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No40 하나님을 본받는 그리스도인(240929)

lks8284 2024. 9. 29. 17:49

240929주일 [하나님을 본받는 그리스도인] 김성현감독(강석준집사님 정리)

 

5:1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뿐 아니라, 구원한 자를 이후에도 친히 인도하신다.

 

하나님이 인도하실 때는 새로운 삶을 부여하여, 그 속에서 살게 하신다.

그 삶은 하나님의 방식의 삶이다.

그 길은 하나님의 성품 안에서 사는 인생여정이다.

 

[용서와 사랑]

이런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려면, 그분의 용서와 사랑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용서와 사랑은 하나님의 희생의 사랑을 품고 있다.

하나님이 베푸신 희생의 사랑에 대한 나의 자세가 어떤가.

희생하신 사랑의 주님과 만나는 나의 자세가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기초다.

이 부분이 정상이 되어야 한다.

이 부분이 정상이 아니라면, 기독교의 많은 부분이 어긋나게 된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원칙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어긋나게 되면,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없고, 그려면 우리 신앙의 힘도 잃게 되고, 기독교의 도에 대한 기조 자체를 잃게 된다.

바로 기독교가 변질 될 수 있는 것이다.

용서와 사랑,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복음의 본질인데, 이것을 하찮게 여기면, 신앙 전체를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첫단추를 잘못 꿰는 것과 같다.

가장 기초적인 초석을 잘못 세우면, 이것과 연결되는 모든 부분이 잘못될 것이다.

그러면, 다른 것들을 끼어넣게 되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된다.

용서와 사랑의 기초 안에서 연결되어야 하는데, 맞지 않는 요소를 억지로 연결시키면, 복음이 이해가 되지 않고, 그 신앙은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게 된다.

용서와 사랑의 기초가 없어서, 그것이 요구하는 나의 자세가 나타나지 않고, 드러난 이치만으로 신앙을 규명하려고 하면, 사람의 욕심이 자꾸 들어간다.

사람의 생각이 들어와, 자기에게 유리한대로 생각하면, 이미 마음이 오염되어, 정도를 가지 않고, 탈선하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동]

복음은 이론이 아니라, 그 전에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에 대한 은혜를 꺠닫고, 자발적으로 주 앞에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자발적으로 나가서 무릎꿇을 수 없다면, 그것이 문제가 된다.

오염없이 순결한 마음으로 그 감동을 통해, 기초가 되어, 그 위에 신앙이 세워져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복음의 본질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하나님은 사랑하실 뿐 아니라, 그 사랑을 우리에게 심어주신다.

사랑하지 않는 자가 복음을 말할 수 있는가.

뭐라고 그럴듯한 말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전혀 모르면서, 모르는 소리를 하게 된다.

다른 것을 이야기하게 된다.

사랑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기독교의 주춧돌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근사하게 말할지라도, 사실은 모르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그리스도 교회의 복음이 말하는 본질을 말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진리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기 위해, 계속 교육하고, 같은 진리를 계속 선포하고 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꾸 망각하기 때문에, 계속 가르치는 것이다.

찬양도 같은 주제로 여러가지 찬양을 계속 부른다.

 

[기독교는 사람을 구하는 사랑]

기독교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당신은 타락했다. 그러면 죽는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한다. 당신은 일어설 수 있다.

당신도 그가 주신 사랑을 받으라.

이것이 기독교다.

그 사람에게 사랑을 넣어주어, 그가 자발적으로 자기가 받은 사랑을 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을 구하려는 마음이 없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관심이 있을리도 없다.

기독교의 일은 사실 사람을 구하는 일에 주목적이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게 집중된 사람은 거듭난 과정을 겪지 않았다.

아무리 옳은 소리를 해도, 하나님의 긍휼이 중심에 없다면, 사실 모르는 소리를 하는 것이다.

이 부분을 모르면, 사실 전도도 제대로 할 수 없다.

당신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의가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라. 이렇게 전해야 한다.

 

[자녀라는 것]

그런면에서 자녀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런데, 자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를 수 있다.

거의 대부분의 성도들이 자녀의 실제적인 의미를 잘 알지 못한다.

이것을 모른다면, 사실 자녀가 될 자격이 없다.

우리는 왜 자녀일까.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과 희생을 아는 자다.

그냥 상식으로 아는 정도가 아니라, 그 마음에 깊은 감동이 식지 않은 자가 하나님의 자녀다.

그런 자가 가지는 자격에 대해서 표현하는 것이다.

자기를 아껴주신 하나님을 체감하는 사람, 참고 용서하신 하나님, 애타는 마음으로 사랑하신 그 사랑을 아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다.

그런 사람에게는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할 필요가 없다.

