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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6주일예뱅및연합0

lks8284 2019. 6. 24. 11:07

‘복이 있는 자’ – 김기동 목사님(배경동집사님 정리)

[마태복음 5:1~12]

 

하나님은 만복의 근원이시다. 성경의 복은 하나님의 행복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만족하신, 부족함이 없으신, 흡족한 행복을 가리켜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기도도 하고, 복 받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그러나 막연히 복이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허공을 향해 손을 내젓고 아우성치자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본래 아무도 볼 수 없다. 볼 수 없는 분이 아버지시다. 그가 우리에게 복을 주셨다. 그 복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복이 실상이다. 우리 마음에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손으로 만질 수 없고 볼 수 없을 뿐이다. 공기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공기로 숨 쉰다. 숲, 산 속에 들어가면 나무는 산소를 내놓는다. 사람들은 그 산소를 마시고 탄소를 내놓는다. 나무와 사람 서로가 상부상조한다. 나무가 필요한 것을 우리는 내뿜고, 사람이 필요한 것을 나무가 내뿜는다. 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실상이다. 전쟁할 때 독가스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독가스가 풀어지면 사람들이 불과 몇 분만에 죽는다. 눈에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지만 실상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복은 실상이다.

 

이를 알고 기도하고 알고 사모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마치 로또 복권 달라는 것처럼 생각한다. 이는 기적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류가 세상에 만들어지기 이전에 인류가 마실 수 있는 산소를 만드셨다.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살 수 없다. 이와 같이 복이라는 것은 실상이다. 엄마가 자식을 사랑하는데, 사랑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사랑이 만져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이다. 엄마 때문에 아이가 태어나 산다. 엄마의 사랑이 없으면 어떻게 살겠는가? 이와 같이 복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같이 실상이다. 복을 구하고도 실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복을 구하고도 누리지 못한다.

 

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사람에게 복을 주셔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셨다. 그러므로 자식을 낳고 생육하고 번성하고, 그 땅에 충만하여 인류가 번창했다. 그것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명령하셔서 그대로 된 것이다. 자연계시라 한다. 자연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인류에게 무엇을 주시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이름을 지명하여 사람에게 복을 준 것은 아브라함이 처음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 뿌리라 하셨다. 하나님의 행복을 사람에게 주어 복이 뿌리를 내리는 나무다, 근원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었다. 지구상에 그런 근원은 아브라함 뿐이다. 그러므로 그로 인해 자손과 열방이 복을 받으리라 하셨다.

 

복의 근원은 아브라함 뿐이다. 아브라함 같은 사람이 또 있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인격이 훌륭했던 것이 아니라 복의 근원을 삼으신 것이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아브라함에 속한 자가 되어야 복을 받는다. 이와 같이 온 열방이 아브라함에게 속할 때에 복을 받는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은 이 세상에서 땅을 밟고 사는 사람들, 흙 냄새를 맡고 산소를 마시는 모든 인류가 받는 것이다. 기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적이 있다. 가을이 되면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 이처럼 믿고, 아브라함의 믿음 같은 믿음으로 순종한다면 다 이 땅에서 복을 받을 수 있다. 그것을 사람들이 소홀히 여기고 무시하기 때문에 복이 없다. 그것을 무시하지 않고 아브라함에게 연결된 나뭇가지가 되어 있으면, 나뭇가지가 마르지 않는다면 그 복을 받을 수 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는 육신이 누려야 할 것들을 다 누릴 수 있는 복을 주셨다.

 

그러나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예수가 복의 근원이 되셨다. 이 땅에서 아브라함이 받은 그런 것이 아니고, 예수가 복의 근원 되심은 신령한 것이다. 하늘에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자들은 그 복을 아브라함의 복처럼 이 땅에서 형통하고 재산을 증식하는 것이 아니라, 신령해지는 것이다. 하늘에 속한 것이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손을 얹고 축복하셨다. 복을 비셨다. 복은 하나님의 행복이므로 제자들에게 복을 주시옵소서 축복하셨다. 예수께서 복의 근원이 되셔서 그가 축복한 축복은 주여,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고, 큰집 짓고, 양식 많이 쌓고, 형통하게 하소서 하는 기도가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는, 하늘에서 영원히 도둑맞지 않고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복을 비신 것이다.

