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인 사람, 선한 사람(연합250525)
주일연합예배설교
20250525 영적인 사람, 선한 사람(로마서 8:1~8) 성락교회 주일연합예배 김성현감독
(로마서 8:1~8)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그 은혜 안에 살고 있으며, 하나님의 돌보심 속에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길은 명확하고, 방향도 분명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있는 동안 영적인 사람이 되어, 영원한 생명 길을 따라 주의 나라로 이끌림 받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 신앙생활의 방식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영으로 사는 사람의 방식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영적인 삶으로 나아가겠다는 결단을 다시 한번 해야 합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은 망할 인류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살려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인류가 무슨 의가 있다고 살겠습니까? 인간 중에 누가 하늘에 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용납을 받을 자가 있을까요? 어떤 근거로요? 그중에 그나마 나은 상위 1%만 구원을 받을까요?
인간은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이후 구원받을 자가 없습니다. 복음은 이 땅에 가져온 매우 희박한, 가느다란 구원의 길입니다. 그 아주 좁은 길은 세상의 어떤 아이디어로도 그 근처조차 갈 수 없고, 어떤 방법으로도 접근할 수 없는 구원의 방법을,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하나님과는 너무나 반대되는 존재인 우리를,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무 더러워서 도무지 구원받을 수 없는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 좁은 길뿐입니다.
이 구원의 길은 그 길은 벗어나서 타락하고 망하기 쉽습니다. 굉장히 좁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길 안에 있다면, 누구든지 실패 없이 영원한 나라로 이끌림 받을 것입니다.
성경에, 특히 에베소서에서 집중하고 있는 메시지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것입니다. 찬양도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 표현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은 신학적 용어 중에서도 매우 깊고 감동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한마디가 모든 것을 설명해줍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품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의 의지와 하나님만이 제공하시는 구원의 법이 이 안에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에베소서 3장 6절에서 알 수 있듯, 원래 우리는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인 우리가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후사가 되고, 함께 하나님의 지체가 되고, 함께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1]. 그렇게 우리는 유대인들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또 에베소서 1장에도,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리스도’라는 이름 안에서, ‘그리스도’라는 조건 안에서, “그래, 그리스도라면 그렇게 하자! 그 시스템으로!”라는 의미입니다. 바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 인크라이스트)’라는 개념과 조건 안에서만 우리를 살려주시는 놀라운 복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 주리라.’ 했습니다. 이는 이 세상에서는 줄 수 없는 복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은 겉으로는 망한 것처럼 보여도 결코 망하지 않으며, 오히려 독수리처럼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습니다. 잠시 있다 사라지는 세상의 부귀영화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느냐, 하나님의 애착을 받고 있느냐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느냐, 그것이 진짜입니다.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것인데,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라고 했습니다. 요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 할 때 ‘그리스도’라는 그 놀라운 이름은 차별 없이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과 승리로, 성공으로 이끌어주신다는 것입니다[2].
그러나 제가 말씀드렸죠. 아주 얇고 좁은 길이에요. 이건 법이에요, 지켜야 합니다. 너무나 단순한 법인데, 그 법이 뭘까요? 그리스도 안에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거 아시죠? 그리스도 안에서 한없이 하늘의 복을 받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이 생명이 하나님께 맹세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은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죽은 것과 같은 맹세예요. ‘하나님의 아들의 목숨, 그 목숨의 가치를 저 사람을 살리는 데 온전히 쓴다’는 관념이죠. ‘하나님의 아들이 죽기까지 한 하나님의 결단으로 저 사람을 살린다. 너희를 살린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린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정말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당신은 무엇을 가졌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신분이 있습니다.” “무슨 신분이요?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분이 나를 품어주고 계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당신이 별로 대단하지 않은데요.” “하지만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주님은 나를 품고 계십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이 못난 몸뚱이 외에는 가진 것이 없고, 단 하나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 안에 있다는 하나님의 약속, 그 보증뿐입니다. 이것을 무엇이라고 표현하나요?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조건이 따릅니다. 어떤 조건일까요? 바로 ‘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분명히 있으며, 선택해야 할 삶의 방식이 있고, 그 외의 방식은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영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제가 간단하게 요점만 정리해 드릴게요. 마치 내일 시험이 있다 생각하고 오늘 핵심만 전하자면, 바로, ‘주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날 때 이미 가진 조건들이 있습니다. 또 교회에서도 열심히 출석해서, “일 년 동안 난 딱 한 번 빼고 한 번도 안 빠졌어요. 그때 잠깐 산에 다녀오느라 어쩔 수 없던 거예요.”라고 말해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영으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으로 사는 사람만이 진실한 예배를 드릴 수 있으며, 그 삶이 예배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영으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시는 최소한의, 그러나 가장 중요한 요건을 충족시킨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은 로마서 3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원래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으로 말미암아, 대속하심으로, 하나님께서 대신 죄를 치러주심으로 인하여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난 것입니다. “우와! 우리는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입은 자가 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의롭게 되었을까요? 진짜 의로운 사람이 되었을까요?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외적인 모습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는 죄가 없다’고 합니다. “우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죄가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 있는 우리를 더 이상 ‘죄인으로 여기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죄인은 여전히 여기 그대로 있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롬 3:25) 예수님은 바로 우리를 위한 희생 제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자랑하는 그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희생 제물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롬 3:25) 본래 우리는 지옥에 가야 마땅하지만, 그걸 아시면서도 참으시고, 마치 우리의 죄를 못 본 것처럼, 그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셨습니다. 사랑하시는 의를, 용서하시는 의를.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나타내려 하셨던 것입니다.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6) 했습니다. 우리를 ‘의롭다’ 했습니다. 로마서에 의하면 이는 기독교 신앙인 바, ‘칭의(稱義)’를 받은 것입니다. 영어로는 ‘justification’이라고 하는데, 본래는 의인이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의인으로 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와, 나 죄 없다! 칼 갖고 와! 총 갖고 와!” 하며 의인이 되었으니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절대 그러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질은 여전히 더럽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는 말씀으로 살아야 하고, 영으로 살아야 합니다.
