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언베뢰아특강

환언베뢰아특강135(200426)

lks8284 2020. 4. 25. 00:03

200424환언(강석준집사님 정리)

 

요한복음 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한복음 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요한복음 20: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한복음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요한복음 20: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지난주에 귀신들림에 대해 말했었다.

우리가 사는 현실에 병원도 많고, 의학이 첨단을 걷고 있다.

그래서, 의학에 의존하는 믿음이 많다.

모든 사람들이 의학적인 혜택을 많이 받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의사와 약에게 속았다는 고백을 하는 사람이 나온다.

의사와 약이 고의로 사람을 속였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쓰는 사람이 믿었지만, 실망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내신 말씀을 통해 육체라는 물리적인 우리의 일부가 고침을 받는다.

우리는 육체가 있고, , 혼이 있다.

혼은 육체에 속한 것이다.

육체가 지음받을 때, 함께 지음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육체의 수명과 수명이 같다.

육체가 사는 날까지만 살고, 육체가 죽는 날 없어지는 것이 혼이다.

혼은 사람의 정신, 의식, 또 생존의 모든 균형을 말한다.

혼이 없는 것은 바위같은 무생물이고, 태어나고 자라는 것들은 다 혼이 있다.

짐승들도 혼이 있고, 풀들도 혼적인 감각이 있다.

그래서, 농사짓는 사람이 밭에 스피커로 노래를 틀어주면 곡식이 잘 자란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이렇게 모든 것이 감각을 갖고 있다.

사람의 육체에는 육체의 속성이 있다.

수만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속성을 구별하고, 알아주고, 그것들을 이끌어주는 것이 혼이다.

만약 혼이 없으면, 그냥 흙일 뿐이다.

사람은 흙에서 나왔는데, 혼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되는 것이다.

혼이 있기 때문에 감각이 있고, 의식이 있고, 정신이 있고, 분별력이 있다.

아담이전의 영이 없던 사람들도 혼이 있기 때문에 문명이 있었다.

창세기에 보면 그들은 문명이 있는 자라고 나온다.

오늘날 성령을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과 별 차이가 없어보인다.

성령받았다고, 머리가 더 좋아지는 것이 아니다.

성령받으면 입시를 더 잘보는 줄 알고 믿었다가, 떨어질 수도 있다.

성령이 있는지는 본인만 아는 것이지,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다.

하나님께서 영을 부어주셨는데, 영이 있는지, 없는지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삼았다고 나와있다.

외모로는 아무런 구분이 되지 않는다.

영이 혼에게 들어가, 혼과 함께하면 혼이 영에 의해서 항구적인 존재가 된다.

이것이 영을 받은 생령의 사람에게 나타난 특혜다.

그러나, 영이 없던 네피림은 혼이 항구적인 가치가 없기 때문에 홍수로 죽으면 다 끝나버리는 것이다.

짐승의 혼과 같다.

소를 잡고, 양을 잡아도, 사람들이 거기에 대한 후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을 죽인다면, 두려움이 몰려온다.

똑같은 생물인데도, 소나 돼지, 물고기가 죽는 것은 죽은 후에 그것들이 보복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사람은 두렵게 여긴다.

그래서, 짐승이 죽은 것으로는 놀라지 않지만, 동네에서 사람이 죽었다고 하면, 밤길이 무섭다.

사람에게는 영이 있기 때문이다.

영이 있기 때문에, 육체가 죽었어도, 혼이 살아있다.

그러니까, 혼이 가지고 있던, 어느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죽은 사람 이야기를 하면 무서워한다.

영이 사람의 혼에 함께하여 혼이 영으로 인해 영혼이 된다.

영이 들어오기 전에는 혼이 오직 육체를 다스렸지만, 영이 들어온 이후로는 영의 다스림을 얻는다.

혼이 영을 의지하는 것이다.

기독교신자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 영혼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위하여 신앙생활하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생활하는 것, 성경을 읽고, 순종하고, 기도하는 것은 영혼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영혼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육체는 믿는 자나 안믿는 자나 수명이 다하면 사라진다.

그러나, 영혼은 항상 있다.

육체가 죽었어도,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가치가 죽은 것이지, 불가시적인 영혼은 완벽히 존재한다.

