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029환언(강석준집사님 정리)
요 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 꿇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심을 감사합니다. 말씀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듣고 믿음으로 믿고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함을 받는다 말씀하셨으니 우리는 이 말씀이 우리의 믿음이요, 우리의 소망이요, 소망 있는 생활임을 꼭 믿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심에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심 같이 우리가 말씀과 함께 있어 그 말씀을 우리가 받고 그 말씀과 함께 있음으로써 우리가 또 말씀의 자녀, 말씀의 성도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우리가 베뢰아아카데미에서 2년간 기본신앙을 배운다.
여기서 배우는 것은 성경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기본신앙의 지식이다.
반드시 기본이 깔려있어야, 그 다음 집을 지을 수 있다.
군인은 전투에 나가서, 혈전을 해야 한다.
목숨을 내놓고, 자기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
내가 군인이라는 신분을 가지므로, 군인이 해야할 일을 또한 깨닫고, 훈련하고, 준비하는 것 같이, 우리는 기본신앙을 가져야 한다.
내가 교리라는 말을 하기 싫어서 그렇지만, 기본 교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교리라는 말을 쓰지 않기 때문에, 신앙의 원리라고 말씀드리는 것이다.
거기서 2년간을 마치면, 이제는 우리 믿음이 실상이라는 것을 알고, 흔들리지 않고 가는 것이다.
고린도전서에 바울이 내가 닦아둔 터 위에 다른 것을 닦아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예수 그리스도라 하였다.
이렇게 터를 닦는 것이다.
누구든지 이 터 위에 집을 지어야 한다.
그런데, 금으로 지을 것인가, 은으로 지을 것인가, 나무로 지을 것인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고, 그대로 있으면, 영생에 들어간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하나님의 성전은 다른 집과 같지 않고, 거룩하다.
하나님만이 거하시는 거룩한 곳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줄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건설해야 하는데, 금으로 지어야 한다.
솔로몬이 화강석으로 짓고, 나무로 짓고, 놋으로 지었지만, 다 허물어졌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정말 금같은, 보석같은, 인간이 최상급으로 여기는 가치있는 그런 믿음의 성전을 지어야 한다.
여러분 자기 스스로 생각해보라.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인데, 하나님의 성전된 자기 영혼을 어떻게 건축하고 있는가.
잘 생각해보라.
썩어질 육신이 살 집은 많은 투자를 하고, 사치스럽게 하고, 불편없이 짓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거하시는 내 영혼은 어떻게 건축하는가.
성경은 전부 내 영혼을 건축하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온 말씀으로 건축하고, 성령으로 건축하고, 하나님의 피로 건축하도록 부탁하고 있다.
과연 내 영혼이 성령으로 건축되었는가.
그리스도의 피로 건축되었는가.
하나님의 말씀, 진리로 건축되었는지 잘 봐야 한다.
예수는 말씀이신데,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시매,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다.
예수는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성전임을 자신이 말씀하셨고, 후에 제자들이 성령으로 그것을 깨달았다.
이와같이 예수는 의로우시고, 거룩하시고, 순결하신데, 하나님의 성전이시다.
땅에 있는 성전을 헐고, 다시 세우신 성전이다.
이 성전을 헐라 하실 때, 예루살렘 시온 언덕에 있는 성전이 어떤 성전인가.
사람의 손으로 짓고, 거기서 율법을 지키면서, 여호와를 섬기던 성전이다.
이 성전을 헐라고 하였다.
오늘 여러분과 나도 똑같이 선악을 아는 양심의 법에 따라서, 종교인으로 사는, 혹은 그렇지도 못한 사람으로서 사는, 옛성전같은 것을 헐어버리고, 거듭나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자기 육신이 거하는 곳과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된 자기 영혼과 비교할 때, 어떤 차이가 나는지 잘 보라.
