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22_3차신유성회5(강석준집사님 정리)
요한복음 17: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요한복음 17:7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줄 알았나이다
요한복음 17: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요한복음 17:9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요한복음 17:10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요한복음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7: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하려 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7: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7: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7: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당부의 말
내일은 마지막날이니까, 이번에 은혜받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라.
감사는 소유격이다. 내가 얻었습니다하는 소유격이다.
그래서, 시인하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시인하는 것이다. 주신 것을 받은 줄로 믿고 시인하는 것이다.
내 영혼에 심으셔서, 앞으로 이루실 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찬204장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설교말씀
우리에게 유일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다.
내게 생명은 중요하다. 육신이 살아있을 때는 돈이 필요하고, 집이 필요하고, 좋은 옷이 필요하다.
그러나, 마지막 돈을 가질래, 목숨을 가질래 하면, 목숨을 구할 것이다.
천하를 주고도 다시 살 수 없는 것이 목숨이다.
그런데, 목숨보다 더한 것이 영이 사는 생명이다.
영이 생명이 없으면 지옥간다. 영이 살아야 귀신 되지 않는다.
이 생명이 목숨보다 더 중요하다.
세상은 자꾸 변해간다. 세상을 따라갈 수 없다.
다 속이는 것이다.
솔직히 자신에게 물어보라.
거짓말로 자꾸 자기를 속이면 미혹의 영에 걸린다.
정말 목숨보다 생명이 더하다고 절감하는가.
생명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내 영만이 안다. 내 영이 아는 것이 육체로 전달될 때 체험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체험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기독교는 체험의 신앙이다.
자기가 생명을 얻었다는 것을 영이 가장 먼저 안다.
육체는 감각이 있고, 감정이 있다.
우리 신앙은 절대 체험이 있어야 한다.
증거가 있어야한다는 말이다.
증거를 소홀히 하다 나중에 어려움 당하면 자기에게 증거가 없기 때문에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없다.
베드로가 닭울기전에 세번 예수를 부인한 것처럼 되고만다.
성락인들은 시무언에게 수십년 배웠으니, 우리 신앙에 체험이 있어야 한다.
체험은 육체에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병든 자들은 건강을 명하시는 계명을 따라, 육체가 회복되는 것이다.
눈이 지금 안보여도, 눈이 녹듯 계속 나아질 것이다.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였다.
의심치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 하셨다.
여기서 믿으라는 것은 계속하여 순종하여 믿는다는 뜻이다.
단회적으로 믿습니다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이다.
예수 이름이 한번 우리 마음에 들어오시면 일생 그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영혼에 들어오면 일생 가져야 한다.
그런데, 왜 안가지는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베드로가 미문앞의 앉은뱅이로 구걸하는 자에게 나는 네가 구하는 은과 금은 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였다.
자기가 가진 이름으로 명하는 것이다.
앉은뱅이의 영혼이 그것을 받아들이니까, 육체의 다리가 낫는다.
기독교는 체험의 신앙이다.
오늘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하지 않고 있다.
그것을 철저하게 가르치고, 주장하고, 인도했다면 오늘날 굉장했을 것이다.
목사들은 교인들의 눈치를 보느라고 제대로 하지 않는다.
목사사례를 교인들이 자기가 주는 것 같으니까, 갑질한다.
목사들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비겁하게 한다.
옆에서 봐도 무능하고 가치가 없다.
은퇴하고 나면 초라한 꼬라지를 피할 수 없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셔서, 보시고, 들으시고, 움직이신다.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시면 말하고, 듣고, 움직이신다.
예수께서 행하시는 것과 말하는 것은 스스로 한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친히 명하신 것을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체험이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나 하던 일도 할 것이요, 이보다 더 큰 일도 하리라 하신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소망을 주셨는가.
그런데 나는 부족해서라고 말하며 이를 거절한다.
성경에서는 자기가 부족하다는 말이 없는데, 한국에서는 참 많이 한다.
겸손한 것 같지만, 불신앙이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부족하지 않게 하려고, 성령이 오셔서 도우신다.
그 말씀을 알게하시고, 생각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신다.
그는 진리의 영이시다.
처녀에게 말씀이 임하니까, 사내를 알지못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성령이 덮으시면 능치못함이 없다.
우리는 강력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내 영혼아 말씀을 체험하자.
영혼이 말씀받아서, 육체에 전달해야 체험한다.
아멘하지만, 자기 영혼으로부터 육체에 전달되지 않으면 체험이 없는 것이다.
