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14환언(강석준 집사님 정리)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복음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한복음 1:6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요한복음 1:7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1: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요한복음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요한복음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한복음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요한복음 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한복음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한복음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당부의 말
내가 요즘 아주 힘이 없다. 지난주도 15분 먼저 끝났는데, 너무 힘들었다.
나는 설교하는 도중에 데려가주시길 기도했다. 그래서, 이번에 그런줄 알았을 정도로 힘들었다.
그래서 지난주에 침례요한이라고 말해야 했는데, 사도요한이라고 말한 것을 정정해 주길 바란다.
말씀
요한복음1장에 왜 갑자가 침례 요한에 대해서 나오는가.
그는 빛이 아니요, 그 빛에 대하여 증거하는 자다.
성경 전체를 본래 다 하나님 말씀이라고 본다.
그런데, 하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인가, 아니면 천사들에 의해 전달된 말씀인가.
성경에는 종의 영을 받은 자들과 양자의 영을 받은 자들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다.
종의 영을 받은 자도 복받는 것 똑같다.
종들도 수고하고, 칭찬받고 상을 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 아니라, 천사들을 통해 말씀을 들었다. 그러므로 자녀의 영광을 누리지 못한다.
이것을 섣불리 지나가면 안된다.
아들의 영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지만, 종의 영을 받은 자들은 주여, 주여 할 뿐이다.
이제까지 이스라엘이 수천년동안 모세와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러나,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 천사들을 통해서 전한 것을 들은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예수가 나타나셔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데, 자기가 알던 것과 꼬인다.
이제까지 모세와 선지자를 통해 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데, 혼돈이 온다.
요한복음1:1은 영원전부터 자존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을 구분짓기 위해서, 침례 요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빛이요, 생명이다. 그 빛은 사람의 속까지 꿰뚫어 들어간다. 그 빛이 들어가면 사람에게 어두움이 없어진다. 그 실상을 실감해야 한다.
그런데, 이 빛을 전하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요한이다. 그는 그 빛이 아니요, 그 빛에 대하여 증거하는 자다.
요한은 율법과 선지자의 마침이 되는 사람이다.
곧 이제까지 너희가 들어온 것은 창조사, 종교사, 이스라엘 건국사를 엮어서 들은 것이다. 이것은 요한으로 마친 것이다.
요한은 이 빛이 아니요, 빛에 대하여 증거하는 자다.
사람들이 요한에게 네가 그리스도냐 물을 때, 요한은 자기에 대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 하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는 왕이 오시는 것을 미리 전하여, 왕이 오실 길을 여는 자라는 말이다.
우리나라 식으로는 “쉬이 쉬이 상감마마 행차시요”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요한이 나에 대해 증거하였는데, 나는 사람의 증거를 받지 않는다고 하셨다.
예수에 대해 증거하시는 이는 아버지의 말씀과 성령과 자기 자신이라고 하셨다.
요한의 증거는 대낮의 등불같은 것이다.
대낮에 등불이 무슨 효력이 있겠는가.
그렇게 율법과 복음의 차이가 크다.
여러분이 이것을 듣고만 있지 말고, 그 안에 들어와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나의 증거는 참되니, 아버지가 나를 증거하시고, 성령이 나를 증거하신다고 하시고,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성령을 보내리니, 그가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하셨다.
예수를 증거하시는 이가 있으니,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성령이 증거하신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의 말을 알게 하고, 생각나게 하고, 깨닫게 한다. 그가 말씀에 대한 스승이 될 것이다.
예수께서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하시며, 성령이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가르쳐주실 것을 말씀하셨다.
이제까지 육신의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만 알았는데, 이제는 영에 대해서 알게 될 것이라 하셨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죄요, 의에 대해서는 예수만이 의인이시요, 심판에 대해서는 마귀가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 율법과 선지자와 예수를 구분해야 한다.
정신 바짝 차리라.
성락교회는 베뢰아운동을 하는 교회다.
운동이라기 보다는 가르키고, 배우는 것이다.
아카데미라는 것은 배우고, 가르치고, 실천하는 것이다.
유럽이나 아프리카를 가면 대학나왔느냐보다는 아카데미가 더 실제적이다.
배우고, 실천하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베뢰아를 하겠다고 하면서, 무얼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죽어도, 이유를 알고 죽어야 하고, 맞아도 알고 맞아야 할 것이가.
오늘 우리가 왜 핍박을 받는지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가 내게 주신 말씀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더니, 세상이 저희를 미워한다고 하였다.
