두주자라고 한 자들이 은혜를 받고는 그 은혜를 악으로 갚았습니다. 한두 명 일어나서 그렇게 한 것을 가지고 ‘아이, 그 사람 때문에 나 속상하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거 전체적으로 큰일 났구나. 이거 구원 못 받았구나. 왜 이들은 은혜가 없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그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은혜를 베풀었는데 그 은혜에 금세 익숙해지고 ‘왜 더 안 해줘?’ 하는 식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속담대로 “아니, 구해주려면 내 가방도 꺼냈어야지!” 하는 식이나 식입니다.
내가 사랑을 베풀고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은 나도 아까운 것을 한 것입니다. 나도 힘든데, 나도 넉넉해서 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에 직분도 주었습니다. 그 직분을 서원하고 사모하는 영혼도 있는 가운데 그에게 주었을 때 나는 그 영혼이 잘 감당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나는 널 신뢰할게. 우리 교회를 빛내줘. 주께서 당신을 위해 피를 쏟아주었듯이 당신의 피를 쏟아줘.’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근데 교회를 갉아먹고 그것도 부족해서 교회를 자기가 떠나는 순간까지도 괴롭힙니다. 이런 경우가 너무 많다 보니 이것이 하나의 패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심각한 수준으로 보고 ‘우리 교회가 여기에 대처해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냥 한두 명이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다들 나가는 순간까지 기어코 ‘내놓아라. 아니면 고소한다.’ 합니다. 아주 전형적입니다.
그 이전에도 그런 것을 많이 봤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패턴이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잊습니다. 은혜를 받을 때는 아쉬운 것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받고 나서는 더 이상 자기에게 아쉬운 것이 없습니다.
교회에서는 신앙을 가르쳐 줘야 되거든요? 신앙에 있어서 사람의 양심을 무디게 하면 안 됩니다. 양심의 기능을 죽이면 안 됩니다. 로마서 1장에도 나왔듯이, 우리 양심은 율법이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유일한 추적 장치같은 것입니다. 그것으로 복음이라는 것에 대하여 알 수 없는 깊은 내 내면의 부르는 소리 같은, 복음을 쳐다볼 수 있게 하는 것인데, 그것을 살려줘야 합니다. 복음 운동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우리의 예배하는 것이나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은 은혜에서 시작해서 은혜로 끝납니다. “십자가에서 날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날 천국으로 이끄시는 하나님, 오늘도 무사히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감사하고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 하루 종일 십자가 은혜의 주님, 나를 보호해주십시오. 나와 내 가정을 보호해 주십시오. 주 안에서 믿고 있습니다. 아멘.” 이렇게 하루의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무엇입니까? ‘주님, 날 지켜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그 주님이 어떤 분이냐면, 나에게 은혜주셨던 주님입니다. 그분께 ‘나 오늘도 살려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 나를 살려주셨던 그분을 믿고, 그 소식을 믿고 또한 그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내 삶은 그분에게 의탁 돼 있다. 그분 안에 있다. 나를 구원해 준 내 주님, 오늘 나를 살려주십시오. 오늘 나를 지켜주십시오. 오늘 내 가정도 지켜주십시오.’ 이렇게 우리가 매일 소원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하루 주님 없이 자기가 알아서 ‘뭐 잘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매일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자기 삶에서 주님의 은혜라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삶을 살 때 이런 것이 익숙해졌던 것 같습니다. 누가 베풀어 줄 때는 마냥 좋습니다. 그런데 막상 받고 나면 마음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면, “일단 돈 좀 빌려줘.” “그래? 