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No14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240331)

lks8284 2024. 3. 31. 17:50

240331부활주일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김성현감독(강석준집사님 정리)

 

마가복음 16: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마가복음 16: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마가복음 16: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마가복음 16:4 눈을 들어 본즉 돌이 벌써 굴려졌으니 그 돌이 심히 크더라

마가복음 16: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마가복음 16: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마가복음 16: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마가복음 16:8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우리는 소망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 앞에 있는 것을 얻기 위해, 오늘 그 꿈을 가지고 오늘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가 바라고 있는 꿈은 바로 부활이다.

부활을 얻기 위해 우리는 그외의 모든 것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투쟁하는 마음으로 달려가고 있다.

그래서, 많은 인내를 하고, 유혹이 오고 시련이 있어도, 굽히지 않고 달려간다.

이것은 기차와 같다.

기차는 종착역을 향해 가고 있는데, 어떤 사연이 있든지 중간에 내리지 않고, 끝까지 간다.

그리고, 비로소 우리는 부활하여, 영생을 시작하게 된다.

영원히 사는 문제는 우리 신앙의 궁극적인 결과다.

결국 부활하지 못한다면, 영생을 살 수 없고, 신앙생활도 아무 소용이 없다.

아무쪼록 우리는 도중에 하차하지 않고, 기어코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를 성취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이겨야 할 문제가 있다.

죽음이다.

 

[몸의 죽음은 영벌의 전주곡]

 

사람들은 죽음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누구나 죽음을 맞는다는 것, 언젠가 우리가 죽는다는 것에 대해서 너무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원래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는 거리가 멀다.

하나님을 향한 배반이 있어서, 세상이 타락했고, 그래서 죽음이 오게 되었다.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하는 것은 이런 환경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이지, 원래 당연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고, 영혼이 남아서 떠돌아다닌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영원히 사는 것도 영혼이 사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육에 대한 중요성을 그다지 깊이 마음에 새기지 않는다.

그러나, 육신의 죽음은 우리에게 대단히 심각한 문제다.

육신의 죽음은 영적 죽음에 대한 하나의 전조다.

진짜 영적 죽음에 딸려서, 같이 생긴 저주다. 참 형벌의 표인 것이다.

우리 육신의 죽음도 사실 매우 비극적이고, 큰 두려움을 상기시킨다.

다만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특히 그리스도인은 육신을 버려도, 영혼이 남아있다고 생각해서, 영혼에만 투자한다고 한다.

잘못된 것이다.

몸이 죽는 것이 상징하는 진짜 영적 죽음이 무서운 것이다. 그것이 영벌이다.

인류가 유혹을 받고, 선동을 받아, 하나님께 범죄했다.

그 죄로 인해 가져온 결과가 사망이다. 영적 죽음이다.

몸의 죽음은 영적 죽음에 따라오는 것이다.

 

[영혼이 있으니 죽어도 돌아다닐 수 있으니?]

 

우리는 몸을 떠나면, 영혼이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것은 영혼의 부활이 아니라, 몸의 부활을 말한다.

성경은 영혼의 부활을 말하지 않는다.

성경 외적인 것이 들어와서, 우리 생각을 바꾸어 놓은 것이지, 몸의 부활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신자의 죽은 영혼은 잠잔다고 말한다.

예수 믿지 않는 죽은 영혼은 영벌을 기다리고 있다.

사람이 몸을 벗고, 혼적 존재로 남아서 떠돌아다니는 것은 히브리 신앙에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육신의 입장에 대해서, 함부로 할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 있다.

육신이 행한 행위에 대해서 심판받는다.

육신은 중요하지 않고, 영혼만 중요하다면서, 육신으로 범죄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영혼의 독립적 삶은 없는 것이다.

육신의 책임이 대단히 중요하다.

영혼만 따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육신을 통해서 지은 죄가 그렇게 무섭다.

 

[사망은 뚫고 나올 수 없는 벽 : 생명의 종결]

 

오늘 우리는 예수 십자가의 공로로 인해 의롭다 여기심을 받고, 죄의 딱지를 벗게 되었다.