그저 성락교회에 왔으니, 은혜받고 아멘 아멘 하지만, 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 왜 자기가 핍박받아야지 할 자들도 있다.
내가 멀쩡이 살아있는데도 배신하는데, 오죽 하겠는가.
지금도 교회에서 중립이라는 사람들이 있다.
목사님이 양보 좀 하시면 교회가 편안해질텐데 이런 사람도 있다.
그런 중립이 무서운 것이다.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가시면서, 십자가에 죽으실 것과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말씀하셨다.
이 때 베드로가 그리하지 마소서하고 예수를 위로했다.
누가 죽겠다고 하면, 만류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세상에서는 죽겠다고 하는 사람도 만류하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그런 말을 한다.
베드로도 그 말씀을 듣고, 위로하느라고 말한 것이다.
이는 인간의 일반적인 성품이다.
이 때 예수께서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셨다.
뒤를 보는 사람이 없다. 뒤로 가라는 것은 보지 않겠다고 하시는 것이다.
사단은 하나님의 원수를 말한다.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미 사단은 하늘에서 심판을 받은 자다.
그래서 음부로 쫓겨내려온 자다.
이 상황에서 베드로가 무얼 잘못했는가.
당연히 자기 존경하는 스승이 죽으리라 한 것을 인간적으로 위로하고, 만류한 것 뿐이다.
인간적으로는 그 말이 당연하다.
인간적으로는 죽겠다는 사람 만류하는 것이 당연하고, 최고의 동정이요, 사랑을 베푸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왜 사단아 물러가라고 하셨을까.
그에 대해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므로 나를 넘어지게 한다고 하셨다.
이와같이 신앙이 조금만 기울면 사단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수제자로 그렇게 따라다녔어도, 순간적으로 사단의 일을 하는 것이다.
진리는 이 말씀을 받느냐 안받느냐 하는 것이다. 안받으면 사단이 되고, 받으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가 되는 것이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나의 참 제자가 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러면 이루리라 하셨다.
여러분이 중립이라고 한다면 그런 것이다.
가룟 유다는 중립이다.
예수 앞에서는 예수를 따르고, 제사장앞에서는 그들과 타협한다.
중립이 그렇게 무섭다.
마귀가 이미 가룟 유다에게 생각을 집어넣었다.
가룟 유다가 입맞출 때, 그가 나쁜 사람인줄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는가, 사단의 편에서 생각하는가 하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하나는 예수편에 서고, 하나는 비방했다.
그러니까, 하나는 낙원에 들어가고, 하나는 멸망하는 것이다.
엘리야도 백성들에게 너희가 왜 우물쭈물하느냐, 하나님인지, 바알인지 택하라 하였다.
중립이 그럴듯하지만, 그것보다 더 악한 것이 없다.
이 사람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 사람들이 무슨 베뢰아운동을 하겠는가.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장로님들에게 베뢰아가 무엇인지 물으라.
베뢰아를 위해 왜 자기가 목숨을 바쳐야 하는지 이유를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내가 왜 베뢰아, 베뢰아 하는가.
베뢰아는 아카데미를 말한다. 가르치고, 듣고 실천하는 것이다.
베뢰아는 아카데미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베뢰아 아카데미라고 한다.
아카데미는 가르치고,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다.
무엇을 배우는가.
베뢰아는 하나님의 의도를 배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도는 뜻 의, 그 뜻을 한장의 그림으로 보는 것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가.
하나님을 눈이나 과학으로 볼 수 없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나타나신 분이 예수시다.
예수가 하나님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여주는 그림이요, 그 실상이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예수를 제대로 알자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다.
우리가 사람을 보더라도, 한눈에 그 사람을 다 본다.
단어가 부족해서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림이라고 표현한 것은 한눈에 하나님을 다 볼 수 있다고 하는 의미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도를 공부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의 의도를 알 수 있는가.
요1:1-18까지 무슨 이야기인가.
예수는 태초이전 영원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가 만물을 창조하셨고, 그는 인류를 구원하는 빛이시다.
그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이시다.
예수가 창세이전부터 존재하는 바로 그분이시라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아는 것은 창세이전 영원전부터 계신 이를 아는 것이고, 그 분을 보는 것이고, 그분을 만지는 것이다.
예수는 이천년전에 나타나셨지만, 그분은 영원전부터 계신 분이시다.