그럼 뭘 써야 되는데…” “어우, 왜 그러셔! 그냥 줘, 내가 다 알아서 할게!” 그래서 빌려주면, “니가 나한테 언제 돈을 빌려줬어? 니가 그냥 준 거잖아.” 이렇게 나옵니다. 다 그랬습니다. 우리는 선배들의 옳지 않은 그런 모습을 그대로 따라가지 말고, 바뀌어야 한다는 다짐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지금도 고통받고 있습니다. ‘왜 저 사람이 이렇게 괴롭힐까? 나는 많은 사람 중에도 저 사람에게는 더 기회를 줬는데 왜 괴롭힐까?’ 어떤 사람에게는 정말 위기 때 부탁을 했는데 오히려 탐욕으로 자기 일을 감행합니다. 누구누구는 내가 담임 목사로서 짐을 지면서 배려해 주고 돌보았는데, 아주 마지막까지도 그렇고 지금은 공개적으로 우리를 반대하는 자가 되어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은혜를 잊으면 신앙이 유지가 안 됩니다. 그러니까 저는 이제 의심스러운 것입니다. ‘저 사람들이 과연 주의 은혜는 알고 있는 것인가?’ 아주 제 마음에 진하게 남아있는 질문은 ‘저 사람들이 은혜를 저렇게 쉽게 버리는데, 과연 그리스도의 은혜를,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나도 그리스도의 은혜의 일부분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베푸는 은혜의 손입니다. 나는 이것을 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은혜받은 자에게 부어진, 내게 위임된 내 사명입니다. 나는 출신이 죄인 중에 괴수지만, 나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합니다. 어떤 권리로 그렇게 할까요? 난 은혜 받은 사람입니다. 나는 은혜받은 것밖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어쨌든 하나님과 나는 연결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날 버리지 않는다는 그와 영원한 관계가 내게는 계급장이고, 훈장입니다. 내게 이 임무를 주심, 이 크신 은혜를 주었다면 ‘하나님은 내게 다른 사람보다 더 큰 복을 주었나 보다.’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 이것이 그런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아닌 것입니다. 거짓된 것이라고 믿으면 거짓된 것입니다. 그렇게 끝나는 것이죠. 근데 내게는 실상입니다. 나는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으로, 누가 전해주고 믿는 자에게만 오로지 ‘ok!’ 하고 인정해 주시는 하나님의 그 시스템을 인정해 갈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거 아니다.’ 하고, 긴가민가하며 확신하지 못하지만, 나는 내가 믿는 하나님이 영원히 나를 살려주시고, 내게 은혜 주신 분인 것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소망이 없을 것입니다. 교회를 배반하고 나가서도 예배도 드리고, 인도도 하고 할 것입니다. 이 은혜를 저버리고, 마음을 상하게 하고, 교회를 파괴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교회를 상대로 세상제도로 교회를 소송하고 있는 사람이 예배도 드리고 하고 있겠죠.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너무 많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소망이 없습니다. 나는 소망이 있습니다. 내 소망이 무엇일 것 같습니까? 하나님께는 정말 드라마틱한 결과가 될 것입니다. 왜냐면, 나같은 자를 주었더니 그것을 기억하고, 지옥에 떨어질 자였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능력으로 부상하여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그의 발 밑에나마, 그의 식탁 밑에서 함께 상을 같이 하는 꿈이 있는 것입니다. 난 큰 영광, 필요 없습니다. 감히. 난 소망이 있습니다. 내 소망은 내 믿음입니다.
믿음은 소망입니다. “믿음 있어? 당신은 믿음이 없는 것 같애!” 하면서 마치 자기는 뭐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데, 소망 있는 자가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소망있는 사람, 천국의 소망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남을 속이지 않고, 남을 파괴하지 않습니다. 내 질문은 그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있는가? 당신 그리스도의 은혜 받고 있는가?’ 은혜 받은 속이고 교회를 파괴할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5절이 그 말씀인 것 같습니다[2].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 은혜 받았다고 회중에 껴 있지만 사실은 은혜받지 못한 자, 파괴하고 더러움을 퍼트릴 자라 했습니다.
