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015환언(강석준집사님 정리)
요 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모여들어서 예수 이름 앞에 무릎 꿇게 하시고 또 진리를 알고자 하고 깨닫고자 하오니 주님 말씀 하시기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신하며 진리를 아는 일에 우리 모든 심령이 하나되게 도와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옵고 원합니다. 오늘도 종을 붙드사 역사하여 주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성경에도 말씀하기를 너희가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어 경성하라고 하였다.
자연을 보면, 나무들이 봄에 싹이 나고, 여름에 잎이 무성하고, 가을에는 낙엽이 지고, 겨울을 맞는다.
이는 자연이라는 만물이 순리대로 흘러가는 것을 말한다.
우리 모두는 태어났기 때문에 세상에서 만물과 함께 지내다가 만물과 함께 세상을 떠날 날이 온다.
우리 모두는 이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 신앙생활은 영원히 가질 수 없다.
우리 육체가 있는 동안만 신앙생활 할 수 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택하신 대로 하늘에서 영생할 것이다.
예수께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으리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한해를 보면, 여름에는 비도 많이 오고, 나뭇잎도 무성하고, 열매도 풍성하다.
그런 후에 여름에서 가을로 들어설 무렵, 태풍이 몰려온다.
일본은 우리보다 태풍이 세배 이상 강하게 올라온다.
그런데, 9월 이후 가을태풍은 무섭다. 농사지은 것을 거의 다 버리게 만들고, 과일나무 가지를 찢어버리고, 나뭇잎을 다 털어버린다.
그래서 농부들의 한숨소리가 많다.
올해 태풍 때문에 망했다고 한다.
그리고 몇몇 가지에 남은 열매만 겨우 수확한다.
이 열매를 얻기 위해 벌레들이 틈타지 못하게 한다.
작은 파리들이 붙어서, 알을 까면, 그 때부터 썩기 시작한다.
그래서 거기에 봉투를 씌우기도 한다. 농부의 수고가 굉장히 많다.
예수께서 아버지는 농부시요, 나는 포도나무라 하셨다.
포도나무가 열매 맺지 않으면 아버지가 이를 제하여 버리신다고 하였다.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다.
우리가 이 말씀을 세상 책을 읽듯이 듣고 있지, 진리로 듣고 있지 않다.
우리가 매주 수만 명씩 예배드렸다. 그런데 태풍이 불어오니까, 우수수 떨어졌다.
열 번 이상 태풍이 지나간 후, 겨우 남은 가지의 열매와 같은 자들이 현재 우리 교회에 남아있다.
무슨 생각을 하는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시장하신지라, 무화과나무에게 찾아가셔서 열매를 찾으셨으나, 열매가 하나도 없었다.
그 나무를 탁슈라고 한다. 탁슈는 선무화과, 바람 불면 떨어지는 약한 무화과라는 말이다.
예수께서 이를 보고, 영원토록 네게서 열매 얻을 자가 없으리라 말씀하셨다.
그 열매는 예수께서 취하여야하시는데, 예수께서 취할 것이 없는 나무는 영원히 아무도 열매를 얻지 못한다고 하셨다.
우리가 이 땅에서 얻는 모든 것이 내 것이 되기 전에 먼저 주님이 필요하셔서, 주님이 사용하시게 해야 한다.
주님이 쓸 수 없는 무화과는 아무도 쓸 수 없다.
이와 같이 우리 교회는 태풍이 지나가서, 소망이 없는 약한 열매는 다 떨어지고, 나뭇잎도 떨어져 엉성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 태풍을 견디고 나면, 우리 성락인들은 다시는 태풍이 없이 농부가 추수할 날만 기다릴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에 수확하는 과일 중에서도 등급을 매긴다.
얼마나 과일이 농부가 기대할 만큼 훌륭하게 자랐는가.
등급을 정해서, 가격차이가 엄청나다.
일등품은 수출이 되지만, 이등 품, 삼등 품은 수출할 수 없다.
우리는 이제 태풍도 지나갔고, 약한 가지도 찢어졌고, 겨우 남은 가지에 있는 열매들이다.