영으로 산다는 건 무엇일까요?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누구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까요? 바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모든 성경의 말씀, 곧 구약과 신약 전체를 ‘예수님이 오케이 하신 말씀’이라고 보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을 통해서 다시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승인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 말씀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는 의로울 수 없습니다. 훈련하지 않고, 조심하지 않고, 영을 따라 살지 않으면 계속 넘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조심하고, 다시 일어서고, 회개하고 또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저도 그런 마음이 싫습니다. 원수 마귀가 싫습니다. 죄를 짓는 것이 싫습니다. 교회를 미워하고, 사람을 질투하고, 미워하고, 저주하는 것, 그런 거 싫습니다. 나,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따라가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처럼 아름답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희생하며 사랑하고 싶습니다. 주님, 저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고백하죠?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세상에서와는 다른 분위기와 태도를 느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도 “이 사람 왜 이래? 조심해야겠는데?” 하며 경계하지만, 교회에서는 누군가 다가오면 ‘아, 외로운가 보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사연이 있고, 겉보기엔 자신만만해 보여도 속엔 아픔이 있습니다. 제가 다 들여다볼 순 없지만, 대부분 그렇습니다. 각자 인생의 고난과 슬픔을 안고 있습니다.
아직 청소년인 성도들은 이런 삶의 깊이를 충분히 경험하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세상의 쓴맛을 덜 봤을 수 있죠.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결국 알게 되고, 분노도 치밀고, “이 세상은 정말 몹쓸 곳이구나”라고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본인도 그 세상 속에 이미 휩쓸려 있는 모습을 보면 참 속상하고 괴로울 것입니다.
세상은 모두 아픕니다. 우리 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무언가 이뤘다고 자랑하려고 오는 자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원래 예수 믿는 사람들은 가난하고, 노예고, 세상에서 고통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삶을 애초에 포기하고, “나는 이 세상에 살기 어렵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고 싶다”라고 고백하고 인정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성락교회에 오는 분들은, “내 존재를 드러내야겠다, 명예를 얻어야겠다, 돈을 좀 챙겨야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나는 사랑해야 되겠다. 나는 사랑받고 싶고, 사랑하고 싶다”는 마음의 영혼들로 가득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교회에 왔을 때 서로 경계하지 마십시오. 특히 젊은 분들이라도, ‘저 사람, 뭔가 잘나가게 생겼는데?’ 하며 경계하지 마세요. 그들도 슬픔이 있습니다. 인생이 힘듭니다. 어려움이 있어요.
그러니 이렇게 말해주세요. “성도여, 내가 잘 모르지만 힘내세요. 나는 당신의 친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입니다. 당신은 나의 친구입니다. 우리 모두 친구입니다. 진정한 친구입니다.”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명령 중 가장 큰 법이 무엇인가요? 바로 “사랑하라”입니다. 우리는 본래 다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쳐 주셨습니다. ‘칭의’, 의롭다고 칭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원래 다 지옥에 갈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들을 희생하시고,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넣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서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본래 지옥의 종, 마귀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법으로 살아갑니까? “교회 다니니까 천국 가지. 죄 사함도 받았잖아. 나 의인이야.” 어떤 면에서는 맞는 말일 수 있지만, 말투 속에는 신앙의 본질이 빠져 있습니다. 우리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여전히 죄인입니다. 어제도 죄를 지었고, 오늘도 죄를 생각하고 있고, 내일도 또 지을 것입니다. 교회 문 나서자마자, 5분 후에도 범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나는 이제 그렇게 살지 않겠습니다. 나는 다르게 살겠습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겠습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성도들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교회를 위해, 필요하다면 목숨도 내놓겠습니다. 내 주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나를 살리신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주님께 이 목숨 하나 드리겠습니다.”
왜 이렇게 하죠?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하나요? 영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영으로 산다는 건 무엇인가요? 바로 ‘예수님이 시키신 대로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특히 에베소서를 보면 ‘성령 충만하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데 원어에서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Fully filled with the Spirit’, 즉 꽉 찬 상태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충만’이라는 단어는 완전히 가득 찬 느낌이지만, 원래 의미는 ‘성령으로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단번에 채워지는 것이죠.