육체는 자기 지식, 경험, 세상의 문화, 모든 것들이 가로막고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다. 체험이 없는 것이다.
교회는 여러사람이 나온다.
사회적으로 이름있고, 점잖고, 훌륭하고 대접받는 자들도 나온다.
보면, 이상하게도 사회적으로 대접받아서 그런지, 교회안에서 점잖을 떤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장로가 되어서, 어디 아프다고 나왔다.
예수여, 나를 살려달라고 크게 소리치라고 했더니, 소리를 내지 못한다.
그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하나님이 자기 몸에 손대는 일을 부끄럽게 여긴다.
유명한 의사가 자기 몸에 손을 대는 일은 백프로 인정하면서, 목사가 말하는 것을 자기 마음을 편하게 하는 덕담으로 여긴다.
무슨 체험이 되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으로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목사의 덕담으로, 종교인으로서의 덕담으로 듣는다.
말씀이 나를 명령하고, 나를 꾸짖고, 나를 벌떡 일어나게 하고, 달려가게 해야한다.
예수께서 침례받고 물위로 올라오실 때, 성령이 임하셔서 광야로 몰아내셨다.
광야는 맹수가 기다리고 있고, 마귀가 기다리고 있는 곳이다.
그런데, 제일 충만하실 때,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셨다.
짐승을 채찍질해서 몰듯이 몰아냈다는 말이다.
저는 내 기뻐하는 자라는 계시를 받은 예수를 성령이 몰아내신다.
예수는 성령으로 시작하여, 성령으로 일하시다가, 성령으로 부활하셨다.
예수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고, 아시는 말씀을 다 체험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첫째날 설교의 머릿돌 위에 계속 놓여가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다시 읽어보라.
우리의 기쁨은 주님이 주신 것이요, 주님이 주신 것은 아버지가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 영광하는데, 무엇이 영광인가.
어떤 사람이 상을 받으면, 그 이름이 영광을 받는다.
노벨상도 죽은 자에게는 주지 않는다. 살아있어야 받는다.
그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름이 영광을 받는다.
이름을 얻으려고, 선거에도 뛰어든다.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얼마나 영광받는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통령으로 영광받다가 줄줄이 저주받는다.
앞으로 이것은 미혹의 영에 걸려서 줄줄이 그렇게 될 수 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역사를 봐도, 정적들은 삼족을 멸한다.
그렇게 오백년동안 궁전에서 피뿌림이 있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것은 우리에게 부담을 주거나 짐을 주신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간증하는데, 그런 사람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집회 오려고 하니까, 시어머니가 반지 빼놓고 가라고 했다고 한다.
은혜받아서 다 드릴까봐 염려하는 것이다.
전에 전라도에 가서 집회하는데, 반응이 없이 가만히 있는 장로가 있었다. 기도좀 하라고 했더니, 자기 은혜받을까봐 안한다고 한다.
왜 은혜받으면 안되느냐고 물었더니, 십일조 내는게 싫어서 그렇다고 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를 주장하는 것을 무서워하면 어떻게 될까.
교회에서 장로가 되었지만, 종교로 가지고 싶지, 믿음으로 가지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다.
믿음이 무엇인가.
예수의 이름을 우리의 영혼이 가지게 하려는 것이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예수 이름을 가졌다.
예수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을 아들에게 주신 이름이요, 그 이름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나되게 하시는 이름이다.
본래 예수란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이다.
그 이름을 아들이 순종하고, 복종하므로, 이 큰 이름을 주셨다.(빌2:9)
그래서, 만유가 예수 이름에 무릎꿇게 하시고, 예수 이름으로만 하나님께 영광돌리게 하셨다.
우리가 다급하니까 열심히 구하는데, 예수께서는 이방인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하신다.
너희 쓸 것을 아버지가 먼저 아신다.
뭐 달라고 졸라대기보다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시며 주기도문을 일러주셨다.
먼저 아버지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라는 것이다.
내가 당장 병 낫고 싶고,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먼저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돌리라는 것이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꽉찬 곳에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천사를 만났다.
천사가 하는 말이 내 이름은 여호와니, 이는 하나님의 표호니라 하였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 그는 살아계신 나의 주인이시다 믿었다.
나를 종으로 부릴 수 있는 주인이시라고 믿었다.
그래서 본토, 친척을 떠나라 하시니 그대로 순종한다.
그가 고향을 떠났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의 근원이라 하셨다.