이제 주인의 추수 날만 기다리고 있다.
그 때, 우리는 어떤 등급이 될 것인가.
내 영혼은 어디로 가나 책도 썼다.
영적으로 분명히 그렇게 될 것이다.
지금도 특강을 통해 계속 듣는 것은 영혼이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모든 교회들이 믿으면 천당 간다고 한다.
내가 믿을 때도,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고 들었다.
구원은 받을 것인데, 어떤 구원을 받을 것인가.
신부로서 구원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불 가운데서 나오는 끔찍한 상태로 심판을 받고 나올 것인가.
성경은 두 가지뿐이다.
그리스도의 신부로 공중에서 주를 뵐 것인가, 환란을 다 겪고, 불 가운데서 얻는 구원 같은 심판을 받고 구원을 얻은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신 것은 심판을 받지 않고, 구원을 받게 하려함이라 하셨다.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가.
이 땅의 재앙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육신만 죽으면 끝이다.
이 땅의 모든 재난이 영혼을 죽이지 못한다.
영혼을 죽이는 자가 따로 있다.
그래서 영혼을 죽이는 법을 도말하시고,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영생 얻도록 하기 위해 심판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신다.
심판에 대하여, 히브리서10장에서 말씀하기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심판하신다고 하셨다.
그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 진저 라고 했다.
육신은 단번에 죽을 수 있다.
고통스러워서 자살하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영은 자살할 수 없다.
죽을 수가 없다. 그 재앙을 피할 수가 없다.
이것은 영원히 저주받는 불행이다.
그리고 천국에 갈지라도, 심판받고 가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할 수 없다.
우리나라 과거에 서자가 있었다.
서자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나으리 라고 불렀다.
아들이면서도, 아들의 대우를 받지 못하고, 종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이것도 우리나라의 하나의 자연계시다.
심판받고 부활하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그냥 영생하는 것이다.
하늘에는 24장로와 함께 머물 수 있는 영광의 성곽이 있고, 그 성곽 바깥도 있고, 그 바깥도 있다.
성전에 보면, 지성소가 있고, 성소가 있고, 성전 뜰이 있고, 성전 밖이 있듯이 다 구별되어 있다.
우리는 성전 뜰을 통해 성소를 통해, 지성소에 이르러야 한다.
대제사장이 피와 함께 대 속죄일이 되면 지성소에 들어가서 피를 뿌리고, 속죄 받게 한다.
모든 사람들이 성품적인 약점이 있다. 쉽게 좌절하고, 낙심한다.
이것도 하나의 신념이다.
신념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념이 아니라, 신앙을 가지라 하셨다.
신념은 자기주장을 믿는 것이다.
이런 신념을 가진 자들이 쉽게 자포자기 한다.
자기가 이렇게 하면 될 것이라 하다가 안 되니까, 쉽게 포기하고, 자살해버린다.
이와 같이 오늘날 신앙생활 하면서도, 나는 배우지 못해서, 늙어서,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면서, 스스로 좌절하고, 자포자기 한다.
신앙에서 가장 큰 것이 소망인데, 이 소망을 포기한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가.
금년의 우리 교회 표어는 소망을 가지자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 두 가지가 있다.
첫 언약과 새 언약이다.
첫 언약과 새 언약은 하나님과 인류 사이에 맺어진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것이다.
인간이 요구한 것도 아니다.
첫 언약은 전부 구주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믿음이다.
구약성도들은 비유만 알았지, 우리의 죄를 다 사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약속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못한다.
첫 언약은 너희 죄를 속하리라 하시는 것이다.
내가 짊어지리라는 약속이다.
그런데, 피 없이는 속할 수 없다고 레위기에 말했다.
가인에게 네 죄가 문 앞에 엎드려있다고 하였는데, 피가 문 앞에 엎드려있다는 뜻이다.
죄와 피를 같이 보고 있다.
죄를 사해달라는 것은 우리 빚을 갚아달라는 것이다.
피가 죽었으니, 우리의 피를 찾아주소서라는 뜻이다.
