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114주일 [교회가 함께 깨닫고 알아야 할 그리스도의 사랑] 김성현감독(강석준집사님 정리)
에베소서(엡) 3장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된 우리의 모든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품으로, 모든 사랑의 진실로 우리를 위해 섬겨주셔서, 오늘 우리가 이렇게 주의 사람이 된 것이다.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토대를 이루는 지식]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이해해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절차다.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토대를 이루는 지식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사랑을 해야 하고, 사랑에 대한 지식도 있어야 한다.
사랑은 단지 개인들이 그리스도 교회에 속하기 위해 외형적인 정체성을 나타내는 표식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영적 지식적 체계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주제는 사랑을 중심으로 전부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신앙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할 때, 계속 사랑과 연결되어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랑을 깨닫고, 알고, 연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게 우리 신앙체계를 이해할 수 있다.
인식하고, 알아야 행동할 수 있고, 우리 자신도 분석할 수 있다.
단지 지식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대해서 알아지는 것은 우리를 영적 역사로 불러들인다.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면서, 특히 사랑에 대해서 상고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 안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영적인 하나님의 사역이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단지 사랑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취향의 선택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진노의 자녀에게서 벗어나게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성도를 보전하는 방법일 뿐 아니라, 우리가 위치해야 할 영역이다.
사랑이라는 영역 안에서 우리는 보호될 수 있다.
이 사랑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사랑이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사랑]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근원이 다르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친히 가지셨고, 그리스도에게서 모두 나타난 것이며, 당신의 것을 주신 것이다.
사랑을 아는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거의 동일하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사랑은 가장 중심적인 하나님의 성품이다.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목적을 다루기에 가장 근본적인 바탕이다.
또한 사랑은 성도를 죄의 굴레에서 보전하는 방법이다.
사랑을 행하게 하므로, 죄를 짓는 습성에서 멀어지게 한다.
죄는 습성에서 시작된다.
사랑하는 것과 죄는 성격상 반대다.
이전에 죄와 사망속에 있던 자를 반대쪽에 두어야 한다.
죄의 사슬을 끊어주신 것은 주님이시다.
보전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많은 책임이 있다.
죄의 정욕이 있으면, 절대 사랑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죄와 분리하기 위해 사랑해야 한다.
욕심이 있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
죄의 정욕을 버리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다.
반대로 사랑하는 사람은 회개하고, 봉사하고, 섬김을 다 할 수 있다.
그리스도 교회의 성격과 신자의 의무와 죄는 반대의 성격이므로, 훈련이 필요하고, 죄의 환경에서 분리시키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주님은 법적으로 사단의 권세를 깨시고, 우리를 구원하셔서, 우리 소속은 주님 안이다.
그러나, 구원해놓고, 안전한 곳에 두지 않으면 안된다.
법적으로 해 놓았지만, 우리도 안전한 곳에 가는 것이 사랑의 환경이다.
죄를 거절하는 우리의 자세를 나타내므로, 자기의 속성을 법적으로 자기가 선언한다.
나는 죄를 떠났다.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다.
사랑의 행위를 하면서, 이것을 나타낸다.
침례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침례하고 다시 범죄하면 소용없다.
침례는 자기의 결단을 나타내는 것인데, 그 다음부터는 사랑을 실천하면서, 자기 소속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렇게 사랑을 실천하면서, 지식으로도 습득할 필요도 있다.
인간은 지속적인 인지가 없으면, 중요한 것도 다 잊는다.
인간의 기억은 매우 짧고, 자극에 많이 빼앗긴다.
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게 된다.
[사랑은 교회가 함께 체험하며 알도록 주어진 지식]
사랑은 하나의 윤리적 덕성이 아니다.
사랑은 교회가 함께 체험해야 한다.
신기하다.