우리는 영원전부터 계신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 전에는 아무도 그를 보지 못하고, 천사들이 전해준 말로 인해서 그 그림자만 보았다.
우리는 그림자를 본 것이 아니다.
모세보다 더 큰 자가 침례 요한이라고 했는데, 침례 요한은 사람이 켜서 밝히는 등불과 같다.
오히려 더 초라하다.
그렇게밖에 몰랐던 것을 예수께서 자기를 직접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일을 하셨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창조의 일을 마치시고 쉬신 것을 기념한다.
우리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을 믿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죽음이 없으시다.
하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사,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다.
구약시대에는 모형으로만 알았던 하나님을 직접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음식점에 가면, 모형으로 만든 음식이 있다. 먹음직스럽지만 돈주고 먹어야 내것이 된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나님을 직접 보여주셨고, 이제는 너희가 값없이 사라고 하셨다.
성령으로 하나님을 네 소유로 삼으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믿음은 예수께서 유대땅에 오셨던 그 실상보다 더 큰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실상이다.
지금 예수의 말씀은 모세보다 더 이전, 영원전에 계신 그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씀이다.
지금 우리가 그를 보고 듣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보통 일이 아니다.
영원전에 계신 하나님을 누가 볼 수 있는가.
어떻게 봤냐. 내 안에 계시다. 그것을 어떻게 믿는가.
너도 내 말을 들으면 네 안에도 계실 것이다.
이렇게 담력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왜 어려운가.
한국에 교파가 160개가 넘는다.
내가 부흥회에 다니면서 62개 교파를 다녔다.
그런데, 장로교는 감리교를 배척하고, 감리교는 장로교를 배척한다.
다 같은 기독교인데, 왜 장로교는 우기고 장로교 하려고 하고 감리교는 왜 우기고 감리교 하려고 하는가.
우리도 성락교회 독립교회라는 본질이 있다.
쌍둥이라도 생각은 똑같지 않고, 다툴 수도 있다.
생각과 사상이 똑같은 사람 손들어보라. 그렇다면 싸울 일이 없다.
결혼할 때는 얼굴보고 하지만, 결혼 생활중에 얼마나 싸우는가.
다 다르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성락교회라는 개성이 있다.
성락교회는 독립침례교회다.
하나님과 우리 교회 사이에 어떤 누가 중간에 끼여있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개혁파들은 우리를 향해 맹종파라고 한다.
내가 여러분에게 하나님께 복종하라고 했지, 언제 내게 복종하라고 했는가.
세상에 그런 천박한 것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독립침례교회라는 개성이 있다.
왜 우리 교회만 혼자 독립교회로 나갔는가.
교회는 예수의 몸이요, 예수는 교회의 머리시다.
그래서 머리와 몸이 붙어있듯이, 중간에 절대 이간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교리와 장정이 중간에서 이간한다.
우리는 다 베뢰아 아카데미를 한다.
베뢰아아카데미는 하나님의 의도를 가르친다.
성경이 주장하면 우리는 그대로 믿어야하고, 성경이 부정하면 우리도 그대로 부정하는 것이다.
성경이 명하시면 목숨 내놓고 순종하고, 성경이 부정하면 천하를 준대도 거절하는 것이다.
하늘에 속한 자는 그렇게 한다.
한국에 160여개의 교단이 있다.
교회 하나가 교단 된 곳도 있다.
장로교라고 서로 가까운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왜 다른교파와 다른가.
현대신학은 창세기1장부터 11장, 노아홍수 때까지를 신화로 본다.
한국역사가 5천년이라고 하면서 단군에 대해서 배운다.
그런데 단군이야기는 신화에서 나온다.
단군이 신과 곰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역사학자들은 호랑이부족과 곰부족이라는 부족사이에서 호랑이부족은 도태되고 곰부족에서 나라가 세워졌다고 한다.
이것도 잘 알지 못하니까 신화로 되어있다.
신화로 쭉 나가다가, 삼국시대가 나온다.
우리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사람도 아니고, 고려에서 이어진다.
과거 신화가 수천년 지나고 역사적으로 어느정도 이게 우리나라다 한 것은 고려 때부터다.
그래서, 우리나라를 코리아라고 한다.
그나마 역사적인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은 조선역사밖에 없다.
실제 역사는 천오백년밖에 없는데, 신화까지 포함해서 5천년이라고 한다.
유럽사람들은 우리처럼 대충하지 않고, 아주 분명하게 한다.