어느 순간에 창고도 짓고, 재물도 쌓아놓고, 집을 새롭게 단장했어도, 오늘밤 그 영혼을 취하시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무것도 아니다. 안개로 사라진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잘들으라.
우리가 베뢰아아카데미에서 기본신학, 기본교리라고 할 수 있는 우리의 믿음의 터를 잘 닦았다.
하나의 설계도를 잘 읽었다.
그 다음에 우리가 교회에서 부분적으로 계속 하나님의 의도를 배우고, 설교를 들으면서, 지어진 집을 잘 보존하고 있다.
그렇게 집을 짓고, 주님을 모시고 있다.
그런 자들이 또 크게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 위해, 신학교도 가고, 공부해서, 제2의 시무언처럼 되려고 하고 있다.
열심히 주의 종이 되려고 준비한다.
그런데, 알지 못하는 자가 다른 사람에게 알지 못하는 것을 가르칠 수 없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없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설계도가 다 나왔으니, 우리가 집을 짓는 자다.
어떻게 지을 것을 조심해야 한다.
설계도는 있지만, 그 윤곽이 확실히 드러날 수 있도록 지식으로 쌓고, 진리로 완전 무장을 해야 한다.
그렇게해서, 내가 눈뜬 자가 되어야, 소경을 인도할 수 있다.
나는 어려서, 공부를 하려고 하다가 때를 놓쳐 공부를 늦게 했다.
그 때, 신문을 보면, 자격은 어디까지라고 나온다.
나는 늦었구나하고 죽어라 노력해서 올라갔다.
더 많이 공부해서 대학까지 나왔다.
그런데, 어느 신문을 보니까, 연령제한도 나온다.
이렇게 이 세상을 살다보면, 자기가 기회를 놓쳤다는 것을 많이 깨닫는다.
자기가 믿고, 배운 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써야 할 것이다
2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감독과 목사가 완전히 다르다.
목자장이 자기의 양들을 맡겨서, 목동들이 백여마리씩 맡아 동서남북으로 푸른 초장을 찾아 떠난다.
다윗도 자기 아버지의 양을 맡아 기르는 목동이다.
그것을 목사라고 한다.
그가 정말 양의 어머니가 되어 인도하면서, 어디로 가면 푸른 초장이 있고, 어디로 가면 샘물이 나오는지, 며칠씩 헤맨다.
때로는 한달후, 일년후에나 돌아온다.
돌아올 때는 양이 새끼를 쳐서, 두배가 넘도록 늘려서 온다.
야곱도 자기 외삼촌의 양을 맡아서 길렀다.
기르는 동안 그 양떼가 두배, 세배 넘게 불어난다.
전부 성경은 그런 이야기다.
우리는 양의 성질을 알고, 양을 인도할 수 있는 영안이 떠야 한다.
영안이 뜨고, 기를 수 있는 믿음과 담력이 있을 때, 전도사도 하고, 교사도 하고, 목사도 하는 것이다.
우리 교회에서는 결혼한 여자를 목사로 세우지 않는다.
그 까닭은 성경에도 여자에 대해서 말하길, 혼인 전이니까 열심히 모시는데, 결혼하면 마음이 옮겨진다고 경계했다.
자기가 목사면 하나님만 모셔야 하는데, 집에 하나님같은 주인, 남편이 있어서 그를 섬기게 된다.
이미 목자로서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그래서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각각 할 일이 있다.
다른 교회에서는 삼십평만 되어도 엄청난 교회다.
우리는 예배당만 삼천평이 넘는다.
양을 기르는 우리는 큰데, 양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다.
감독은 똑같은 목자이지만, 예수의 대행자다.
예수는 목자장이고, 그가 오실 때까지 청지기에게 맡긴 것이다.
청지기는 다른 종들에게 부분적으로 맡긴다.
주인이 돌아와서, 청지기가 일한 것을 알아볼 때, 다른 종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며, 잘 늘리는 것을 본다.