개인적으로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친절하게 하고, 성경이 명한 그런 내용을 익혀서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느정도 모양은 되겠지만, 교회에서 하는 것으로 사랑이 정말 살아서 역사한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회중 앞에서 변화된 자기의 결단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수 믿는 것은 단체적인 행위와 삶이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그렇게 하기 싫어한다.
단체와 조화되지 않는다.
매사에 손익관계를 계산하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에서는 교회가 하는 사랑을 하기 어렵다.
어느 단체든 걸끄러운 사람이 30프로는 있다.
교회는 그렇지 않다.
성령의 감동이 있다.
우리는 예수의 사랑으로 오늘도 우리를 돌보시는 행위 안에 우리 자신이 매체가 된다.
사랑의 행위를 하겠다고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신학적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 없다.
사랑은 하나님의 성품이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마지막날까지 견인하시는 모든 것은 사랑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구원하시고, 사랑을 행하게 하시고, 사랑안에서 보전하기 때문에, 사랑이 싫다고 하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주께서 명하시고, 기대하시는 대로 우리 모두 사랑안에서 뿌리내리고, 사랑을 알아가고 발견하는 자들 되자.
[사랑은 완전히 뿌리내린 후에 그 위대한 속성을 깨닫기 시작해]
사랑은 행위라는 영역에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영역으로서도 중요하다.
깨닫고, 알아야 한다.
이렇게 필수적인 지식은 인류가 항상 해왔다.
옛날 동굴에서 살던 원시인도 환경을 보고, 공동체에서 공유하는 지식을 가진다.
천둥소리가 나면 날씨가 어떻게 변하는지, 환경을 극복할 방법을 지식으로 만든다.
이와같이 하나님이 이루신 일들도 지식으로 체계화 되어야 한다.
거기에 하나님이 일하셨고, 역사하셨는데, 그냥 넘어갈 수 없다.
하나님의 손이 거기 계셨구나 다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 교회에 오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것을 서로 행하면서, 깨닫고 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해야 하는 의무도 있다.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사랑이 뿌리내리고, 터를 견고히 잡은 사람만 할 수 있다.
이런 구조를 볼 때,
첫째, 사랑에 완전히 젖어든 사람.
처음에는 뭔지도 모르고 했을 것이다.
교회에 처음 나와서, 사랑으로 주님이 살려주셨다, 사랑을 행하라 들었을 것이다.
일단 행위만을 하는데, 어느새 습관이 된다.
그러나, 무조건 그렇게 하지만 말고, 하나님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영역, 범위, 어떤 차원까지인지 알아야 한다.
나중에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생긴다.
사랑이 뿌리내린 교회 공동체가 시작해야 한다.
에베소서(엡) 3장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원래로는 3:19절이 먼저이고, 18절이 나중에 나와야 하는데, 번역상 그렇게 된다.
먼저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닫고, 성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시차적으로 순서가 그렇다.
사랑의 행위에 익숙한 자에만 보인다.
하나님의 사랑, 피뿌리신 희생이 다 보인다.
그 다움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개념이 체계젹으로 잡히게 된다.
그래서, 언젠가 하나님의 사랑의 충만한 경지까지 볼 수 있다.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
우리는 처음 예수 믿는 날부터 사랑하고 있다.
교회에서 가르치니까, 한다고 하지만, 애초에 왜 할 수 있을까.
성령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속에 부어주셨기 때문이다.
세상의 것을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주신 것이다.
신앙도 어색하고, 부족하지만, 하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부어주셨기 때문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사랑할 수 있다.
그의 사랑은 당연히 누구에게나 주어진다.
이 사랑은 성령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를 일으켜, 우리 안에서 사랑의 분량이 커진다.
성령의 열매라고 했다.
모든 성도들이 그 사랑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바란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에베소서에서는 이 사랑을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착한 사람만 아니라, 누구든지 할 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것이며, 또한 명령으로 주어진 것이다.
나는 싫어, 영적인 것만 하겠다고 하면, 성경을 보면 볼수록 궁지에 몰리게 될 것이다.