그 사람은 순종하여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얼마나 자기를 긍휼히 여기시는지 아는 자라면, 그 감동 속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하게 될 것이다.

그런 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격이 있는 것이다.

아마도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 점에서 명확해야 한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좀 상세한 면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오늘부터 엡5장을 하게 되는데, 4장 마지막절까지는 성도들간의 관계에 관한 우리의 자세를 다루었다.

오늘부터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다루게 된다.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는 삶]

본문의 말씀은 '그러므로'로 시작된다. 이것은 지난 절과 연결해서 하는 말씀이다.

 

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5:1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이 말씀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특성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특성은 용서다. 그 안에는 인자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

인자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용서를 수반하게 된다.

지난주에는 용서에 관한 말씀을 나누었는데, 용서받은 자는 사랑받은 것이다.

용서의 배경에는 사랑이 있다.

지난주와 오늘의 내용을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인자하고, 불쌍히 여기시므로, 우리를 용서하셨다. 인자와 긍휼은 하나님의 마음이고, 용서는 대표적인 행위다.

거기서 나타난 것은 우리를 향한 사랑이다.

하나님의 것을 보고, 명확히 인지할 뿐 아니라, 본받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모방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을 흉내내고, 숙달되도록 따라해서, 하나님같이 행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본받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특성을 본받아야 한다.

태도적으로 인자와 긍휼, 행위로는 용서를 본받는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인격을 본받는다.

그는 사랑이 충만하셔서, 사랑의 테두리 안에서 그를 묘사할 수 있다.

그는 사랑이시다.

달리 풀어서 말하면, 용서하셨던 그의 사랑을 본받으라.

결론적으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닮아야 할 내용은 삶의 방식]

단회적으로 필요할 때 하는 용서하는 행위를 닮으라는 것이 아니라, 삶을 닮으라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삶 전체를 포괄하는 삶의 방식을 닮으라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신자의 걸음이 중요한 문제다.

삶 전체를 그렇게 하라.

우리에게는 유일한 삶이 주어져 있다.

필요할 때, 갑자기 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의 새삶을 사는 것이다.

 

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삶 전체를 통해, 평생 하는 것이다.

 

4: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우리는 하나님의 특성을 닮게 되어 있다.

 

[부모의 특성은 닮게 되어 있다]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아버지의 사랑을 입은 자녀로서, 마땅히 그를 본받아야 한다.

대단히 일반적인 이치로서 기대하고 있다.

우리는 사랑받은 자들이다. 왜 사랑받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자녀들이 부모와 같아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자녀들은 부모를 닮을 수 밖에 없다.

첫째, 유전적으로 닮을 수 밖에 없다.

거기서 낳았으니까, 많은 특질들을 공유하고 있다.

잘 긁는 아버지가 있다면, 한살도 안된 자녀라도 벌써 긁기 시작할 것이다.

그런 DNA의 특질을 닮아갈 것이다.

또한 자녀는 인생의 길도 닮아간다

앞에 주어진 새삶에 대해서, 아버지가 하는 것을 보고 따라한다.

그래서, 자녀들은 아버지를 닮게 된다.

이와같이 우리도 우리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모방하여, 닮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너무 당연하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닮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꼬리표가 요구하는 자세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에 쓰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되었다.

각각 다른 시기에 하나님이 받으셨다.

새 삶을 주셨고, 거듭나게 하셨다.

그런면에서 우리는 가족이다.

인생의 가족은 불과 50-60년만이겠지만, 이 가족은 영원하다.

이 가족은 하나님의 본성이 심어져서 닮았고, 하나님을 보고 배워서 닮아있다.

이것은 의무적으로도 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가 아버지 닮기를 싫어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무엇이 잘못된 것이다.

아버지가 자기를 극진하게 사랑하고, 위하고 있는데, 닮기 싫어할 사람은 없다.

다만, 이 세상은 아버지를 닮기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나쁜 아버지도 많다.

지겹게도 사랑하지 않고, 자기만 사랑하고, 자녀를 학대하는 자도 있다.

그런 아버지의 자녀들은 그 아버지를 닮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자기 안에서 그 특질을 뽑아버리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 성경에서 말하는 아버지는 비정상적인 부분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최고로 훌륭한 아버지보다 훌륭한 아버지상을 소개하고 있다.

 

정상적인 경우일 때는 이렇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정상적인 경우, 아버지는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자녀를 사랑한다.

자기 인생도 있는데, 자녀를 너무 사랑한다. 이 사람이 진짜 아버지다.

그 사랑에 감동을 받은 자녀들은 어떨까.

아버지를 향한 그 사랑이 떠나지 않을 것이다.

며칠전 유튜브를 봤는데, 9살정도 되는 아이가 아버지가 파병갔다가 갑자기 나타나니까, 그대로 아버지에게 직진하여 안고 울음을 터뜨린다.