그래서 성경도 창세기에서 노아의 홍수까지는 신화로 본다.
성경은 아브라함 가족 이야기다.
그것도 아브라함 아들중에서도 이삭, 이삭의 아들중에서도 야곱 이렇게 이어진다.
아브라함이 받은 하나님의 약속을 자손들이 누리고 있는 이야기가 성경이다.
복잡할 것 없다. 여러 왕 이야기가 있지만, 아브라함부터, 이스라엘, 예수까지다.
아브라함부터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표현된다.
이렇게 근거가 확실하다.
그래서 그 이야기는 실제로 믿는데, 그 이전 창세기부터 바벨탑까지는 있지만 신화로 여긴다.
나는 이것을 반대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 앞에 나타나신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 나타나시기 전에 누구도 하나님을 본 적이 없었다.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사 성령을 보내주셨다.
우리에게 성령이 와 계시지 않는가.
성령을 받았는데도, 무엇이 부족하다고 한다면 더 기도하라.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그 때부터 우리 신앙이 성장하는 것이다.
우리 베뢰아는 절대로 창세기를 신화로 여기지 않고, 그대로 사실로 여긴다.
산봉우리에 올라가면 동서남북이 보인다.
눈 밝은 사람은 50-60리까지 훤히 보인다. 동쪽을 보던 사람이 서쪽을 보면 똑같은 시야가 나온다.
동쪽만 다 보이고, 서쪽이 안보이지 않는다.
이와같이 선지자들은 미래를 보듯이 모세는 과거를 본 자다.
조상 야곱도 보고, 이삭도 보고, 아브라함도 보고, 바벨탑도 보고, 노아의 홍수도 보고 아담과 하와도 보았다.
미래를 보듯 과거를 보았다. 시야가 똑같다.
미래의 예언자들이 오리라, 오리라 하다가 마지막에 침례 요한이 오리라 한 분이 이 분이라고 지적했다.
이제까지 선지자들이 쭈욱 말해온 분이 바로 예수라 말했다.
예수 이전을 쭈욱 올라가면, 그 이전을 본다. 그래서 우주 창조 이전을 보았다.
인간의 한계가 희미해서 그렇지 미래를 보듯, 똑같이 과거를 보았다.
그저 그림자를 봐서 해석하지 못하고 본 것을 그대로 기록했다.
인간의 범죄, 타락한 이야기, 저주받고 심판받은 이야기.
예수가 그 시대에 나타나셨지만, 그는 본래 영원전부터 계신 분이시다.
시작은 아무도 본 자가 없다.
알파는 아무도 보지 못했지만, 바로 그분이 끝이요, 마지막이요, 오메가다.
예수는 역사적 존재시다.
인간의 기록이 있을 때부터 출발한 분이시다.
그러나 그 전부터 아브라함에 대한 역사가 있다. 그 이전도 있다.
그것은 신화가 아니고 사실이다.
창1-11장까지는 베뢰아에서만 하는 것이다.
일반 신학에서는 창세기 못배운다.
그들은 그것을 신화로 여기고, 읽는 자들이 알아서 이해하도록 한다.
철학적인 제목으로 말하지, 실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에 대해 설교를 해도 그저 사람의 생각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화로 돌리느냐, 실상으로 돌리느냐 하는 것이다.
베뢰아는 하나님의 말씀은 실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약의 모양이 여러가지다. 물에 들어가면 바로 녹는 것이 있고, 물에 들어가 몇분 지나면 녹는 것이 있다.
몇분후에 녹을 것인지에 따라 모양을 다르게 한다.
목이 아픈 사람은 목에서 녹게 하고, 조금 더 깊은 곳이 아픈 사람은 좀 더 들어가서 녹게 한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녹아들어간다.
성령받은 사람이라면 하나님 말씀이 녹아들어가고 있다.
성령이 오시면 내 말을 알게하고, 생각나게 하고, 깨닫게 하리라 하셨다.
지금 우리가 그 녹아들어가는 말씀으로 영감을 얻었다.
예수님을 만지고, 듣고, 하는 것이 실제 체험이다.
다른 사람은 못봤으니까 비난하지만, 나는 그것에 상관하지 않는다. 예수가 내 안에 계신 것이 실상이다.
기독교가 신화로 시작했다고 솔직하게 그렇게 말하는 자도 있다.
하나님은 조물주시다 해놓고, 창세기는 신화로 하는 것이다.
감람산에 3천년된 올리브 나무가 있다.