이 영혼을 위해서, 우리가 예수의 보혈을 믿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요, 소망을 갖는 것이다.

이 다음에 하나님을 뵙는 것은 우리 영혼이 하나님을 뵙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심같이, 사람의 영혼은 홀연히 변화된다.

예수의 부활은 회복된 것이지만, 사람의 부활은 홀연히 변화된다.

원래 살았던 육체가 절름발이일수도 있고, 병들었을 수도 있지만, 부활 때는 영이 몸이 된다.

혼이 흙으로 된 몸을 가지고 있다가, 흙은 흙으로 돌아갔지만, 부활 때는 영이 몸이 되므로, 그 몸에 가지고 있던 모든 속성을 그대로 함께 이어받는다.

그래서, 부활 때는 부활한 몸으로 홀연히 변화된다.

옛날에 없어진 몸이 다시 생긴다.

물론 부활한 몸에는 사람의 피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영혼이다.

영혼이 부활해서, 하나님을 뵙는다.

예수께서 부활하시기 전에는 시공간의 제한을 받았지만, 부활하신 후에는 마가의 다락방에 벽을 통과하여 들어오신다.

제자들이 이를 보고, 환상인줄 알았다.

부활하신 몸은 시공간을 능히 초월한다.

우리가 홀연히 변화되어, 몸이 부활하면, 가시적인 존재인데도,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예수처럼 구름타고 하늘에 갈 수도 있고, 하늘에서 얼마든지 많은 천사앞에서 특권을 가진 자로 나타날 수 있다.

천사들은 지금은 우리보다 낫다.

그들은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하늘과 이 땅을 왕래한다.

그러나, 인간은 육체 때문에 시공간의 제한을 받는다.

이동하려고 해도 시간이 걸리고, 벽을 통과할 수도 없다.

같은 영적 존재이지만, 인간은 육체라는 것 때문에 천사들만 못한다.

예수는 본래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만,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천사보다 못한 사람이 되셨다.

천사는 어떤 형상을 가졌더라도 모든 것을 초월하지만, 사람은 초월하지 못한다.

그러나, 부활하면 초월한다.

그렇게 하늘에 가면, 하늘의 천사들은 몸(육체)이 없다.

천사들은 다 영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늘에서 몸을 가졌다.

그리스도와 함께 몸을 가졌기 때문에 천사들이 부러워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데리고 오신 인간들은 예수와 똑같은 몸을 가지고, 같이 심판하고, 같이 영광을 받기 때문이다.

모든 천사들이 하늘에 가서는 한단계 낮다.

이 땅에서는 천사들이 사람들보다 우월하다.

구약시대에는 천사를 자기들의 구원자로 보았기 때문에, 천사를 하나님으로 모셨다.

믿지 않는 자들은 죽은 조상을 하나님으로 여겼지만, 이스라엘은 천사를 자기 하나님으로 여겼다.

여호와라 이름한 천사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였다.

그런데, 그 천사는 이 땅에서는 주관자가 되어서, 애굽에서 홍해를 건너 광야로 옮기고, 광야에서 요단강을 건너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이 땅에서의 리더는 될 수 있다.

그러나, 부활한 이후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몸으로 부활한 자들만 못하다.

그 때는 모든 천군천사들이 받들고, 옹위한다.

천사는 구원받은 아브라함 후손들을 도우라고 보내심을 받은 자다.

계시록에도 성도의 기도를 천사들이 쟁반에 받아 하나님께 가지고 가서 상달시키고, 응답을 받아가지고 와서, 그 소식을 알려주기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렇게 믿는 자와 천사와의 차이가 하늘에서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나중에는 믿는 자가 천사도 심판을 한다고 하였다.

이런 영광을 받을 자들이 이 땅에서 함부로 살면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사람은 영 때문에, 아담 이전의 인류와 이후의 인류가 엄청난 차이가 있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 물리적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인간의 한계는 있다.

믿는 자나 안믿는 자나 지적인 능력이라든지, 철학적인 능력이 다르지 않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영이 심판을 받아 지옥에 들어갈 것을 면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다 담당하셔고 죽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한다.