주님을 힘입고 얻은 영광이다.

그 사실에 대해 엄청 감사하고, 평생 의롭다함을 지키고 사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의롭게 된 사실이 우리를 하늘나라로 자동적으로 옮겨 주지 않는다.

의롭게 되는 것과 하늘나라로 가는 것은 다른 문제다.

우리가 부활하지 않으면, 영생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신앙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영생의 자격이 있을지라도, 예수로 인해 거저 얻은 자격이라도, 부활하지 않으면 영생을 주어도 살 수 없어서 문제다.

몸이 있어야 사는 것이다.

사망은 한 존재의 생명의 끝이다.

이것이 사망의 개념 자체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다.

그는 죄가 없으신 분이시니, 죽지 않으셔야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에게도 사망이 임하면, 그 죽음은 끝이다.

사망의 벽은 절대 넘지 못한다.

주님은 의로우시니, 죽음을 당하셔도, 죽음이 취소되어, 살아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숨이 끊어졌을 때는 끝이다.

잘못 사형을 시켜서, 진범이 나와도, 다시 살릴 수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 어떻게 살아나셨는가.

 

[사망이 예수에게 패함]

 

주님이 살아나신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나신 것이다.

사망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지만, 주님은 사망의 권세 위에 계셨다.

사망이라는 절대 법칙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일어나셨다.

사망은 누구에게도 패하지 않는 절대 권세였는데, 주님은 이기고 나오셨다.

사망은 죄라는 구실을 통해 들어온다.

죄의 능력이 무서운 것이다.

죄는 사망을 불러온다.

사망의 권능은 무섭다.

그러나, 죄도 사망도 주님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졌다.

주님이 단지 피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힘을 멸하셨다.

 

고린도전서 15: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린도전서 15: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바울이 이렇게 사망을 조롱하면서, 우리에게 진리를 알려주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

우리는 그런 능력이 없다.

 

[부활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

 

우리의 대표되신 주님이 열어주신 길로 부활하려고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의 대표시다.

 

고린도전서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믿고, 죽은 신자들의 첫열매가 되셨다.

첫열매는 옛날 이스라엘이 추수를 할 때, 첫열매를 제사장에게 검사받았는데, 제사장이 보고 승인하면, 추수의 허락을 받는 것이다.

제사장이 허락하지 않으면, 추수할 수 없다.

첫열매가 있다면, 따르는 열매가 있다는 것이 암시된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우리를 위해 첫열매가 되셔서, 아버지께 바쳐진 것이다.

아버지가 그를 기쁘시게 받으면, 나머지 우리도 받아들여지게 될 것이다.

둘째, 첫열매는 할부금의 개념이 있다.

물건을 살 때, 몇개월 할부로 산다. 첫열매는 첫할부금에 해당된다.

할부금을 냈다면, 이미 계약이 진행되고 있다.

뒤의 것도 따라와야 한다.

첫열매는 엄청난 암시를 주고 있다.

믿고, 죽은 영혼들은 주와 함께 있기 위해, 주께 갔다고 한다.

바울도 두어번 이상 그렇게 표현했다.

죽어서 주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했다.

 

고린도전서 15: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이 원칙은 머리로 좋은 이론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늘의 법칙이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아 들어왔으니, 죽은 자가 부활하는 것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다.

예수의 사람되심은 우리의 사람됨과 깊은 영적 관계가 있다.

그는 인류의 대표로 오신 것이다.

옛날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임했는데, 이제 성도들은 예수 한사람으로 인해, 부활을 하게 되어 영생을 살게 될 것이다.

 

고린도전서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이것이 성경이 처음부터 말해온 복음의 주춧돌 같은 것이다.

아담도 그리스도도 생명, 혹은 사망이라는 영역에서 대표다.

아담은 모든 죽은 이들의 조상이었다.

그는 핏줄로도 조상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생명으로 살아난 자들의 조상이다.