그런데, 거기서 해마다 새싹이 나와서 열매 맺는다.
열매 맺는 나무중 그렇게 오래 산 나무가 없다.
정말 우리 신앙이 오래가도 변함이 없이 그렇게 새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려면 알아야 한다.
베뢰아는 하나님의 의도다.
우리는 신화 때문에 목숨을 걸지 않는다.
에덴에서 범죄한 죄 때문에 예수께서 죽으셨는데, 예수께서 신화 때문에 죽으셨겠는가.
창세기를 신화로 여기니까, 창세기 설교 많이 하면 이단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아주 중요한 것이다.
지금 올리브가 열매맺어도 삼천년전에 심은 나무다.
베뢰아 하나님의 의도는 신화가 아니고, 실상이다. 진리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이름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짐 같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의 뜻이 이루어지어야 한다.
그것이 진리다.
유일하신 하나님은 아버지시다.
아버지는 둘이 아닌 한분이시다.
그래서 그를 공의라고 한다.
의가 둘이 아니라, 하나다.
오직 아버지의 의밖에 없다.
아버지가 공의니까, 아버지의 뜻이시면 지켜야 의가 되고, 지키지 않으면 불의가 된다.
믿음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지켰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도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침례를 받으신다.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죽기 위해 보내심을 받았으므로 그는 죽어야 한다. 거역하면 사단이다.
주여, 주여 해도, 수제자라도 해도 인간적으로 만류하면 사단이다.
인간적으로 불합리하고, 불리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한다.
나는 60년대부터 다니면서 보면서 이러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때 신학교 가기를 싫어했다. 신학교 나온 사람들이 이상한 소리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독립침례교회를 세운 것이다.
그리고, 일만지도자를 만들기 위해서 삼만명이 모일 수 있도록, 일만명 수용할 수 있는 예배당을 지었다.
50년을 놓고 기도한 결과 44년만에 센터를 지었다.
성경을 바르게 줄로 세우려니까, 250권의 책 제목이 나왔다.
나는 무식해서 책을 쓸 수 없었다. 그것을 준비하기 위해 대학에 들어가 국문학을 했다.
그래서 지금 내가 300권의 책을 썼다.
아직도 발행되지 않은 것이 십여권있다.
이렇게 사역초기부터 생각했던 것을 이루었다.
이처럼 기도의 응답이 얼마나 기막힌가.
아무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250권의 책을 쓰며, 일만명 예배드릴 센터를 짓는가.
신기하지 않는가.
그분이 내 안에서 역사하신다.
기존신학은 신화를 신앙의 뿌리로 삼는다.
우리는 실상에 우리 신앙을 뿌리두고 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말씀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똑같이 성경에 있지만, 모세와 선지자의 말은 대낮의 등불과 같은 것이요, 주님은 사람의 증거를 받지 않으신다. 이렇게 분명하다.
말씀이 로고스임을 강조하는 것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인격이요, 살아있는 하나님의 실상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 로고스시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은 로고스가 아니라 레마다.
선지자의 말은 소리니까 포네다.
그것은 영과 상관없다.
나는 이것을 알고 목숨을 내놓고 베뢰아 운동 할 수 밖에 없다.
나는 다른 교회들처럼 할 수가 없다.
그들이 보기에 우리가 유별나지만, 우리가 볼 때 그들이 타락한 것이다.
타락한 자와 함께 할 수 없다.
그래서 베뢰아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이다.
내 뒤에도 베뢰아운동하지 않으면 우리 교회는 사단의 종이 될 수밖에 없다.
같이 있어 예수님의 제자지만, 순간에 사단아 물러가라 하셨다.
베뢰아가 무엇인지 이제 알았으니, 여러분 정신부터 신화에 기초를 두지 말라.
과거를 희미하게 모르는 것은 신화속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도를 가르치는 것은 신화에 기초를 두지 않게 하려함이다.
나는 할 수 있다.
너희는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으니, 신화를 두고 말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영원전부터 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하는 자들 되라.
사도 요한이 모세와 선지자들이 말한 마지막인 침례 요한에 대해서 말한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를 낮추는 것이다.
당시로서는 맞아죽을 일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와 선지자들을 하나님처럼 여기는데, 여러분이 그 때 베뢰아 했다면 죽는다.
내가 50년전에 오늘처럼 말했다면 맞아 죽었다.
내가 순서대로 말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신앙이 얼마나 똑바른가, 자부심을 가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