한국사람이 아는 것은 본 것을 기억하는 정도이지만, 성경에 안다는 뜻은 체험하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알았다는 말은 결혼했다는 말이다.

이처럼 완전히 그를 체험하여 알았다는 것이다.

영이 있기 때문에 혼은 항구적인 가치를 얻었다.

그런데 영이 죽었기 때문에, 영은 지옥에 들어간다.

혼이 영으로 말미암아 지옥까지 가야 한다.

영이 없었으면, 육체와 함께 없어지면 되는데, 영 때문에 혼이 지옥까지 끌려간다.

이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구원받지 못한 영혼은 영이 없는 사람보다 더 불행스럽다.

그러나, 구원받은 영혼은 참으로 행복하다.

영이 몸으로 부활하여, 하늘로 들어갈 때, 육체를 의지하던 혼이 영이 몸이 되므로, 영원한 가치와 몸으로 회복된다.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영혼을 모르니까 망한다.

과거 네피림처럼 영이 책임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영이 불신앙의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불행하다.

믿는 사람은 자기 영이 타락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영의 생각은 하늘에서 오는 뜻만을 받아들인다.

혼은 육체에서 오는 것들만 받아들인다.

이 둘이 마주치고 있다.

이 때, 영이 혼을 인도할 수 있는 강한 힘이 없으면 혼에게 끌려간다.

자기 영이 혼에게 끌려가는가, 아니면 혼이 영에게 끌려가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 영적 생활은 혼이 영에게 끌려서 인도받아, 영의 소원대로 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타락하면, 영이 혼을 견인할 능력이 없다.

그래서, 오히려 혼이 영의 소원을 무시하고, 육체의 욕구대로 가다가 멸망한다.

이 세상사람들은 멸망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최후의 심판은 반드시 온다.

육체는 누구나 태어나면 죽는다.

그러나, 영의 죽음은 없어지는 죽음이 아니라, 형벌로 받는다.

우리는 이 말을 믿어야 한다.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라고 하지만, 영은 반드시 심판을 받는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영이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해 믿는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영이 심판을 받지 않고,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

침례를 의식으로 여기면 종교인이 된다.

침례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나서, 명하셨다.

부활하신 후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다. 그는 심판할 권세, 만왕의 왕의 권세를 얻으시고, 그 입으로 침례를 받으라 명하셨다.

부활하시기 전에는 그가 이 세상에 속한 일을 감당하셔야 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셔야 했지만, 부활하신 이후에는 이미 다 완성하신 후에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시기 전의 말씀과 부활하신 후의 말씀은 차이가 엄청나다.

부활하시기 전에는 여러가지 계명이 있는데, 부활하신 후에는 침례를 받으라, 침례를 주라, 성령을 받으라 하신다.

침례는 의식이 아니라, 주님의 계명이다.

침례는 장사지내는 것, 물속에 완전히 잠기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침례를 받으므로, 우리 육체의 모든 소욕은 다 장사지낸 것이다.

그리고, 물 위로 올라올 때는 성령으로 올라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이름으로 침례받는다, 성령으로 침례받는다 하는 것이다.

 

물 들어갈 때와 올라갈 때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지구를 중심으로 보면, 아랫물에서 뭍이 드러났다.

육지는 바다에서 올라온 뭍들이다.

웃물은 자꾸 팽창해서, 우주의 벽을 만들었다.

하늘은 영이다. 하나님의 본체다.

그 안에 우주라는 음부가 있다.

학명으로는 우주라 하고, 영적으로는 음부라 한다.

그 물방울 위의 수면은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더라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신은 프뉴마다. 성령은 뒤에 거룩하다는 말을 붙여서, 프뉴마 하기온이라고 한다.

프뉴마는 영이요, 바람이요, 불꽃이라는 뜻이다.

우주의 벽을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더라는 말은 천사들이 운행한다는 말이다.

에덴동산에서도 아담이 쫓겨나고, 화염검이 돌면서 지키듯이 큰 우주를 지킨다.

하나님의 본체와 우주와 사이는 아주 얇은 벽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체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하고, 우주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추지 않는 흑암이 가득하다.

아주 얇지만, 한쪽은 아주 깜깜한 흑암이다.