 

아브라함의 복은 이 땅에서 모두 열매 맺는다. 예수께서 복의 근원이 되셔서 하는 축복은 모두 하늘에서 열매 맺는 것이다. 이것을 분명히 잘 이해해야 한다. 예수께서 하늘로 가셔서 축복하셨다. 그런데 예수께 축복받은 제자들이 몇 년 사이에 모두 순교하였다. 그들은 오히려 돌에 맞아 죽고, 불살라 죽고, 십자가에 죽고, 저주스러운 죽음으로만 줄줄히 죽었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축복한 것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아닌가, 왜 모두 젊어서 순교하는가 생각했다. 바울 선생은 그가 변화되기 전에는 어디를 가나 존경받는 율법사였다. 그러나 그가 예수의 축복을 받으니 가는 곳마다 맞았다. 죽을 뻔한 것이 3번이다. 그래도 계속 전도하였다. 예수께서 바울에게 복을 주시니 바울이 가는 곳마다 불행하였다. 이와 같이 예수가 축복한 사람들이 다 그러하였다.

 

아브라함에게 축복한 것은 가는 곳마다 차지하는 것이다. 가나안 땅에 가는 민족마다 다 죽었는데,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그대로 차지하였다. 예수께서 축복하신 것은 이 땅에서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죽는다. 이 땅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복은 육체가 있는 동안만 유효하다. 아무리 큰 복을 받아도 육체가 죽으면 끝난다. 이 땅에 있는 것은 다 잃어버린다. 사람의 수명과 똑같다. 그러나 예수께서 축복하신 복은 하늘에 있는 것이다. 이 땅에서는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 옥에 가두어도 빼앗을 수 없다. 두드려 패도 빼앗을 수 없다. 그것은 하늘에 있기 때문이다. 복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고, 사람이 상급으로 받는 것도 아니고, 순전히 하나님의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는 것이다.

 

우리가 은혜 받는 것이 복 받는 것이다. 그 은혜는 어떤 사람이 받는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 하셨다. 프토코스라는 말은 가난하다라는 말인데, 자기가 출세를 해도, 돈을 많이 벌어도 그 빚을 갚을 만한 자격이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니 은혜를 갚는다는 소리들을 한다. 헌금은 은혜갚는 것이 아니다. 은혜는 100%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시는 선물인데, 복을 받을 수 있는 자격, 프토코스는 영원히 그 빚을 내가 출세하고, 돈을 벌고, 영광을 받고, 왕이 될지라도 갚을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억만분의 일이라도 갚을 수 있는 것은 은혜가 아니다.

 

은혜와 상은 다르다. 상은 거저 얻는 것이 아니다. 내 공로가 있어야 한다. 내 수고와 땀으로 상을 받는다. 행한 대로, 그 성적대로 받는다. 그러나 은혜는 아무 공로 없이, 의가 없이, 수고 없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갓난아기가 잉태하는 것도 은혜이다. 그가 태어나서 자라는 것, 부모의 사랑은 은혜이다. 갚을 수 없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은혜받은 것은 자녀를 낳았을 때 그 자녀에게 계속 베푸는 것이다. 나무가 잔가지를 통해 계속 열매를 맺는 것처럼 그러하다.

 

마음에 억만분의 일이라도 은혜를 갚는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마귀가 시험하는 것이다. 은혜는 공짜로 받으라는 것이다. 믿으라는 것이다. 내 영혼아 하나님의 은혜를 믿자. 자기가 마치 은혜를 갚는 것처럼 경건히 하지만 그것은 타락하는 것이다. 내가 은혜를 갚는다고 생각하면 타락하는 것이다. 은혜는 갚을 수 없다. 조금이라도 믿음이 떨어지면 타락하는 것이다. 철봉에 매달렸다가 손을 쉬면 떨어지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은혜를 갚을 수 없다.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어떡하랴? 감사하는 것이다. 그저 믿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믿음이 상하지 않도록 하자.