그래서, 그가 많은 수고를 했기 때문에 고을을 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그런 위계를 잘 기억해야 한다.
큰 나무는 수백가지의 가지를 모아 혼자 지탱하고 있다.
그것이 감독이다.
그 중, 네다섯가지 큰 가지는 부목사님들이다.
목사는 양을 인도하는 자다.
또, 잔가지들이 있어서, 전도사, 선교목양사들이 각각 열매를 맺는다.
이렇게 된 것이 교회다.
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으면 농사꾼이 농사를 짓겠는가.
그 나무를 베어버린다.
우리는 공간이 많아서, 얼마든지 일할 수 있다.
더구나 리더센터도 지어놓았다.
그러나, 분열파들이 교회를 어렵게 하므로, 그것을 유지할만한 재정적인 힘도 없다.
이제 다시 싹이 나서 일어나야 한다.
시무언과 베뢰아와 성락교회가 그루터기가 되어 시작했는데, 이제부터 정말 나무가 쑥쑥 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분열파들에 의해 교회가 큰 상처를 받아, 나무가 잘렸다.
그것이 그루터기다.
이제는 김성현감독과 김현년전도사, 베뢰아가 하나의 그루터기가 되어야 한다.
참감람나무에서 참감람나무가 또 나와야 한다.
참감람나무에서 돌감람나무가 나오면 어떻게 될까.
돌감람나무는 주인이 없다.
탁슈는 재배하는 무화과가 아니라, 들에서 자란 무화과다.
선무화과라고 해서, 바람불면 견딜 수 없다.
지도자들이 얼마나 중요한가.
우리는 소경을 부목사로 세우거나, 전도사로 세우지 않는다.
그들은 가르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교회 목사님들은 베뢰아 아카데미를 끝내고, 베대원에서 신학을 하고, 기초를 완성했기 때문에, 소경이 아니라, 눈이 떠서, 설교를 해도 아는 것, 영적인 설교를 한다.
영안이 없으면 소경이다.
다음 시간에 또 말하겠지만, 육안이 있고, 심안이 있고, 영안이 있다.
시를 써도, 육안으로 보고 쓰는가, 심안으로 보고 쓰는가 하는 것이다.
초보자들이 쓴 시를 보면, 육안으로 본 것을 쓰기 때문에 재밌지만, 깊이 깨닫는 사람에게는 취할 것이 없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 영안이 있어서, 영안으로 본 것을 쓴다.
그러니까, 육안이나 심안으로 쓴 시보다 한단계 높다.
영안으로 보고 썼기 때문에 육안으로 보는 사람은 찾지 못한다.
어느 대학교수가 잘 지적했다.
월산 선생의 시는 육안을 넘어, 심안을 넘어, 영안으로 쓰는 자기 철학, 자기만의 절대중심이 있다고 했다.
이 분의 글을 잘 봐야한다고 했다.
우리가 설교도 성령이 없이 육안으로 보는 것, 심안으로 보는 것(종교적으로 보는 것)은 종교적인 해석이 나온다.
그러나, 영안으로 보는 것은 종교적인 해석이 아니라, 하늘에서 하나님이 하신 것을 말한다.
그래서,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아바라 할 수 없다.
겟세마네 동산에게 예수께서 치열하게 자기 육체와 싸우실 때, 아바 아버지여,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기도하셨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알게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바라 부르게하셨다.
하나님의 영으로 난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성령으로 난 사람은 하나님을 알고, 아바 아버지라 부른다.
전에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의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책을 썼다.
사실 그 책은 700페이지가 되어야 했다.
내 몸이 너무 약하여, 줄여서 쓴 책이다.
아쉬움이 있다가, 정말 죽을 힘을 다해, 나머지를 완성해 놓았다.
먼저 나온 것은 상권이라면, 이것은 하권이다.
상권과 거의 같은 분량으로 나올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을 다 말한 것이다.