에베소서 1장에 보면은, 사도가 하나님의 열어준 비전으로 과거는 봅니다[3]. 그가 뭐라고 하였냐면, ‘창세전에 이미 그렇게 우리를 구원하려고 그가 결정을 하셨더라.’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도 죄인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엄청나게 악한 죄인이었는데도 그가 창세전에 그렇게 예정하셨다는 것은 너무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하나님께 너무너무 고맙고.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그의 은혜는 내가 사도로서 내가 죽을 고생을 해도 괴롭지 않고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런 고생하고 저런 고생해도 난 다 견딘다. 왜냐면, 은혜가 너무나 많다.[4]’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에 보면 ‘지금은 은혜 받을 때다.[5]’라고 했습니다. 은혜의 수치가 100이 가득한 상태라고 한다면, 기독교인은 80프로, 90프로는 돼야 합니다. 은혜가 빠진 사람은 모든 면에서 동력이 안 생깁니다. 믿음이 없고 소망이 없고 짜증이 많이 나고 원수에게 잘 속고 세상에 눈이 돌아갑니다. 물론 우리가 육신이 있는 동안에는 세상과 연결돼 있어서 자꾸 세상의 욕심이 납니다. ‘아, 나도 저거 갖고 싶은데. 나도 저렇게 하고 싶은데.’ 그런데 그것 때문에 특별히 죄 짓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땅에서 온 자라서 그런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극복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 은혜 받은 자다. 나는 하나님 은혜 받은 자다.’ 하나님의 사랑받고 그의 생명을 받은 자로서 천국도 내게 주어진 것입니다.
정말 몹쓸 죄인으로 마땅히 여겨질 자가 오늘 여기 있다면 나는 여기서 소망을 키우고 갈 것입니다. ‘나를 이렇게 의롭게 옷을 입혀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본질은 내가 알지마는 나는 의로운 옷으로 입혀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나, 목사입니다, 성락교회 목사입니다.’ ‘나 성락교회 성도입니다. 은혜 주신 것 감사합니다.’ 기억하고. ‘엇? 이것 봐라!? 상황이 좀 바뀌었어? 에잇! 저걸 쓰러뜨려야 되겠다!’ 이렇게 하지 않고. 나는 소원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나의 모습을 다 보시는 주님이 내일은 ‘너는 의롭도다. 왜냐면, 내가 너에게 선한 일에 열심히 하는 백성 되게 하였음이라.’라고 했습니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양육하시고, 경건치 않은 일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게 하시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게 하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 크신 하나님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날 것을 기다리고 달려가는 자가 하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은 모든 율법에서 구속하시고 깨끗하게 해 주사 선한 일에 열심히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심이니라[6].’라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이 말씀 한 구절로 인하여 내 영혼의 근심을 씻어지고 소망이 더 올라갑니다. 현실은 더 어둡고 내 마음은 더 밝아집니다. 소망이 있는 자는 사람을 속이면 안 되고, 은혜를 배반하면 안 됩니다. 다만, 이건 별개 문제입니다. 그 사람자체가 대단히 악합니다, 악한 자의 소행입니다. 대단한 죄인데, 지금 제가 논하고 있는 이슈는 그런 자가 하나님을 알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신앙 체제가 있겠는가? 그럼 거짓으로 그리스도인 행세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폭력적으로 속이는 자가 무슨 하나님을 섬기고 있겠는가?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 무슨 은혜를 받겠는가? 자기가 은혜를 받았으면 남에게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알기 때문에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 마음에 가득하여서 세상이 괴로울수록 더욱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은혜를 내가 오히려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잘못 배운 것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예배의 첫 찬양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합니다. 그 다음에 대표기도하시는 성도들은 하나님 은혜에 대해서 기도합니다. 그 다음에 ‘주님을 의지합니다.’ 하고 찬양하고, 은혜가 꽉 차야 합니다. 그 다음에 말씀 가운데 하나님 은혜가 계속 밑에서 깔려 있어야 합니다, 그 바탕이.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찬송하면서, 박수 치면서 예배를 마치고, 은혜가 충만해서 가는 것입니다. 이 인간은 기억의 지속력이 약하기 때문에, 그리고 마음이 자꾸 출렁대고 움직이기 때문에 계속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매일 기억하는 거예요. ‘은혜 주셔서 감사합니다.’