그래서 죄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신 것이다.
예수란 이름의 뜻은 죄에서 구원이다.
예수란 이름이 너희 속에 있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내가 산 것은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가 산 것이라 하는 것이다.
내 생명은 죄로 인해 죽었고, 예수의 피가 내 안에 살아있다.
영적으로 실제 그렇다.
이를 주일날 성찬식을 통해 내 안의 예수의 피가 살아 계시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그가 흘리신 피와 부활, 이것을 우리에게 주셨다.
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죽어주셨다.
이것을 우리가 믿는 것이다.
내가 죽어야 할 죽음이 예수의 피로 인하여 살았다.
그 다음에 부활이라는 소망을 주셨다.
첫 언약은 그가 죽으러 오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에 양을 잡아 피를 흘렸다.
출애굽할 때, 문지방에 양의 피를 바르라고 하였다. 그 문을 통해 나온 사람은 이스라엘인이든, 어떤 민족이든 다 광야로 나왔다.
광야는 애굽과 반대되는 곳이다.
애굽의 풍성함이 없고, 모든 것이 고갈되어있다.
자연을 떠나, 매일 매일 하나님이 만나를 주시고, 이슬을 주셔서 하루하루 살아간다.
광야에서는 영원히 살 재물을 가질 수 없다.
매일 일용할 양식을 통해 살았다.
광야에서는 모든 것이 부족한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영광의 신분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이 길은 가나안 땅까지 가는 것이다.
가나안 땅은 사막이다.
노아의 아들 중, 함의 아들, 저주받은 이름이다.
여기도 하나의 메시지를 주고 있다. 거기서 누구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가나안 땅에서는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없다.
이제 그가 데리러 오실 것이다.
첫 언약은 죄의 빚에서 구원하신다는 약속이요, 새 언약은 하늘로 데려가시려고 오신다는 것이다.
첫 언약은 그가 죽으러 오신다, 새 언약은 너희를 데리러 오신다.
첫 언약대로 그가 죽으러 오셔서, 그의 죽으심이 우리에게 구원이 되었다.
우리가 이것을 믿는 것이다.
그의 죽으심이 우리의 구원이라는 믿음을 갖는다.
노예는 죄인을 말한다.
나도 어려서, 보리 한가마 빚을 얻어서, 그 빚을 갚기 위해 종노릇했다.
빚을 다 갚으면, 그 집에 더 있을 필요가 없다.
새 언약은 너희를 데리러 오신다.
아버지 집에 너희 처소를 예비하고, 너희를 데리러 온다고 하셨다.
우리는 죄로 인해 죽었고, 육신으로 인해서도 죽었다.
데리러 오시는 이가 우리를 부활케 하여 데려 가신다.
우리는 첫 언약에 머물지 않고, 이미 이루어진 사실을 믿고, 침례를 받았다.
그의 죽으심은 내 죄가 죽은 것이라고 그와 연합했다.
그리고 그가 부활하신 것을 믿는 것이다.
부활이 있고, 변화가 있는데, 부활은 예수께서 하셨고, 인간은 그와 함께 홀연히 변화된다.
이제는 썩을 육체가 아니라, 썩지 않을 육체로 홀연히 변화된다.
우리 신앙생활은 죄 사함받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죄 사함 받은 사람이 신앙생활 하는 것이다.
성령을 주시는 것도 예수 믿고, 침례 받은 자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자꾸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다.
단추를 처음부터 잘 껴야 한다.
내가 믿는 것은 내 죄의 빚을 갚아주신 것을 믿는 것이다.
그 증표로 피를 주셨다.
예수의 피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은 내 생명은 죽고, 예수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내가 산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다.
마귀가 이것을 믿지 못하게 하려고, 여러 가지로 유혹하고, 참소한다.
참소는 법을 위반했다고 고소하는 것이다.
법이 있으면 마귀는 역사한다.
율법 안에 있는 자들은 마귀가 계속 참소한다.
또, 양심은 선악을 아는 법이다.
이 법이 있는 한 계속 망할 수밖에 없다.