이 흑암에서 비유로 맛보게 한 것이 피조된 빛이다.

예수께서 내가 빛으로 왔다 하실 때, 피조된 빛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독사라는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빛으로 나타난 것이다.

우주안에는 하늘의 비유로 피조된 빛을 보게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과 피조된 빛은 비교할 수 없다.

침례 요한이 진리를 말했지만, 태양 앞의 촛불과 같다고 하였다.

이와같이 우주 안에 있는 빛은 그나마 우주안에서 크게 환영받을 영광이지만, 흑암속에 있는 빛이다.

이 빛을 낮과 밤으로 구분하엿다.

낮도 빛이고, 밤도 빛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빛은 태양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본체라 하였다.

하나님의 영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본체라는 말이다.

우리 눈에 나타나신 그 분은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 나타나신 것이다.

예수 안과 밖이 무엇이 다른가.

예수 바깥은 전부 악한 자다.

예수 안에는 하나님의 진리와 영광이 충만하다.

그러나, 예수 바깥에는 예수를 죽이려는 자로 충만하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자기 안의 문제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예수 바깥에 있는 문제로 죽으신다.

예수 바깥에는 사망권세, 살인, 죄악, 저주, 불행으로 충만하다.

그러나, 예수 안에는 하나님의 본체이시므로, 영광이 충만하시다.

병은 어둠의 권세다.

예수 안에 들어와서, 빛으로 은혜를 받아 변화받으면, 어둠의 권세를 능히 이긴다.

음부의 권세가 너를 절대로 이기지 못한다.

우주 바깥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본체다.

웃물 벽안은 사망이 주장하고, 바깥은 하나님의 영광이 주장한다.

침례받는 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내가 흑암에 들어와 죽었다는 것을 시인하고, 물위로 올라올 때는 믿음으로 우주 벽을 뚫고 영생으로 침입한 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침례 요한 때까지 율법과 예언이 끝나지만, 그 이후부터는 천국은 침노를 당한다.

흑암은 사망권세로 가득하지만, 희미하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율법이 있다.

그러나, 율법은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죄와 사망, 율법을 다 장사지내고, 물위로 올라올 때는 우주의 수면을 뚫고 초월하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의 천사가 매일 하나님을 뵙는다고 하였다.

천사들이 우주 벽을 뚫고, 들어와서 성도들의 사정을 보고, 하나님께 아뢴다.

천사들은 우주 벽을 왕래할 권한이 있다.

마귀도 천사이지만, 타락하여 영이 범죄하였으므로, 우주 벽을 초월할 수 없다.

우주안에 있는 것은 아무리 권세가 많아도 결코 우주 벽을 초월하여 하나님께 갈 수 없다.

우리를 돕는 천사들은 우리의 기도를 가지고 우주벽을 통과하여 왕래한다.

이와같이 우리가 침례받아 물위로 올라온 순간에, 우주벽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얻었다.

죄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천사와 같이 마음껏 우주에서 초월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마음껏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기도해도 그저 주문을 외우는 것과 같다.

어떤 종교는 나무아미타불하면서, 어떤 주문을 계속 외운다.

중언부언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우리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서 다 아신다.

나는 천사와 같이 날마다 주님을 뵐 수 있는 자격이 있다.

그러나, 이것을 믿지 않는다.

이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침례가 그렇게 중요하다.

믿고, 침례받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가 침례를 믿음으로 보지않고, 그저 믿기만 하면된다고 할 뿐이다.

우주의 벽은 지구로부터 147억광년이 떨어져있다고 한다.

왕복하면 300억광년이다.

이 세상 빛이 그렇게 속도가 빠르지만, 그 속도로 하나님께 상달한다면 300억년이 넘게 걸릴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이름 예수 이름으로 기도한다. 그 이름은 제한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한 즉시 하나님께서 들으신 줄 알고, 들으신 즉시 받은 줄 안다.

내가 믿음으로 기도한 것은 이미 받은 것이다.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믿음없이 하니까, 여전히 종교인으로 고행만 하고 있다.

구원받지 못한 영과 구원받은 영의 차이가 그렇다.

구원받지 못한 영은 하늘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힘든지, 약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다.

왜 부자를 말하셨는가.