식사 기도할 때 1.5초만에 끝내는 사람도 있는데, “하나님, 은혜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정도는 해야죠. “나를 저주에서 하나님의 행복으로 옮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오늘 내가 당신의 품 안에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생각해 보니 아직도 그에 대한 약속을 자기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가 마지막에 나를 위해서 하신 계획을 그가 갖고 계신 것입니다. 자기도 그 기억이 있습니다. “그 계획을 아직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베풀어 주신 거 보니 영원히 내게 베풀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믿고 기도합니다. 아멘.” 그 정도는 해야 할 것입니다. “영원히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원히 행복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베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를 잊지 않고 하나님 계획 속에 넣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정도는 해야겠습니다. 근데 식사 기도하는데 “하나의 아버지…뭘 도와주시고, 뭘 도와주시고, 돈 문제 그거 잘 해결하게 해 주시고, 우리 애들, 그거 잘 하게 해주시고, 이거 웬만하면 잘 됐으면 좋겠는데 도와주십시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면 하나님이 당황하실 것 같습니다. 달라고만 하고 고맙다는 소리는 하나도 없으니. 기도하기가 어려우면, 차라리 ‘영, 복, 감’을 기억해서 “영원한 행복을 감사드립니다.” 하고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견고하게 서 있는 우리 여러분 되시길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은혜 받을 만할 때 은혜를 충만히 받고 있는 사람 되시길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훌륭한 신자라도 약간 삐딱하게 해서 은혜를 잃어버리면, 밑빠진 항아리처럼 물을 아무리 부어도 다 쏟아져 버리는 것과 같게 됩니다. “엇? 물을 꽉 채웠는데 왜 없지?” 밑으로 빠지면 아무리 채워도 소용없습니다. 다 때워야 합니다. 복으로 가득 찬, 복이 충만히 넘치는 그리스인들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에서 임무를 줄 때 “오늘 보직 발표하겠습니다. 제가 발표하겠습니다.” 그러면 갑자기 ‘붕’ 하고 구름 위에 하얀 수염 난 하나님 비슷하신 분이 나타나서 위엄있는 목소리로 “들어라! 가서 전도해. 넌 어디 맡고…” 이렇게 되지 않습니다. 제가 말합니다. 위엄있게 근사한 목소리로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제가 “발표하겠습니다!” 합니다. 근사하지 않고 위엄 없지만, 나는 하나님 뜻을 고스란히 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역을 맡겨진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주님의 간접적인 말씀입니다. “나 널 사랑해. 나 너에게 은혜 베풀어서 널 기대해.” 이런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예수 믿기 시작했는데 “너 가서 전해. 세상에 나가서 이거 해.” 하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넌 날 믿어. 내 구원의 계획에서 넌 확실해! 밀어줄 거야.’ 이런 뜻입니다. ‘난 버릴 건데, 내 일 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그래서 그리스도의 은혜는 복음 전하는 것과 동전의 양쪽 면입니다.
은혜 충만한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께서 이끄시는 복음전파의 일에 열심히 순종하여 다 임무를 수행하는 여러분 되시길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나는 은혜를 쉽게 잊는 그런 자가 되지 않게 되길 원합니다. 내게 위기가 오지 않길 원합니다. 주님이 내게 주신 그 은혜를 잊는 미끄러짐이 없기를 원합니다. 내 인생에 있어서 주님의 은혜를 잊는 순간이 오는 그런 공백, 그런 위기가 오지 않길 원합니다. 내 안에 주님을 이해하는,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꾸준한 소망이 있기를 원합니다! 주여, 우리를 받아주시고 역사해 주시옵소서. 다같이 합심하여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모두가 하나님 은혜 속에 살길 원하고, 은혜 속에 우리 믿음이 견고하게 서 있길 원합니다. 정말 세상의 흐름에 우리를 빼앗기고 마음을 빼앗기고 또 감사하는 마음을 빼앗겨서 우리 하나님마저도 잃게 되는, 또 잊어버리는 그러한 일이 있지 않도록 우리 마음을 감동하시고, 또 우리 마음에 임하셔서, 충만하게 임하셔서 우리를 역사해 주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주의 은혜를 항상 감사하며, 주의 은혜에 대한 보답을 항상 행한다는 우리 마음의 작정이 있기를 도와주시고, 또 이와 같이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소망이 정말 주님의 은혜에 기반되는 우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녹취: 성락교회 성락선교센터
[1]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5~8)
[2]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히 12:15)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6)
[4]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9~10)
[5]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1~2)
[6]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1~14)
[출처] 20241208 은혜를 저버리지 않는 성도들(디모데전서 1:12~17) 주일연합 김성현 감독|작성자 이기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