뿌리가 있는 복이라는 말이다.
이 지구안에 복의 근원은 아브라함 하나밖에 없다.
그래서, 아브람이라는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꿔주셨다. 열방의 조상이라는 뜻이다.
열방이 아브라함을 인해서 복을 받는다. 아브라함과 함께 하면 복을 받고, 떠나면 저주받는다.
예수께서 포도나무가지가 나무를 떠나면 절로 말라진다고 하셨다.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되게 하셨으니, 또 아브라함같은 자가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이 복을 그렇게 심으신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복을 명하셨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른다.
창세기에 여호와라는 단어가 나오지만, 모세이전에 아무도 여호와라는 이름을 들은 적이 없다.
출애굽기 6:2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출애굽기 6: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아브라함도 그렇게 복을 받았지만, 자기에게 복을 주신 분의 이름을 모른다.
그 아들 이삭도 아브라함에게 속하여 복을 그대로 받았지만, 복주신 이의 이름을 모른다.
야곱도 이름을 알려달라고 그렇게 부르짖었지만, 가르쳐주지 않으시고, 오히려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다.
야곱의 일생동안은 야곱이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자손들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자손들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가질 때, 그들에게 비로소 모세를 통하여 여호와라하는 표호를 가르쳐주신 것이다.
출애굽기 3: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옛날 사람은 성인식을 가졌다. 성인식을 가지면 전통적으로 호를 가지게 되어있다.
자기 이름이 따로 있는데, 호를 가진다.
사람들이 애칭으로 부르도록 표호를 갖는다.
그래서, 그 표호로 일생사는 것이다.
아브라함으로부터 450년이 지나서, 모세에게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표호를 가르쳐주셨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표호지, 이름이 아니다.
인자가 보좌에 들어가기 전, 대리자로 위임받아 나타난 천사에게 하나님의 표호를 주셨다.
그 표호는 육체의 예법은 되지만, 우리의 영혼은 구원할 수 없다.
그 때부터 천년이 지난후에 호세아 때에 다시 강조하신다.
호세아 12:5 저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기념 칭호니라
그러니까, 아직 하나님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창세기에 여호와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은 모세가 창세기를 썼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를 모세오경이라고 한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몰랐던 이름을 표호로나마 모세때 처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랜세월이 지나 호세아 때도 잊지않도록 여호와라는 이름이 기념하는 칭호라고 다시 말한다.
아직 이름을 모르는 것이다.
사도행전7장에서 스데반은 젊고 이적이 많이 나타난 사람이었다.
사도행전 7:30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사도행전 7:31 모세가 이 광경을 보고 기이히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 있어
사도행전 7:32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알아보지 못하더라
스데반은 모세에게 나타난 것은 천사라고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난 것이 또한 천사임을 말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7:53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갈라디아서 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만났던 분은 이스라엘만 인도했던 하나님이지, 온 인류의 하나님이 아니다.
그 이름은 우리를 구원하는 이름이 아니요, 하나님의 표호다.
우리 하나님은 하늘 우편에 계신 인자시다 하니까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다.
사도행전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그런데, 오늘날도 여전히 구분못하고, 아직도 여호와여 하면서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천하 인간에게 구원받을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
예수라는 이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요,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이름이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율법과 양심에서,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이름이다.
히브리서 1:4 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예수 이름은 아버지의 것을 아들에게 주신 기업이다.
그 이름을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셨다.
그래서 그 이름을 믿고, 마음에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우리는 여호와께 영광돌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 이름에 영광돌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하시다.
구별하는 것이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유대인들이 여호와여 해도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예수 이름으로 침례주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
예수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이요, 아들의 이름이요, 성령도 예수 이름으로 오신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 하시니, 제자들이 예수 이름으로 침례준다.
오늘날 천주교로부터 시작해서 기독교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한다.
침례도 세례로 바꾸고, 그 이름도 모르고 한다.
분명히 사도행전에서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준다고 말하고 있건만 알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신지 아무도 보지 못하지만, 그 이름에 영광돌리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과 똑같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예수께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세상에 와서, 저희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하였더니, 저들이 나를 믿었습니다. 아버지가 내게 주신 것을 저희에게 주었습니다 하신다.
예수께서 내 기쁨이 너희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케하려함이라 하신다.
돈이 당신을 기쁘게 하는가. 무엇이 당신의 기쁨인가.
예수께서 침례받으시므로, 나사렛사람을 장사지내고, 오직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로 나타나셨다.