혈연이 아니라, 그 안에 속한 자들로서 우리 조상이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행위로 인해 가져온 결과는 그 사람에게 속한 자에게 다 미친다.

아담과 정체를 함께 한 사람은 누굴까.

이들은 이 땅에 태어난 사람.

아담의 행위 때문에 죽음에 처해지게 된다.

반면, 예수와 함께 한 사람은 누굴까.

그 분안에서 거듭난 사람.

그들은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한다.

아담안에서 모든 사람은 죄의 성질을 물려받는다.

이것은 사람 홀로 저주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죄의 성질을 물려받아, 악을 행하게 된다.

사실 모든 이가 아담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그 자체로 죄의 성질 때문에 어차피 죽게 될 것이다.

반면,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영적 삶 뿐 아니라, 몸으로도 살게 된다.

 

[영혼의 부활 아닌 몸의 부활]

 

모든 사람이 육신으로 죽는다.

예수를 믿는 자들은 그로 인하여, 영의 생명을 받고, 몸으로 부활한다.

일단 육신이 한번 죽지만, 영생을 살도록 몸으로 부활한다.

그러면, 우리 영혼은 어떻게 될까.

영혼은 부활을 기다리지 않는다.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해 간다고 성경은 표현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5: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고린도전서 15: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부활하는 것은 우리 몸이다.

성경은 부활의 그림을 생생히 그리고 있다.

바울은 예수께서 금방 오실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남아있는 사람도 변화될 것을 이야기했는데, 본질은 죽은 자의 몸도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바다도 그 죽은 자를 내어준다고 표현한다.

시체도 못찾았지만, 그 날에는 몸이 다시 살아난다.

영혼이 떠돌아다닌다는 개념은 버려야 한다.

마지막 날에는 사망과 음부도 죽은 자를 내어준다. 그러니까 부활하는 것이다.

예수 때문에, 우리의 운명이 완전히 최악에서 최상으로 바뀌었다.

만약 우리 운명을 알았다면 마음이 산산조각날 비극을 주께서 자신 안에서 다 소화하여, 소망을 주셨다.

우리에게 감사할 것만 남겨주시고, 아픈 것은 다 가져가셨다.

그리고, 그가 가신 길을 열어 놓으셨다.

그분만 따라가면 된다. 소망만 가지면 된다. 소망이 약한 자는 가다가 떨어질 수 있다.

우주가 한번 망가지니까, 그것을 회복하는 것에 너무 오랜 세월이 걸렸다.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희생해야 하는 손실도 감수해야 했다.

다시 속지 말아야 한다.

결단을 가지고, 이제는 더 이상 악을 행하지 않기 바란다.

악을 범하는 문제에 대해서, 소홀히 하지 말고, 거룩히 달려가자.

주님은 그날 우리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그를 맞을 수 있기를 바란다.

 

[빈 무덤]

 

지난 한주간 예수님의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한주를 보면서, 예수님의 심정을 엿보았다.

주님의 가신 길,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어떤 것인지 짐작해보려 했다.

예수께서 마지막 주에 만나신 것은 가짜 교회, 가짜 신자였다.

하나님의 의가 없고, 미움만 있었다.

그들이 나와서, 예수를 법정에 고발하여, 죽이려고 했다.

세상 법정에 예수를 고소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매우 마음 아픈 기억을 보았다.

주님이 희생하지 않으면, 누구도 지옥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은 그 괴로움을 다 받으셨다.

주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다 받으시고, 죽으셨다.

거기는 주님을 잘 섬겼던 여인들이 있었다.

 

마가복음 16: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일이 끝나고, 몸을 잘 보전하기 위해 향품을 준비했다.

몸이 다시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시체에 대해서도 잘 처리하는 관습이 있었다.

 

마가복음 16: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주님은 금요일 오후에 무덤에 들어가셨고, 안식후 첫날, 주일 새벽에 다시 살아나셨다.

여인들은 무덤에 있는 돌을 누가 굴려줄까, 대책없이 갔다.