인식하는 순간 그대로 달려간다.

얼마나 아버지를 신뢰하고, 사랑하는가.

그러나, 아버지가 달갑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아이처럼 인식되는 순간, 아무 거리낌 없이 아빠 가슴에 자기를 던지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아버지상이다.

평생 아버지에게 감동받고 있다.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하나님을 닮는 방법]

그런데, 하나님을 닮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닮기는 너무 어렵다.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그러나, 주 예수께서 아버지를 완벽히 대표하시므로, 우리는 그분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배울 수 있다.

 

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그를 보면,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들을 통해 아버지를 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구원은 두단계로 이루어진다.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고, 이후부터는 그분의 아들의 모습에 맞추어간다.

먼저 구원하고, 이후에는 아들과 같아지도록 계속 맞추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작업이다.

지금 당장은 아들과 똑같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아무나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녀만 가능하다.

 

요일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언젠가 우리는 그와 똑같아질 것이다.

 

[사랑의 최상의 증거는 용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때,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

 

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아버지는 훌륭한 자녀를 용서하신 것이 아니라, 자격없는 엄청난 죄인을 거저 용서하셨다.

우리 입장에서 이보다 더 하나님께 죄송하고, 감사할 일이 어디있는가.

 

사랑의 가장 위대한 증거는 용서다.

 

용서보다 사랑을 더 극명하게 나타낼 길이 없다.

자격없는 자를 용서하는 것.

하나님은 진짜 너무 더럽고, 가증스러운 인류를 용서하셨다.

그러므로, 영원한 형벌에서 구해주셨다.

용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는 최고의 증거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는 사랑도 용서에 의해서, 그 진정성을 증명하게 된다.

 

[자녀의 증거]

오직 사랑만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는 정도는 용서할 수 있는 정도다.

사랑한다고 하지만, 용서하지 않는다면, 진짜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자녀로서 우리가 서로 용서하는 것은 자녀인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사랑한다고 하지만, 용서가 부족한 사람.

자녀를 사랑한다면서, 학대하는 사람은 어떨까. 그것은 사랑이 없는 것이다.

용서가 부족한 것은 사랑이 부족한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닮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모든 죄를 이미 사하셨으니, 내가 형벌을 불러올 수 없다]

이미 하나님이 사하셨기 때문에, 내가 용서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너그럽게 일곱번쯤 용서하면 어떨까요 하고 제시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흔번씩 일곱번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계속 용서하라는 의미다.

이 의미는 주가 인류의 모든 죄를 다 사하셨다는 의미다.

 

2:13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용서하고, 또 용서하라. 그가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용서하신 것이므로, 너도 용서해야 한다.

모든 죄를 사하셨다.

하나님이 이미 값을 치룬 죄에 대해서, 내가 형벌할 수 없다.

어떤 다른 신자가 나를 괴롭히고, 정당하지 않게 어려움을 주어도, 그 죄에 대해서, 이미 예수께서 값을 치루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값을 보고, 용서하셨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내게 상처를 주던지,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미 용서하신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복수하려고 하는 것은 내가 범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그리스도에게 형벌받게 하여, 값을 치룬 문제를 내가 또 불러오는 것이다.

그가 행하신 희생을 인정하지 않는 모독을 저지르는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죄다.

 

주의 희생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모든 죄는 그리스도께서 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상대라도 책임을 추궁할 권리가 없다.

누가 무슨 범죄를 하든지, 사실 내가 형벌할 수 없다.

주께서 용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렇다니까, 마음껏 범죄하겠다고 한다.

죄를 용서하신 것은 마음껏 죄를 범할 길을 열어놓은 것이 아니다.

용서받은 자가 회개한다는 전제 아래서 한 것이다.

 

용서받은 사람이 어떤 사건에 대해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고, 돌이킨다면, 얼마든지 용서가 된다.

그러나, 만약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해당하는 사건을 포함하여, 앞으로의 모든 죄도 형벌받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너는 지금 그를 용서해야 한다. 형벌은 주님께 맡겨졌고, 너는 복수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를 형벌할 것이다.

자기가 죄인을 형벌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너무 잘못된 것이다.

사람들은 누가 내게 잘못하면, 복수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죄인을 내가 형벌할 수 있다고 누가 그랬는가. 그리스도인은 형벌할 수 없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 사람들이 그것을 대단히 잘한다.

저 사람이 나쁘게 했기 때문에, 내가 보복해도 범죄가 아니라고 한다.

이것은 악행이다.

복수하는 것은 진짜 강력한 형벌을 가져온다.

 

[베푸는 용서는 받은 사랑을 나타낸다]

용서받은 사람이 그 고마움을 안다.