예수 믿으면서도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 양심의 법에 걸려서 죽는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킨다고 죄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다. 마음으로 범해도 죄라고 하셨다.
이방인은 율법이 없으니, 처음부터 양심부터 시작하고, 이스라엘은 율법으로 시작한다.
이스라엘이 십계명을 다 지켰어도 지옥 간다.
이방인은 양심 때문에 지옥 간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의 법을 주셨다.
성령의 법은 예수의 보혈이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예수보혈에 전적인 권위를 준다.
마귀가 아무리 유혹할지라도,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 하는 말로 저를 이기었으니, 죽기까지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운다.
양심 앞에 지면, 율법 앞에 지는 것과 똑같다.
종교는 구원이 없기 때문에, 양심을 의로 삼는다.
기독교는 양심을 의로 삼지 않는다.
기독교는 예수의 피,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의로 삼는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순종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지, 보혈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구원받았다는 뜻이 아니다.
오늘 이것을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
예수께서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은 절도요, 강도라 하셨다.
예수보다 먼저 온 구원이 없다.
예수께서 처음 들어가신다.
예수께서 부활의 첫 열매시다.
아무도 아버지께 간 자가 없다.
하늘에서 온 자만이 아버지를 보았다.
그가 처음 우주로부터 나와서, 하늘로 들어가셨다.
그것이 부활의 첫 열매다.
부활은 우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다.
그에게 속한 자들이 첫째 부활에 이르고, 나머지는 그 나중이다.
모든 종교는 양심을 의로 여긴다.
양심을 의로 삼기 때문에 도덕(질서)으로 표현한다.
이것은 기독교의 믿음이 아니다.
기독교는 전부 예수의 피를 의로 삼는다.
그렇게 설명해도 사람들이 이것을 안 믿으려고 한다.
계 12: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계 12: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 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 하였도다
목숨 내놓고, 예수의 피가 내 의라 주장한다.
마귀는 너 양심의 가책받지 않느냐고 한다.
양심의 가책은 심판받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조금 불순하면, 이것을 핑계삼아, 양심이 없다고 한다.
도덕은 양심이 바깥으로 드러난 것이요, 양심은 도덕이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법이 있기 때문에 마귀는 계속 참소한다.
마귀는 자꾸 법이 살아나게 역사한다.
율법의 권세는 죄요, 죄의 권세는 사망이다.
마귀는 사망권세자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다.
마귀가 참소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예수의 일이다.
율법과 양심의 법을 예수께서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다시 속이지 못하도록 그렇게 하셨는데, 오늘 신자들이 예수 믿어도, 종교인이 되어 있다.
우리는 양심이라는 교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구원받은 사람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도덕적으로 깨끗하다.
그러나 양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도덕적인 깨끗함을 갖는 것이다.
예수의 보혈은 우리의 믿음, 곧 우리의 의다.
우리는 끝까지 마귀의 유혹을 이겨야 한다.
성령으로서 예수의 피를 믿는 것이다.
예수의 피가 내 의다.
예수의 피가 성령의 법이다.
죄짓고, 예수의 피면 다되는가. 그렇다.
사람들이 이것을 무시하려고 한다.
죄를 백번 지어도, 회개하면 된다.
죄를 지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죄를 기억나지 않게 하신다.
아무리 신령한 목사라도, 평생 죄를 짓는다.
겉으로는 표가 안 나도, 마음속으로는 끝없이 죄를 짓는다.
마귀는 신자들에게 종교심을 자꾸 넣으려고 유혹한다.
종교심을 갖지 말고, 믿음을 가지라.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예수 믿으면 죄 지어도 되냐고 한다.
언제 죄 지으라고 했는가.
죄를 지면, 자꾸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
정죄 받으면, 그 정죄로 네가 심판받는다.
이런 가책을 받지 않게 하려고, 예수를 보내 사, 피 흘리셔서, 대신 빚을 갚아주셨다.
예수가 내 죄를 갚으신 것을 어떻게 믿는가.
성령이 주장하신다.
그래서 누구든지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 할 수 없다.