 

마가복음 16: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마가복음 16:4 눈을 들어 본즉 돌이 벌써 굴려졌으니 그 돌이 심히 크더라

 

그런데, 가서 보니까, 그 엄청난 돌이 굴려져 있고, 무덤이 열려 있다.

 

[천사의 증거]

 

거기 들어가보니, 흰옷을 입은 청년이 앉아 있었다.

 

마가복음 16: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사복음서에 디테일은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어 있지만, 마가복음 중심으로 말할 것이다.

거기 흰옷을 입은 청년은 천사였다.

왜 돌이 굴려져 있을까.

예수께서 나오기 위해, 돌이 굴려져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부활의 사실을 보라는 것이다.

 

마가복음 16: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천사의 목적은 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주께서 입으신 세마포가 사람 모양처럼 있고, 몸만 빠져나온 것으로 되어 있다.

요한복음은 가장 마지막에 쓰여졌다.

특유의 공관복음서가 밝히지 않은 부분을 많이 밝혔다.

누가 예수님 시체를 도적질 한 것이 아니다.

누가복음에는 이미 예수께서 다시 사실 것을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제자들 대부분은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

 

마가복음 16: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이미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 십자가의 사건을 겪으면서, 정신이 없었다.

여인들은 자기들이 본 일을 제자들에게 전달했다.

이것이 복음의 전형이다.

자기 마음에서 어떤 생각이 떠올라서 믿는 것이 아니라, 전도받는 것이다.

 

사도행전 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선배들의 증거에 주목하도록 성경은 강조한다.

기독교 신앙이 여기 달려있다.

영생을 가는 모든 길은 전달이 되는 것이다.

이천년동안 이것을 훌륭하게 해 왔다.

부활의 소망이 계속 전달되어 왔다.

목격했느냐. 전달하라.

사도들은 예수 부활에 대한 목격자로서, 증거했다.

 

사도행전 13:31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으니 저희가 이제 백성 앞에 그의 증인이라

 

고린도전서 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고린도전서 15:4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린도전서 15: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고린도전서 15: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고린도전서 15: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고린도전서 15: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마태복음 28: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새

 

사도들은 이것을 전하기 위해 평생을 바치고, 목숨도 내놓았다.

여자들은 놀라서, 어떻게 할지 모르고, 돌아왔다.

여기가 마가복음의 끝이다. 이후에는 초대교회에서 추가한 것이다.

이후의 내용은 다른 복음서에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훨씬 더 디테일하게 현장을 자세히 그리고 있다.

 

[보지 않았어도 믿는 자는 복되도다]

 

그런데,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전했는데, 믿지 않는다.

 

마가복음 16:11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마가복음 16:12 그 후에 저희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

 

누가복음 24:12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푸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이후 여러차례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셨다.

 

마가복음 16: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여기 두 사람은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을 만난 자들이었다.

 

마가복음 16: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주님은 왜 믿지 않느냐고 하신다.

마땅히 믿어야 할 것을 거절하고, 오히려 신뢰하지 말아야 할 것을 신뢰한다.

 

요한복음 2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우리는 보지 않았어도, 믿는 면에서 사도들보다 나은 부분이 있다.

전달받았다.

예수께서 구속하신 사실.

흉악하고, 끔찍한 모든 죄를 다 사하신 사실도 다 보여준 것이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모든 일이 사실임을 알게 해 주신 것이 부활의 사실이다.

오늘 우리가 소망을 가질 것이 확실하다. 애매한 소망이 아니라, 분명하다.

우리는 확실히 부활할 날을 위해, 달려갈 것이다.

충성하고, 원수의 속임에 속지 말고, 교회를 사랑하고, 주의 종을 섬기고, 책임을 다하고, 사랑을 다하여, 주님의 뜻을 섬기기 바란다.

그래서, 주께서 열어놓으신 영생의 길을 성공적으로 가기 바란다.

 

우리를 받아주시고, 힘을 주사, 소망을 위해 달려가는 길에 문제가 없게 하소서.

마지막 부활의 길을 향해 달려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