 

벧전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내가 진짜 용서받지 못할 일을 용서받았다면, 나는 어떨까.

진짜 황송해서, 온 세상을 다 용서할 것이다.

하나님이 용서하신 것은 그의 사랑의 깊이를 나타낸다. 이와같이 우리가 용서하는 것도 우리의 사랑의 깊이도 나타낸다.

성경은 열심히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고 있다.

여기서 '열심히'라는 말은 근육이 팽팽히 당겨지는 것을 말한다.

힘들만큼 참고 하라는 것이다.

누가 무례하고, 괴롭게 해도 참으라.

나를 상하게 했다고, 보복하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남의 유익을 구하라.

이것은 그가 범죄하지 않았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의 일에서 참아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모든 경우는 아니다.

교회를 해치는 경우는 제외된다.

교회의 안정과 존속을 깨는 문제는 다른 문제다.

교회를 상대로 악을 행하면서, 회개하지 않는 자는 징계해야 한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회개가 되지 않으면, 추방하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고 경미한 경우에는 참아주어야 한다.

사랑으로 그를 덮어주어, 교회는 허다한 죄를 덮어준다.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면, 용서받은 것이 있다는 것이다.

이 이치는 누가복음의 사건에서 명확히 보여진다.

어떤 여인 그는 창녀다. 그는 주님이 바리새인과 식사할 때,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씻었다.

이것은 다른 복음서의 내용과는 다른 사건이다.

주께서 초대받으셔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그가 창녀인 줄 알고 있었다.

시몬은 이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예수님이 선지자라면, 그가 어떤 여인인 줄 알텐데 하면서,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7:41-47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빚진 자 둘 다 탕감해주었을 때, 많이 탕감받은 자가 많이 사랑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헌신하는 것도 똑같은 이치다.

우리는 삶을 살 때, 마음에 감동받아, 우리의 사랑을 드러낸다.

표현을 해야 한다. 이것은 사랑받았기 때문이다.

 

[받은 용서의 크기를 아는 감각이 남을 용서한다]

그러나, 바리새인 시몬은 그가 받은 용서의 크기를 모르고 있다.

자기가 죄가 많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인정하고 있지 않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생각을 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

자기가 용서받은 일이 없기 때문에, 용서받아야 하는 간절함을 모르는 것이다.

시몬은 당시 사회에서 버림받은 창녀가 엄청나게 수치를 당하는 것을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여인은 자기가 받은 용서에 대해서, 어쩔 줄 모르고, 눈물로 발을 씻기고, 향유를 부었다.

우리의 사랑할 능력은 용서할 능력과 같은 것이다.

용서하지 않는다면, 신앙도 없으면서, 기계적으로 해온 것이다.

이 사람은 불신앙과 다름없다.

믿기 전에도 계속 죄를 범하고 있었다가 교회에 왔다.

예수 믿으니까, 모든 죄를 다 사함받았다고 하니까, 그냥 그런 줄 알고 있다.

이 사람은 죄책을 느껴본 적이 한번도 없다.

이런 사람이 복음을 말할 수 없다.

내 죄 때문에 주어진 형벌을 주님께서 감당하셔서, 내게 형벌이 오지 않았을 뿐이지, 나는 하나님께 죄인이다.

우리는 누구도 떳떳하지 않다.

교회에서 어깨피고, 당당하라고 할 수 없다.

용서의 필요를 못느끼는 사람은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께 필요한 부분만 얻어내려고 하지, 진정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아니다.

껍데기만 있다. 그런데, 천국 가는 것이 잘못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냥 교회는 나온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나를 여전히 용서해주시기를,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고마워서 남을 용서한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자기가 받은 사랑을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면, 자기를 찢어서라도 주님께 드려야 할텐데.

내 영원한 목숨을 살려주셨는데, 왜 내 육신의 목숨을 드리지 못하는가.

우리가 받은 사랑에 대해서, 뜨거운 감동이 남아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감동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인정하지 않은 것 뿐이다.

그러나, 그 용서하신 사랑을 인정하는 사람은 축복이 열려져 있다.

남들은 모르지만, 자기가 죄인인 것을 회개하니까, 축복이 열린다.

하나님의 손이 거기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교회는 그것을 항상 상기시키기 위해, 반복해서 말하고, 은혜에 대한 찬양도 계속 한다.

 

[성령을 순종해야 가능한 본받는 삶]

이것은 자연적인 변화가 아니기 때문에, 성령이 도와주셔야 한다.

속사람이 강건해서, 의지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겠다는 의지로 시작하면, 성령의 능력이 계속 흐를 것이다.

 

고전16:14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3:16-19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세상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다.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셨다.

인자하고, 긍휼하고, 용서하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을 닮는 자들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