우리는 침례를 통해, 예수의 죽으심과 연합한다.
예수의 죽으심으로 내 죄가 이미 지옥 불에 간 것이다.
이미 지옥에 간 것을 왜 내가 찾아 뒤집어쓰는가.
그리고 그의 부활에 연합하는 것이다.
죽음은 첫 언약이요, 부활은 새 언약이다.
새 언약은 또 예수 죽으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도 그와 연합하여 부활에 참여한 자가 된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것에 대해서, 아벨 때부터 양을 잡고, 피를 흘렸다.
이제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는 양을 잡고, 소 잡는 것이 없다.
첫 언약이 이미 이루어졌다.
이제는 새 언약대로 그가 살아나신 것을 우리가 보았다.
사람들이 십자가에 매달았고, 창으로 찔렀고, 묻었지만, 부활하셨다.
열두제자가 예수의 부활을 보았고, 나중에 오백여성도가 일시에 보았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예수의 부활을 본 자들의 말을 믿는다.
에수의 부활에 대하여 성령이 증거 하신다.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수보혈이 생명의 법, 성령의 법이다.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
요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 3: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요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예수는 물과 피와 성령으로 오신이시다.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시다.
이를 증거 하시는 이가 성령이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옆구리에서 물이 쏟아진다. 그 육신의 죽음을 말한다.
그리고 피를 흘리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이가 피를 흘리셨고, 이를 증거 하신 이가 성령이시다.
성령의 증거를 받지 않으면 자유가 없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떠나면 너희들에게 성령이 오신다.
성령이 오시면, 교리적으로 알았던,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깨닫게 하신다.
그래서 침례가 그렇게 중요하다.
침례는 예수로 옷입는 것이다.
군인은 군복을 입어야 군인이다. 우리는 예수로 옷 입은 자가 되어야 한다.
이 땅에서 도덕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 양심이다.
우리는 도덕으로 옷 입지 않고, 믿음으로 예수로 옷 입는다.
침례가 그 표다.
침례는 구원의 표다.
다른 교단에서는 세례를 받는다. 세례와 침례는 전혀 다르다.
세례는 죄를 씻는 것이요, 침례는 죄를 씻는 것이 아니라, 장사지내는 것이다.
세례는 침례를 약식으로 고친 것이다.
주후 300년경 교황이 칙령을 내려서 침례 받지 못하게 하였다.
침례는 에수 이름으로 받는 것인데, 교황이 자기 이름으로 하려니까, 세례를 선포했다.
이 때, 침례 받으려는 그리스도인들을 침례 받게 하면서 익사시켰다.
그 후 천이백년동안 침례 때문에 5천만 명이 순교했다.
종교개혁 한다고 했지만, 세례를 개혁하지 못했다.
그저 종교를 개혁했다.
오늘날 기독교를 개신교라고 한다.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은 개신교라는 말인데, 오늘날 우리를 이단이라고 하는 말과 똑같은 말이다.
그래서 기독교를 개혁종교라고 한다.
장로교는 이것을 아주 자랑한다.
천주교에서 기독교인들을 비방하고, 욕하는 소리로 프로테스탄트라고 했다.
침례교는 프로테스탄트가 아니라, 그대로 침례인이다.
우리는 개혁한 적이 없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대로 이어온 것이다.
침례가 얼마나 중요한가
롬 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롬 6: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롬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롬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롬 6: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롬 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롬 6: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첫 언약에 대하여, 침례를 통해 믿음을 나타냈다. 그래서 죄(법, 양심)에서 구원을 얻었다.
새 언약에 대하여, 우리는 소망을 갖는다.
이제 죄 사함 받을 것, 구원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 영생을 소망한다.
우리는 죄에서 구원받아서, 침례를 받았다. 그리고 물위로 올라오면서 소망을 가진 자가 되었다.
생명의 면류관은 예수 믿으면 구원을 얻는 것이다. 끝까지 견뎌야 한다.
면류관을 빼앗길 수도 있다.