거기는 아바에 대해서 말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면, 아바라고 부르면서, 아바가 우리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다.
성령받았다, 은혜받았다고 해도, 능력이 없는 까닭이 무엇일까.
하나님은 영이시다.
아바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영이시다, 그냥 듣고, 경히 넘어간다.
그 실상에 대해 감화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언제 책으로 나올지 모르겠지만, 나도 기대가 된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을 다 쏟아 부었기 때문에 나는 감사하게 생각한다.
시무언이 아바를 아니까, 여호와도 내치고, 율법도 내치고, 종교의식도 내치고, 달려가지 않는가.
그러니까, 그 많은 책을 다 쓴다.
아바를 알기 때문이다.
기도하시는 가운데, 어떤 분은 환언특강을 듣고, 아바 아버지라고 하는 분이 있다.
그런데, 아바를 알고 말해야 한다.
요즘은 남편보고도 오빠라고 한다. 경우가 없다.
그것이 애교가 있는 것 같지만, 질서가 없는 것이다.
내가 옛날 말한다고 여러분이 욕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상식이다.
성경은 그런 위계를 확실히 하기 위해, 누구 위에는 누구라고 한다.
요셉과 마리아 위에 헬리가 있고, 그 위에 야곱이 있고, 하나님까지 간다.
그렇게 위계가 있다.
위계를 무시하면 기독교가 아니다.
내가 독립교회를 개척했지만, 모종에서 싹을 키워 심은 교회다.
서울중앙침례교회 오관석목사님께 침례 받았으므로, 거기서 허락받는 것이다.
20명까지는 그 교회 지교회였다가, 그 숫자가 넘으면 자립교회로 독립교회가 되는 것이다.
우리 교회가 독립교회라니까, 뚝 떨어진 교회가 아니다.
절대로 역사를 부정할 수 없고, 왜곡 할 수 없다.
어떤 이는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고 하지만, 아담이 죄인인데, 어떻게 죄인이 아닌가.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고 하면, 진짜 원숭이가 진화된 존재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 모양대로 지었고, 거기에 생기를 부어, 생령이 된 존재다.
생령이 된 아담이 에덴에서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여 범죄했다.
살인이나, 간음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죄다.
선악을 아는 양심의 법 아래 들어간 자가 되었다.
그 법을 없애려면, 그 사람이 죽어야 한다.
그러면 인류가 끝나버린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대신 죽어주시고, 선악을 아는 양심의 법 아래 있는, 항상 가책받는 인간을 살려주셨다.
우리는 선악을 아는 양심의 법은 침례 받아 장사지내고, 예수의 보혈, 생명의 법을 가지고 있다.
이를 성령이 보증하고 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다.
성령으로 역사하는 보혈의 법이다.
성령이 영원토록 나와 함께 계시므로, 성령의 법은 영원히 나와 함께 있는 것이다.
영원히 나를 정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하면 아담과 상관이 없다.
예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착해서 예수를 잘 믿는 것이 아니다.
착해서 잘 믿는 것은 종교적이요, 신비주의다.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죄인을 불러서, 그들을 대속해주려고 오셨다.
예수께서 죽으셔서, 원죄를 씻어주신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짓는 자범죄는 죄를 씻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원죄는 씻는 것이 아니라, 대속이다.
속죄(贖罪)
본죄는 성품죄를 말한다.
갓난아이도 떼를 쓴다.
다 성질이 있다.
성질이 있어서, 성격으로 자라고, 성품으로 나타난다.
성품은 겉으로 봐도, 느껴진다.
외형으로 풍긴다.
성품을 다스려도, 성격은 있다.
성격이 없으면, 의욕도 없다.
이것이 다 성질이다.
예수께서, 간음하지 않았어도, 음욕을 품었어도 간음한 자라 하셨다.
살인하지 않았어도, 미워하면 살인한 것이라 하셨다.
이런 것이 본죄다.