이 세상은 돈이면 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세상은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주라는 흑암속에 어떤 답도 없다.

살려고 하는 자에게 생명을 줄 수 없고, 행복을 원하는 자에게 행복을 줄 수 없다.

항구적이지 않다.

모든 것이 답을 찾아 헤매는 것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만드셨을 때는 거기에는 답이 없는 곳으로 만든 것이다.

감옥에 갇힌 사람과 똑같다.

그래서, 돈으로 권력을 가져도 답이 아니고, 돈으로 목숨을 사려고 해도 답이 아니다.

이 세상 부자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지만, 답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 이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

아기들이 자기 아빠 방에 마음껏 들어가듯, 하나님의 자녀는 아버지의 것을 유업으로 받을 상속자다.

하나님과 똑같은 권리를 가졌다.

엄청난 권세를 가진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기도하면 아버지가 영광받으시고, 내가 이를 시행한다고 하셨다.

이렇게 믿음이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영이 믿음으로만 살았다는 증거를 받고, 믿음이 없으면, 영이 살았다는 증거를 받을 수 없다.

우리는 영이 살았고, 혼은 영에 의해서 항구적인 자격을 얻었다.

믿는 사람의 안에는 빛으로 꽉 차 있지만, 몸 바깥에는 살인과 악독과 저주가 가득하다.

나는 밝은 빛을 가지고 어둠을 헤쳐가는 것이다.

우리 가는 곳마다 빛이 비추어주어 간다.

우리의 영적생활은 믿음으로 환경자체가 다 밝아지는 것이 아니다.

환경은 저주와 살인과 불행이 있다.

오직 예수 이름을 모시고 있는 자기 영만이 밝은 빛이 있다.

그래서, 몸안에 있는 죄와 몸 바깥에 있는 죄가 다르다.

 

지난번에 우리 인격의 구조를 말했다.

의식과 감성으로 나뉘고, 가운데 겹치는 부분에 의지가 있다.

병은 의지속에 있다.

나는 병자라는 관념속에 병이 있다.

나는 가난하다는 것도 자기 의지다.

자기가 그것이 벼슬마냥 가지고 다닌다.

굽히지도 않고, 자기 의지로 자기는 가난하다고, 자기는 병들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병이다.

모든 병이 이 의지에 머문다.

의식과 감성을 분리시키면 겹치는 의지가 없어진다.

그러면 귀신이 거할 곳이 없다.

그러면 금방 나간다.

평안하라 평안하라 한다.

당신 생각이 당신 생각이 아니고, 당신 마음이 당신 마음이 아니라 한다.

그러면 귀신이 분리되어 드러난다.

자기 의지가 계속 붙들고 있으면 아무리 안수하고, 기도해도 낫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딱 분리되면 금방 낫는다.

어떤 사람은 왜 죽은 사람이 살아나지 않느냐고 한다.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다.

육체는 다 죽는다.

엘리야도 죽을 병이 들어 죽었다.

그런데, 나사로는 죽었는데, 잔다고 하신다.

자니까 깨우면 된다.

이것이 흔한 일은 아니다.

예수께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 전하고,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라 하셨다.

예수도 죽은 자를 살렸지만, 베드로도 죽은 자를 살렸다.

지금도 세계 도처에 그런 일들이 있다.

나도 몇건을 봤다.

죽은 자들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낙원에 들어가 있으면, 다시 나올 때는 하늘로 갈 때 뿐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죽을 병이 아니고, 몸이 썩은 내 날지라도 잔다. 자니까 깨우면 된다.

사람의 생각은 죽었고, 누가봐도 물리적으로 죽었지만, 나는 그가 잔다고 믿었기 때문에 살아났다.

그 영이 낙원에 가지않고, 몸을 떠나 잠깐 배회하는 자가 있다. 그를 들어오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더 살게 하시는 것이다.

광시에 있을 때, 나이 40이 넘은 분이 죽었다가 살아났다.

그 때 남편이 참 핍박이 많았다.

나중에 그를 만났는데, 남편이 예수 믿었다고 한다.