 

성령이 오셔서 그 믿음을 역사하신다. 주님의 은혜를 시인하고, 더 믿는 것이다. 성령을 통해 믿음을 얻어야 한다. 부모의 은혜는 갚을 수 없다. 일평생 빚을 지고 산다. 그 대신 내가 자식을 낳으면 다시 그렇게 한다.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다 알아주지 않지만 그렇게 한다. 은혜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복은 하나님의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순종하는 자마다 이 땅에서 차지하고 영광 받을 수 있지만 육체의 수명과 같은 것이고, 예수가 복의 근원 되신 예수로 인한 복은 하늘에서 받는다. 하늘에서 복을 받으면 이 땅에서는 미움을 받는다. 버림받는다.

 

가인과 아벨이 똑같이 제사를 드렸다. 아벨은 양으로 번제를 드렸고, 가인은 농사하여 거둔 곡식으로 번제드렸다. 하나님이 아벨의 것을 받으셨다. 이는 핏소리를 들으심이다. 가인이 제사를 정성드려 했으나 하나님이 거두시지 않으셨다. 오늘날의 종교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핏소리가 있고, 받지 않으시는 종교의 모양이 있다. 가인도 똑같이 정성드렸지만, 상달되지 않았다. 인간이 아무리 수고하고 열심히 하고, 경건한 모양을 갖추고, 자기 의를 쌓아도 아무것도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는다. 아벨은 핏소리를 내었다. 그것을 하나님이 들으셨다. 그것이 프토코스이다. 우리는 정말 은혜받아야 한다. 무능하고, 무익하고, 부족하고, 갚을 수 없다. 그러나 감사하다. 이 땅에서 핍박하고 불행한 것 같은 모양이어도 내 영혼은 하늘에 있는 것이다. 이것을 좀 믿자.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예수님을 의지하여 낙원의 초대를 받고 구원받았다. 그가 잠시 후에 목숨이 끊어질 텐데 은혜 갚을 길이 있는가? 그런데 은혜를 주셨다. 우리는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처럼 도저히 그 은혜를 갚을 수 없다. 절망이다. 프토코스라는, 억만 분의 일도 갚을 길이 없다. 그 때에 구원하신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의와 공로를 내세워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다 생각하므로 실패한다. 복을 받으려면 겸손해야 한다. 예수에게 속하여 예수로부터 복을 받자. 그것은 영원히,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

 

육체는 하늘의 것과 다르므로 많은 고통을 받을 수 있다. 복을 받은 자는 핍박을 겸해서 받는다. 의를 위해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다. 나를 위해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다 하신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상이 있다. 핍박을 받아도 원망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면 상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를 위해, 의를 위해 핍박받는 자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복이 있는 자는 핍박받는다. 핍박받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상이 있다. 나는 아브라함에 속한 자가 아니요, 예수에게 속한 자다. 아브라함에게 속한 자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고, 예수에게 속한 자는 예수의 복을 받는다. 아브라함의 복은 땅에 속하여 육체의 수명과 같고, 예수의 복은 하늘에 속하여 영원하다. 복은 은혜로 받는다. 주여 내게 하나님의 복을 은혜로 주시옵소서.

 

 

 

‘시험의 때’ – 김성현 목사님

[요한계시록 2:10~13]

 

하나님이 말씀으로만 양육한다, 설교시간에만 역사하신다 생각한다면 고쳐야 한다. 그 때에만 성장하고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 들어온 우리 모두에게, 신앙생활 전체를 역사하신다. 기도의 음성들, 성경공부, 자체 모임, 함께 하는 대예배와 연합예배, 성도와 함께 밥 먹는 것, 함께 길 가는 것까지도 역사하신다. 주 안에 피로 사신 우리 성도들은 함께 가야 한다. 확신이 있어야 한다. 말씀 외에는 날 버린다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수많은 우리를 위한 노력을 무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강제로 못하시는 부분이 있다. 우리에게 너희가 해야 한다고 보시는 부분도 있다. 이는 시험을 이기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해야 한다. 시험은 벗을 수 없다. 누구든지 해야 한다. 이 곳은 음부, 호랑이 소굴이기 때문이다. 이 곳은 늑대의 소굴이다. 이 곳은 온갖 가장 악한 원수들이 있는 곳이다. 그 곳에 우리를 두고도 견인해 가시도록, 하나라도 영혼을 구하시려 하신다. 시험은 우리가 이겨나가야 하는데, 우리 앞에 놓으신다. 우리가 믿고 있는 바에서 의심이나 어려움, 방해가 올 때 시험이라 하지만, 이겨낸 자들은 잘 이겨낼 수록 더 강해지고 천국이 가까이 오고, 귀히 쓰신다.