바리새인이나 유대인들이 율법 안에 있어서, 본죄를 모르고 있으므로, 예수께서 본죄를 가르쳐 주신 것이다.
바깥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그 사람이 가진 본성에서 나온다.
본성은 다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절대 화를 내지 않으신다.
우리가 심판받고, 지옥가는 것, 하나님이 화내셔서 가는 것이 아니라, 지가 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선하시다. 긍휼이 많으시다. 의로우시다.
카톨릭은 교황을 뽑을 때, 젊은 신부 때부터 성품을 본다.
교황 자격이 있는 추기경들을 감시하는 자들이 있다.
추기경은 교황 후보자들이다.
본성을 가장 중요시한다.
얼마전 뉴스에도 봤지만, 교황이 지나갈 때, 어떤 할머니가 손을 잡고 놔주지 않으니까, 교황이 쳐서 떨어뜨렸다.
나도 놀랐다.
교황은 하나님과 같은 성품을 유지해야 한다.
교황청에서도 사과했다.
그 사람도 선악을 아는 양심의 법 때문에 일생 후회할 것이다.
교황은 급하지도 않고, 인자해야 한다.
가식이다.
교황도 성질이 있다.
그 사람도 이미 살인한 자다.
그 사람도 사는 동안 교황같은 훈련을 해서 마침내 교황이 된 것이다.
그런데, 성질이 있어서, 드디어 성격이 드러났다.
이것을 본죄라고 한다.
자범죄는 자기가 행실로 지은 죄다.
바리새인들은 행실죄는 짓지 않았지만, 그래도 죄를 짓지 않은 것이 아니다.
땅속에 심은 씨처럼, 어느새 싹이 올라온다.
사람들은 행실죄를 지으면, 그것으로 일생 양심의 법에 정죄를 받는다.
이것은 날마다 짓는 것이다.
하루에 일곱번에 일흔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다.
이것은 끝없이 회개한다.
이것은 사람 속에 머물지 않는다. 회개하면 없어진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도 전부 자범죄다.
이들은 본죄가 있기 때문에, 그것이 드러난 것이다.
강도는 자기가 죄를 저질러 형벌받아 마땅하지만, 주님은 의로우시다고 고백했다.
그것으로 인해, 주님의 의로 의롭다함을 받고, 낙원에 들어갔다.
의인은 믿음으로 사나니,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
원죄는 주님이 이미 빚을 갚아주셨다는 것을 믿으라.
그러나, 자범죄는 진정성 있는 회개를 들으심으로 사함받는다.
원죄는 용서받지 못한다.
갚아야 한다.
그러나, 본죄나 자범죄는 용서받는다.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고,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다고 하였다.
불신앙은 사망에 이르는 죄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동안 어쩌다가 남을 쳐서 다치게 하면, 용서를 구한다.
그가 용서해주면, 그 순간 용서받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죽어도 용서못하겠다, 빚을 갚으라 하면 빚을 갚아야 한다.
죄인은 노예다.
노예는 돈 주고 매매한다.
노예를 구해주려면, 몸값을 지불하고 풀어주어야 한다.
새장에 갇힌 새를 보고, 어떤 사람이 새를 사서, 날려보낸다.
이전 주인이 비싼 새를 왜 날려보내냐고 하자, 그것은 내 권한이라고 한다.
죄인이라는 말은 노예라는 말이다.
노예는 몸값을 지불하지 않으면 자유할 수 없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 죄를 도말하소서라고 한다.
도말이라는 말은 문서를 폐기한다는 말이다.
옛날에 종문서가 있었는데, 종문서가 있으면, 자손까지도 내 것이 아니다.
돼지가 새끼를 낳으면, 다 주인의 것인 것처럼 종이 자식을 낳으면 다 그 집 종이다.
이것을 조선말에 없앴다.
종문서를 다 불태웠다.
이것을 도말이라고 한다.