죽은 자가 살아나므로, 남편이 믿게 되고, 그 가정에서 주의 종도 나왔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어떤 의무를 맡기셔서 하는지 모르지만, 그가 낙원에 가지 않고, 잠깐 육체바깥에 있을 때, 다시 몸으로 돌아와 살아난 것이다.

이미 예수 안믿는 사람은 소용없다.

나사로를 주님이 사랑하셨다고 나온다.

나사로도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도 나사로를 사랑하셨다.

오늘날은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날 믿음을 가진 자가 없다.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난 자들 보면 굉장히 믿음 있는 자들이다.

성경에 영혼이 들어왔다고 되어있다.

낙원에 가있던 영혼이 돌어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친척이 예수 안믿었는데, 자기 속에서 귀신을 쫓아내니까, 그가 병이 나았다고 주장하는 자가 있다.

그것은 아니다.

백부장의 아들이 병들었을 때, 말씀만 하옵소서 하였다.

 

시편 107:20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

 

백부장의 종이라고 하였는데, 백부장의 아들이다.

어린아이들은 아직 의지가 부모에게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그 아버지의 의지로 인해 병이 나았다.

그러나, 의지가 독립되면 그렇게 되지 않는다.

목사가 용하니까, 고쳐주겠지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믿음이 있어야 한다.

믿음이 있는 아비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면, 그 자녀가 고침을 받는다.

7세미만의 아이들은 아이가 직접 안수받지 않아도, 엄마가 안수받으면 낫는다.

아이의 병은 엄마의 의지속에 있는 것이다.

엄마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면, 아이에게서 병이 낫는다.

해보라.

믿는 자들에게 허락하신 약속이지, 믿지 않는 자들이 아무나 예수 이름 빌려서 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귀신 쫓는 것을 보고, 제사장 아들들이 따라하다가 혼쭐이 나서 도망갔다.

남이 하니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은 연탄가스중독으로 자녀들이 병원에 입원했었다.

그가 공중전화로 연락이 와서, 전화를 통해 귀신을 쫓아냈다.

그랬더니, 그 자녀가 다 나았다.

어떤 사람은 4세 아이가 소아마비였는데 엄마에게서 귀신을 쫓으니 아이가 일어났다.

우리는 귀신이 갈 곳이 없게 만들어야 한다.

귀신이 물없는 곳을 다니며 쉴 곳을 구하더라고 하였다.

귀신이 믿음이 없는 곳을 찾아다녔는데, 다 믿음이 있으니 견딜 수 없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은혜받고, 귀신쫓아낸 후에 귀신이다시 들어오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귀신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통감하지 않고, 당연히 여긴다.

귀신 쫓아내고도, 별 것 아니라고 한다.

겸손한체 하면서, 괜찮다고 하니까, 고통을 당한다.

이 세상 어떤 것도 답이 없지만, 오직 예수 이름만이 답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문앞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보고,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예수 이름으로 걸으라 하였다.

예수 이름만이 답이다.

이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하늘은 하나님의 본체다.

하늘은 하나님의 뜻이 영원전부터 작정된 곳이다.

예수 이름은 죄에서 구원이라는 뜻이다.

율법은 우리 원죄를 제거하지 못한다.

자범죄에 대해서만 짐승의 피로 사함받았다.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주는 사망권세로 가득한 곳이다.

어둠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셨다.

우주 안에는 아무런 답이 없다.

억만가지 문제가 있어도 단 한가지의 답도 없다.

세상 진리는 이치가 맞으면 진리라고 한다.

성경은 세상이치를 진리라고 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용납하지 않는 하나님의 뜻, 능력을 진리라고 한다.

세상에서는 합리적인 이치를 진리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진리는 불합리하다.

어떻게 죽은 자가 살아나는가.

우리는 진리를 믿음으로 자유한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명하신 것이 무엇인가.

평강이 있을지어다.

우리에게 평안과 건강이 있는 것은 주님의 명령이다.

그리고 성령을 받으라.

자신이 완전히 성령을 체험해야 한다.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침례를 주라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의식이 아니라, 그대로 순종하라.

 

자기 속에 병이 의지가 되어있는 사람. 이것부터 깨버리라.

내 생각이 아니고, 귀신의 생각이다.

내게서 떠나라.

오히려 그 의지속에 주의 말씀이 자리잡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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