 

시험에 넘어간 사람은 상처 없이 잘 넘어가지 못한다. 후유증이 남아 있다. 시험에 부딪혀 한번 넘어지면 평생 회복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상처를 평생 안고 간다. 시험은 이겨내야 한다. 시험이 오면 어떻게 하는가? 시험은 내 마음이 상처를 받는 문제이다. 시험은 내 마음이 부딪혀 갈등하고 싸워야 하는 문제가 있다. 일반적으로 시험은 자기 마음에 상처를 가지고 간다. 그러니 사실은 자기와의 싸움이다. 오늘 이 말씀은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주제이다. 시험은 근본적으로 자기 영혼을 위해 승리하느냐, 자기 육신을 위해 실패하느냐의 문제이다.

 

시험에서 가장 처음 오는 것은 내적 갈등이다. 개인 간의, 개인과 교회와의, 삶과의 갈등, 가족간의 갈등, 내적 갈등 등이다. 두번째로 오는 것은 외부에서 오는 밖으로부터의 영향이다. 교회 전체가 공동으로 감당해야 할 일이다. 이 사태 같은 것이다. 사회의 어려운 환경으로 외적으로부터 오는 시련 등이 있다. 교회가 함께 싸워야 할 시련이 있다. 세 번째는 기독교 박해이다. 초대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교회가 작았고, 예루살렘교회 하나밖에 없었으므로 핍박이 많았다. 우리나라는 80년대 이후로는 박해가 없어졌다. 다른 문제로 변화되고 있다.

 

각 교회에서 개인 간에 겪는 시험, 밖에서 오는 시험 등은 모두 물질 문제와 관련 있다. 돈 앞에서 다 쓰러진다. 많은 것이 있지만 사실은 돈 문제이다. 성경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 핍박을 말하지만 지금 우리는 극복을 했다. 그 다음 개인 문제가 있다. 성경에는 핍박의 문제, 개인 내적의 문제가 있고, 외부에서 오는 이유로, 사회적 요인으로 인해서 교회 전체가 어려워지는 것이 있다. 후자는 대개 잘 생각하지 않지만 가장 위험한 일이다. 우리는 이 것에 대항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런 것에 대항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사태를 당했다.

 

몸에 병을 가져오는 귀신 등, 눈에 보이는 단순한 적은 쉽다. 가정에도 누구나 믿음 있고 성경을 알고 신앙을 알면 누구나 상대할 수 있다. 기독교회를 부수자 하고 쳐들어 오는 것도 너무 쉽다. 적이 빤히 보이기 때문에 함께 대항할 방법을 모색할 수 있다. 그런 공격을 받는가? 실제로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 원수는 그렇게 천하고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가정 등에 역사하는 원수 마귀는 함께 기도하며 이겨 낸다. 이것은 주님이 도와 주신다. 예배와 성도 간의 교제를 통해 이겨 낼 수 있는데 문제는 분별이 어려운 적이다. 사회에서 숨어 들어오는 적들이 있다. 이번 사태와 같은 것이다. 개혁이라 하는데 원수가 탈을 쓰고 광명의 천사처럼 역사한다.

 

사회는, 우리가 당해내야 할 적들은 쉽게 눈에 보여서 대결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주님이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왜 함께 깨어서 기도하자 하셨는가? 세상 사정의 껍질을 가지고 분별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원수 마귀가 그렇게 공격하는 것인데도 숨어 있다. 거짓 선지자가 누구인가? 목사이다.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으로 오심을 반대하여 들어오는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기독교 안에 쏙 들어와서 모르는 것이다. 원수는 이렇게 사회에 숨어들어 활동한다.