인류가 죄인인데, 인류를 예수가 피로 사셨다.
피(죽음)로써 댓가를 치르셨다.
값을 치뤘기 때문에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의 소관이다.
값을 치루기 전에는 마귀의 소관이었다.
죗값은 사망인데, 사망을 담당할 자가 마귀다.
마귀소관인데, 예수께서 대신 죽으심으로 값을 치르시고, 인류를 사셨다.
물고기 뱃속에 알이 수천만개 있다.
물고기가 죽으면 다 함께 죽는다.
사람은 다 아담속에 있는 것이다.
사망의 노예가 되었던 아담을 사셨다.
인류는 사망권세자에게 잡혀서, 양심의 정죄를 끝없이 받고 있었다.
예전에 노예는 상처를 내서, 소유를 표시했다.
가죽에 한번 상처가 나면, 지워지지 않는다.
이것을 화인이라고 한다.
다른 상처는 아무는데, 화상은 아물지 않는다.
참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로 낙인찍혔다고 했다.
똑같은 말이다.
그리스도가 자기 이름으로 찍어놓으면, 영원히 주님의 것이 된다.
안수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낙인찍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 안수받고도, 떨어져나간다.
침례 받은 사람은 성령으로 인치셨다.
낙인찍혔다.
이 세상에서는 죄인이 되면, 호적상 빨간 줄을 긋는다.
한번 찍히면, 어디가든 피할 수 없다.
그것을 피하려고, 3심까지 재판을 계속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인류가 예수의 손에 있다.
그런데, 예수의 손에서 지가 빠져나간다.
들어오지 않은 자는 이미 심판받아, 지옥에 갈 것이다.
짐짓죄는 선악을 아는 법을 범하는 죄다.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죄를 범하면 다시는 속죄할 제사가 없다.
한번만 대신 죽어주시지, 다시 범하면, 이제 못구하신다.
죄인을 하나님이 은혜로 구원하셨다.
침례를 통해 육신으로 체험했고, 증인도 있고, 역사도 있다.
역사를 부정하는 것은 그 가치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일본에 36년간 식민지였다.
일본에게 나라를 넘긴다는 문서에 황제의 도장이 찍혀있다.
그래서 대통령을 잘뽑아야 한다.
대통령이 항복하면 끝나는 것이다.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라는 것이 부끄럽지만, 그 역사를 부정할 수 없다.
8.15가 한국국민에게 가장 복받은 날이다.
일본의 노예에서 해방되었다.
3.1절은 투쟁이지만, 해방이 아니다.
역사를 부정하지 않으려면, 8.15가 우리의 건국일이다.
일본 오키나와도 예전에 왕국이었다.
그런데, 우리보다 30년 먼저 식민지가 되었다.
그들은 지금도 일본에 속해있다. 그들은 공부해도 공무원이 될 수 없다.
노예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표준어는 하느님(하늘님)이다.
신이라는 말이다.
성경에 엘로힘이라는 발음이 있다.
영이라는 뜻,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하나님도 엘로힘, 여호와도 엘로힘, 사람의 영도 엘로힘, 천사도 엘로힘, 귀신도 엘로힘이다.
신이라는 뜻이다.
구분할 수 없으니까, 성경에는 대문자로 구분한다.
일본에서는 천황도 신이라고 한다.
신을 가미사마라고 한다.
귀신도 가미사마요, 천황도 가미사마요, 하나님도 가미사마다.
기독교인들도 하나님, 하나님 하는데, 어떤 하나님이냐 하는 것이다.
요나서에 보면, 요나가 타고가던 배가 침몰직전에, 배에 탄 사람들이 각각 자기 신을 블렀다고 했다.
신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인도에 가면, 신이 일억이라고 한다.
일본에도 신이 백만이라고 한다.
하나님, 하나님 하는데, 어떤 하나님을 지금 생각하는가.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마다 각각 자기 하나님이다.