영광의 면류관은 하나님께 순종과 헌신을 하는 것이다. 이는 끝까지 하되, 영광의 면류관을 주 앞에 던져야 한다.
내가 헌신한 것은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한 것입니다.
주님을 두려워서 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영광이 없습니다.
다 주님의 것입니다.
청지기와 종들이 주인이 돌아오니까, 다 내놓는 것처럼, 영광의 면류관은 내가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벗는 것이다.
의의 면류관은 예수의 의(보혈), 예수의 공로로만 받는 것이다.
끝까지 가야지, 양심으로 돌아가면 끝나버린다. 한번 밖에 없다.
우리가 한 공간에 있지만,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놔둠을 당한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외국에서 오면 2주간 격리된다.
그와 같이 격리되어, 심판을 받으러 나온다.
구원받기 위해 헌신하고, 직분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예수의 의를 의지하다가, 마귀의 유혹으로 짐짓 죄를 범하면 심판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계속 들었으면서도, 적당히 들으면 안 된다.
아주 중요한 것을 오늘 말씀드릴 것이다.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5:35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요 5: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 하는 것이요
요 5:37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 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요 5:38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 함이니라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다.
태초는 원어로 이전이라는 뜻이다. 처음이 아니라, 그 이전이다.
태초이전, 곧 영원전이라는 뜻이다.
여기서만 쓰는 단어다.
말씀(로고스)이 영원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를 아는 것이 진리다.
이는 성령을 통해서만 아는 것이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다.
기독교인들은 말씀을 참 하나님이라 한다.
요일 5: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여러분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기 때문에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다.
오늘 여러분이 말씀을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는가.
왜 말씀이 하나님인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기 때문에 그 말씀을 하나님이라 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으므로, 하나님의 자녀라 한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고,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레마라 한다.
이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말씀이 아니라, 사람들의 말이다.
그러나, 로고스는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
[아바]
성령으로만 알 수 있다.
아바는 하나님을 칭하는 말이다.
말씀이 아바와 함께 계셨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구하실 때, 아바 아버지라 하셨다.
막 14:36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로마서의 양자는 그냥 아들이라는 뜻이다.
갈 4: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성령에 의해서만 하나님을 아바라 부른다.
아바는 말씀을 품고 계신 분이시다.
아바는 유일하시다.
이 세상 사람들은 신을 천지신명, 여러 곳에서 찾는다.
말씀이 거하시던 아바는 유일하신 분이시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바는 영이시다. 아무도 본 적이 없다. 오직 아들만이 보셨다.
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지니라
아바는 영원하시다.
아바는 사랑이시다. 사랑이 영원하시다.
아바는 전지전능하시다.
말씀이 유일하신 이, 영이신 이, 영원하신 이, 사랑이신 이, 전지전능하신 이와 함께 계셨다.
그러므로 그와 동일하시다.
아바는 하늘이시다. 만유의 아버지시다. 만유는 아들이다.
성경에 원래 하느님 번역이 맞지만, 기독교가 유일하심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이라 번역하였다.
요 10: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골 3:11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 할례 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그리스도는 만유의 아들 곧 하늘이다.
요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엡 4: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시다.
아바는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 알파와 오메가시다.
계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모든 것을 아들로부터 시작하신다.
끝까지 아들 이야기만 있는 것이다.
너희가 영생을 얻을 줄 알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 하셨다.
히 1: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히 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만유의 아버지는 아바시다.
만유는 아바가 창조하셨다. 그래서 그를 아버지라 한다.
만물은 말씀(아들)이 창조하셨다.
히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 니라
아바는 영광중에 계시고, 공의를 보좌로 하시고, 선악을 판단하신다.
하나님만이 심판자시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아버지께만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바 아버지의 것이다.
말씀이 그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그가 아버지시고, 우리도 그를 아버지라 한다.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 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아바」를 본 자는 말씀밖에 없다. 그 말씀이 거기서 태어나셨느니라.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그동안 말씀을 듣고 또 정리를 잘 했습니다. 저들이 말씀을 잘 깨달아 아바 아버지를 앎으로써 참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 이름 받들어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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