 

우리에게 시험이 닥치고 시련이 들어온다. 여기서 이기려면 현실을 파악해 가야 한다. 세계를 교구 삼는 교회라면 전체를 봐야 한다. 이 정도 큰 교회라면 우리의 시련을, 우리에게 오는 모든 시험을, 마귀가 어떤 형태로 나타나 공격할 것을 생각해 모여서 성령 충만해야 한다. 성령이 역사하시고, 신앙이 견고해야 한다. 하나님 보시기에 훌륭한 군인들인데, 조금만 들어와도 다 쓰러지면 세계를 목장 삼기는 커녕 천국은 갈 수 있겠는가? 우리는 새끼 같은 것들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큰 적을 대한다. 잘 보이지 않는 원수이다. 교회 와서 주님의 피로써 살아났다면 자신의 목숨을 주님께 바치자. 욕심 부리지 말자. 너무 이런 사람들이 많다. 세계를 목장 삼고 베뢰아 운동을 하겠다고 하는가? 이런 사람이 많으면 안 된다. 개인적인 생각을 버리자. 하나님의 손이 신이 나서 하시도록 하나님과 박자가 맞아야 한다.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리우는 자니 처음에는 잘 하는 자이지만 가시에 눌린다. 귀신 같은 단순한 눈에 보이는 적이 아니다. 상황 가운데 짜증나고 시험에 들어 교회 와서도 짜증스럽게 보이는 점 등, 노골적으로 원수가 보이지 않는다. 타 종교와 교파에서 우리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내부 사람들이 치고 들어온다. 원수는 우리 눈에 보이기 쉽게 하지 않고 가면을 쓴다. 우리가 시험에 닥칠 때에 교회의 우리가 천국 가기 위한 마지막 플랫폼처럼 올라서서 하늘에 가는 무덤 같은 장소가 되기 원한다. 하나님이 택했다 볼 수 있는 자들이다. 우리가 한 마음만 되면 할 수 있다. 조건이 다 있다. 우리의 마음이 졸렬하고 좁아터져서 하지 못했던 것이 있다. 하나님의 영생에 함께 하려면 어느정도 커야 한다. 물질적, 경제적 문제로 휘청거리지 말자. 우리는 폭풍이 불어도 펭귄들처럼, 서로 바람막이해주다가 돌아가는, 교회가 천국 가려면 다 갈 수 있도록 굳게 뭉쳐져야 한다. 그래야 성락 성락 할 수 있다. 우리는 좁은 눈으로 보지 말고 크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화살에 맞지 않게 다 갖추라는 것이다. 우리의 혈과 육, 눈에 보이는 작은 것이 아니라, 정사 즉 정치, 권세 즉 사회의 청, 어둠의 세상 주관자 즉 우리 세계의 모든 악한 것, 하늘에 있는 악의 영, 사회를 움직여 괴롭힌다. 우리는 모여서 어디서 공격이 오는지 봐야 한다. 서로 경고해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사람만 모이고, 조금만 동원되고, 얻고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여기 와 계시는 것이다. 여기 와서 주님을 만나자. 주님의 약속을 이루려면 모여야 한다. 우리가 모이는 이유가 있다. 온통 한 덩어리가 천국을 침노해 들어갈 수 있도록, 원래 진노의 자식의 성분과 출신과 부족함과 정욕을 가진 우리가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다 잃더라도 천국에 넉넉히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잃는 것이 많더라도 천국에 들어가야 한다. 부활에 넉넉히 줄 서야 한다.

 

우리는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한다. 마귀를 이기기 위해 전신 갑주를 입고,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계시록에 음녀라고 나온다. 또 바빌론, 가증한 것들의 어미가 나온다. 가증한 것이 무엇인가? 세상의 경제를 주무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 교회를 괴롭히고, 신앙을 괴롭히고 빼앗으려 하는 모든 도전들, 순간 빠지게 해서 신앙을 잃게 하는 많은 일, 우리는 교회를 지키고 신앙을 지켜야 한다. 다른 교회가 다 쓰러지더라도 우리 교회는 살아 남자. 완전히 성공하는 우리가 되자. 우리는 세상에서 아무 영광도 없고 빛도 없지만, 원수와 시험과 맞서 싸우고 시험을 이기는 우리가 되자. 주님이 영원히 사랑하는 천국에 오르기 합당한 우리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