하지만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자신의 생각에 따라 행동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의 감독과 싸워야 되는데. 신학교를 빼앗아야 되는데. 교회가 무너져서 고난을 좀 받아야 되는데. 어려움 좀 당해봐라! 교회에서 뭐 좀 얻어내야 되는데.’ 이런 마음으로 교회를 힘들게 하는 사람은 성령 충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성령의 생각만큼 내 자신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성령 충만이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향, 하나님의 의지만큼 나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하다”고 하며 씩씩거리던 사람이, 속으로는 ‘교회를 어떻게 하면 내가 이용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다면, 그는 성령 충만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을 공격하는 사람입니다.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이와 유사한 사건이 나옵니다. 사도들을 잡아 죽이려고 했을 때, 율법학자 가말리엘이 나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잠깐! 사도를 죽이려고? 감독을 죽이려고? 여기 성도들을 죽이려고? 쉿! 잠시만. 너희들 그러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격이 될지도 몰라. 확신이 없다면 싸우지 말자. 저들을 해하지 말고, 놓아주자. 너희는 사람과 싸우는 줄 아나 본데, 어쩌면 하나님과 싸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하지 말자(행 5:38~49).” 그 말로 그들을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우리 인생을 사랑합니다. 성도들 모두가 사실은 어렵습니다. 다들 지옥에서 살아나고 싶어 합니다. 이 세상의 흔들림 속에서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고, 우리는 함께 기쁨을 나누고,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을 나누지만, 다들 세상을 이겨가려고 애를 쓰고 있을 것입니다. 힘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에너지를 줘야 합니다. “힘내! 힘내! 나는 너희를 경계하지 않아. 나는 너희를 미워하지 않아. 나는 너희를 증오하지 않아. 나는 너희를 사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야. 나는 내 교회를 위해 최선을 다할 거야.” 이 사람은 왜 이렇게 할까요? 예수께서 그렇게 하라고 시키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교회를 섬깁니다. 교회가 어려울 때 함께하겠습니다. 성도들과 함께 돕겠습니다. 힘들어도 하겠습니다. 직장생활이 바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왜 그렇게 합니까? 주님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주님께서 시키셨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주님께서 시키셨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으로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세상의 욕심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 안에 사는 사람은 사랑합니다. 우리가 이전에 세상에서 살던 것처럼 이기심으로 살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삶을 사는 사람들, 우리의 옛 모습과 같이 사는 사람들은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전에 우리도 ‘나’를 위한 ‘나’, 특별히 나의 육신적인 문제를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삽니다. “나는 이제 죽어도 괜찮습니다. 오늘 죽어도 괜찮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있습니다.”
영생이 있으신 분들,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영생이 있으신 분들, 다시 한번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것은 죽지 않는 생명입니다. 영원히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영광스러운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가 받은 생명입니다.
“이제는 죽어도 후회가 없습니다. 이제는 세상이 다 무너져도 후회 없습니다. 나는 낮은 자리에서 주를 위해 살겠습니다. 내 형제들, 교회 안에서 힘겨운 성도들, 그 모든 친구들을 도와주고, 그들에게 용기를 주며, 하나님을 느끼게 해주고, 그리스도 안의 기쁨을 나누어 주고 싶습니다.” 여러분 모두 그렇게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원수의 모습, 원수의 모든 냄새, 원수의 흔적들이 다 떠나가고, 오직 주님의 거룩한 은혜와 사랑의 향기가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용서가 가득하고, 용기를 주는 그리스도 안의 표적들이 여러분 가운데 가득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에 기도할 때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입니다. 주님, 내 안에서 성령으로 말씀하시고, 내 삶을 인도하시는 모든 것이 바로 당신의 말씀, 당신의 인도하심, 당신의 명하심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을 의지하고 나아갈 것입니다. 옛 사람을 다 버리고, 이제는 주를 위해 살고, 주의 교회를 위하여 내 모든 것을 버릴지라도, 그것을 기쁨과 영광으로 여기며 살아가겠습니다. 주님과 함께 이 땅에 있는 동안, 영원한 나라를 함께 꾸며갈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도와주시고, 모든 성도들에게 힘을 주옵소서. 이기적으로, 세상적으로, 육신적으로 탐욕을 부리며 살지 않고, 서로를 내어주고, 희생하며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우리를 용납하여 주옵소서. 우리 함께 있는 성도들, 용기를 내게 도와주시고, 저 하늘을 바라보며 새로운 힘을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같이 합심하여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품어주시고, 영원한 나라로 인도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고, 모든 죄를 사함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영혼은 하나님의, 우리 주님의 음성을 따라 달려가야겠사오니,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고, 우리 안에서 보호해 주시며, 우리를 실패하게 하려는 원수에 대항하여 힘을 다해서 주의 나라를 위해 우리가 쓰여지게 하여 주시옵소서.세상은 우리를 불행하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함께할 때에는 하나님의 행복,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평안과 안식을 말합니다. 우리 안에 함께하시고, 모든 성도들을 역사하시고, 위로하시고, 도와주시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녹취: 성락교회 성락선교센터
[1]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엡 3:6)
[2]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