하나님, 하나님, 주여, 주여.
주라는 말도 주인, 신이라는 뜻이다.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신을 부르는지 알아야지.
네가 나(하나님)를 시인하면, 나도 너를 시인할 것이라 하셨다.
네가 나를 부인하면, 나도 너를 부인한다고 하셨다.
네가 알아야 하나님도 너를 안다.
주여, 주여 하지만, 성경에 주가 얼마나 많은가.
주는 영적으로 신을 말한다.
사람의 운명을 좌지우지 하는 존재다.
누가 네 운명을 좌지우지하는가.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부도를 막아주는 아버지, 병을 고쳐주는 아버지, 다 각각이다.
그러니까, 할 수 없이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할 수 밖에 없다.
채로 걸러낼 수 밖에 없다.
심판을 받게 되면 멸망한다.
아는 것 같으면서도 모르니까, 심판받을 수 밖에 없다.
그 심판은 자비가 없고, 긍휼도 없다.
나는 하나님을 시인한다고 하지만, 누구를 시인하는가.
그래서,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그가 보내신 자 예수를 아는 것이 진리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지금 우리 교인들 내가 자유한 것처럼 자유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을 것 같다.
하나님을 시인해야 하는데, 하나님을 뭐라고 시인하는가.
주기도문에서 이렇게 기도하라 하신다.
그렇지 않으면 중언부언한다.
믿지 않는 자들이 주여, 주여 목이 터져라 부른다.
60년대 산기도하면, 목이 쉬어야,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것으로 하늘에 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고는 못간다.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거룩은 구별하다는 뜻이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구별하여 알았습니다.
그냥 하나님하면 신이라는 뜻이다.
일본은 성경에 하나님을 전부 가미사마로 기록했다.
귀신도 가미사마다.
세상은 어떤 우상을 만든다.
어떤 사람은 태극기 걸어놓고, 기도한다.
뭐가 눈에 보여야 한다.
자기 눈 앞에 있는 자를 찾는다.
전부 육안으로 봐야 한다.
너희가 신령한 것에 대해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않는다.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 우상이 끄는대로 끌려다니지 않았느냐.
그러나,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 할 수 없다.
우리는 보는 것으로 주여, 주여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아는 자를 주라 한다.
지금 여기까지 들었다.
교회당에 잘 다니면, 영생얻는 줄 알았지만, 얼마나 무식했는가.
더구나 지도자들이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요 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
진정이라는 말은 믿음의 헌신이라는 말이다.
성령으로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 수 있다.
하나님은 영이신데, 사랑이시다.
사랑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이 있다.
하나님은 영생이시다. 전지전능하시다. 무소부재하시다. 하늘이시다.
이 모든 것, 오직 유일하신 자를 아바라 한다.
아바는 만유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그를 아버지라 한다.
아바가 아버지의 이름이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이가 아바시다.
예수는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시다. 그 이름을 예수라 하였다.
예수는 자유, 해방, 구원이다.
우리는 아바를 예수라 부른다.
모든 것은 아바로부터 나온다.
그는 만유보다 크시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사랑, 아바의 것.
영생 아바의 것.
전지전능, 아바의 것.
의, 아바의 것.
아바는 의와 공의를 보좌로 여기시고, 판단하시는 이시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런데, 다른 영과 같지 않다.
오직 아바는 하나이다.
만물 위에 만유가 있고, 만유위에 만유보다 크신 아바가 있다.
예수는 만유시다.
아바는 만유보다 크시다.
아바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하였으므로, 그를 아버지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바를 알고 불러야 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또 오늘도 알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다시 또 알 수 있도록 성령으로 도와주시고 저들이 아바를 알고! 알고!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아바를 알 자가 없고 성령으로 아바를 저들이 알고 시인하고 아바가 우리 하나님임을 시인하고 그가 우리 아버지임을 시인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이름 받들어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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