예수 이름에 하늘과 땅에 있는 영들이 다 무릎꿇게 하시고, 오직 그 이름으로만 영광돌리게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효도한답시고, 이빨 다 빠진 분에게 고기를 잔뜩 사간다.
그래놓고 자기들끼리만 푸짐히 먹는다.
무엇이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가.
아버지를 이해하지 않으면 기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무엇으로 영광받으시는가.
그 이름으로 영광받으신다.
요17:1 그 이름이 영광받으신다.
우리는 침례받아, 혈육에 속한 옛사람을 장사지내고, 하나님께 들어오는데,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장사지내고, 연합하는 것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 아들에게 주어서, 이 세상에서는 아들을 통해서 예수라는 이름을 듣는다.
예수이름은 아들의 이름이요, 본래 아버지의 이름이다.
모든 이름은 땅에서 지어졌지만, 예수 이름은 하늘에서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너무 사랑하시고 기뻐하셔서, 주실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주신다.
아들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주고, 목숨이라도 줄 수 있다.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짐승도 없다.
엄마들도 자식을 위해 자기 목숨이라도 주고싶다고 한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아들을 위해 주고싶으신 것이다.
그래서 주신 것이 예수라는 이름이다.
그 이름을 아버지로부터 기업으로 얻으셨다.
악할지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저주를 주시겠는가. 가장 행복한 것을 주시겠는가.
복이라는 원어는 하나님의 행복이라는 뜻이다. 복은 여러개가 아니다. 하나다.
하나님의 행복이다.
예수도 우리에게 복을 주실 수 없다.
아버지만 우리에게 복을 주실 수 있다.
예수께서도 아버지에게 복을 빌어 축복하신다.
목사가 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축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도 복을 빌고, 성령도 복을 빌고, 복을 빌지 않는 분은 아버지 뿐이다.
아브라는 말은 그 이상이 없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모든 영광을 그 이름이 받으시기 때문에 그 행복한 이름을 아들에게 주셨다.
그래서 아들도 아버지가 내게 주신 이름으로 와서 그 이름으로 영광받았다고 하신다.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라는 계시를 받았지만, 그 이름을 모른다.
그냥 심어놓은 것이다. 네 씨에서 대적의 문을 밟는 자가 나오리라 하신다.
사람들은 복을 주시옵소서 할 때, 전부가 돈을 구한다.
하나님의 행복은 그 이름으로 영광받으시는 것이다.
그 이름이 하나님의 행복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로 말미암아 마침내 하나님의 행복을 은혜로 받는다.
내가 예수 이름을 가진 것은 하나님의 행복을 가진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예수이름으로 하셔서, 예수이름으로 하나님의 행복을 우리에게 주려고 하신다.
병 낫는 것은 하나의 절차다.
나의 하나님 아버지시여, 내게 하나님의 행복을 주시옵소서.
내게 아버지의 행복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예수이름을 소유한 것은 믿음인데, 믿음으로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곧 예수이름, 하나님의 행복을 붙들고 있는 것이다.
내 영혼아, 하나님의 행복을 붙들자.
하나님의 행복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신다.
우리가 기도하고, 위로받으려는 것이 무엇인가. 행복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돈이 없어서 행복하지 않고, 취직이 안되서 행복하지 않다.
그런데 똑바로 알고, 열쇠를 가져서 제대로 열었으면 얻었을 것이다.
죄라는 본 뜻은 과녁을 빗나갔다는 뜻이다.
성령이 오셔서 죄에 대하여라 함은 나를 믿지 않음이요 하신다.
교회와서 예배드릴 때, 하나님의 행복에 참여하려고 하는 것이다.
왜 기도하는가, 하나님의 행복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영광은 하나님의 행복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이름이 우리안에 모셔지게 한다.
말씀으로 우리안에 잘 모셔지고 있다.
우리가 그 말씀으로 행하는 것은 그 이름을 위해서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행복이다.
과녁을 이탈하지말고, 딱 뚫을 수 있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
백부장의 믿음을 그렇게 기뻐하신 것처럼 그럴 것이다.
아브라함도 그 복을 받았지만, 그 이름을 몰랐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그 이름을 알면서도 복을 모른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복, 그 이름을 내 심령에 모셨다.
하나님의 행복이 내 속에 오니까, 불행이 떠나간다.
그래서 병도 낫고, 가난도 떠나가는 것이다.
지금 평안하라. 하나님의 행복으로 행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