성경은 끊임없이 사랑을 말하고 있다.
신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행한 대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제 새이스라엘에게 회개를 촉구하신다.
신약 전체가 사랑의 명령이다.
이것은 생명을 다루는 문제와 동급이다.
싫다라고 해도, 말씀을 보다보면, 명령으로 굉장히 강압을 받는다.
결국 무릎꿇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도 하지 않겠다는 것은 성경을 읽지 않거나,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다.
성경 안 읽고, 설교말씀만 듣자고 해도, 사랑의 말씀은 피할 수 없다.
설교자도 성경에 기록한대로 말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떤지 깨달아야 한다고 했다.
사랑을 베푸시는 것에 대해서, 발견을 계속 해나가야 한다.
그런데, 왜 넓이, 길이, 높이, 깊이라고 표현했을까.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표현한 방법이다.
사실 넓이, 깊이, 아무 상관없다.
원래 유대인들만 하나님을 불렀다. 이 세상사람들은 귀신만 따라다녔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세상 모두를 향해 손을 펴셨다.
그것이 넓이 아닌가.
또,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기 위해, 영원전부터 잊지 않고 기다리셨다가, 나타나는 순간 구원해 내셨다.
이 길이를 보라.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면, 높이 올리신다.
에베소서(엡) 1장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깊이는 하나님께 원수되었던 자도 회개하면 구원하신다.
에베소서(엡) 2장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누구든지 회개하면, 어떤 죄인이라도 상관치 않고 살려주려고 하신다.
이 세상에 있다고 절망적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의 체험이 있지 않는가.
예배드릴 때, 찬양할 때, 체험을 한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안에 다 들어있다.
넓이, 길이, 높이, 깊이, 구체적으로 기억하겠다고 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무한함, 포괄성, 완전함의 범위를 나타내기 위해 표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하나님의 구원과 동일하다.
하나님의 애쓰시는 사역의 진심이 그 안에 다 있다.
[세상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랑]
세상에도 사랑, 친절 그런 덕목이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흉내내는 것 같아 나쁘지는 않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들의 것이지, 하나님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정도 되면, 사랑하지 않아야 하는데, 사랑하신다.
성격 자체가 다르다.
세상 윤리도 있지만, 이것은 아주 기초수준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권위와 가치, 순수성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세상은 작은 부분 가지고, 교회의 사랑과 세상의 사랑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사랑은 매력에 끌리는 사랑이다.
자기가 끌리면 사랑이다.
나를 나쁘게 하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상처를 받아도 사랑한다.
반대해도, 다 섬겨주어야 한다.
세상의 사랑은 무언가 이득이 있을 때 한다.
나에게 이익이 없으면 버린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줄 것이 있어서 한다.
주기 위해 하는 것이다.
이 사랑을 하나님이 우리 안에 주셨다.
교회에게 주신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순종하는 것과 성령의 힘을 힘입어 우리의 것이 된다.
이것은 영적 변화다.
순종속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주지 않고, 명령하는 법은 없다.
먼저 주고 다음에 명령하신다.
먼저 주었는데, 싫다고 하면 안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순종할 때, 성령이 역사하신다.
고린도전서(고전) 8장
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지식은 한계가 있다.
그러나, 사랑은 다르다.
고린도전서(고전) 13장
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빌립보서(빌) 4장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의 평안으로 평안하라는 말은 기분 좀 바꾸라는 말이 아니다.
내가 평강이 없는데, 평강하라는 말은 소용없다.
누가 평강을 주어야 한다.
하나님이 너를 평강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도 그런 것이다.
세상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니까, 가치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으로 사랑하고, 살려고 한다.
[지식을 능가하는 그리스도의 사랑]
넓이, 길이, 높이, 깊이를 다 알고 나면,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더욱 체계적으로 체험한다.
이제 인격적으로 그분의 사랑의 모양이 그림이 그려진다.
수년간 같이 산 사람처럼 내게 익숙해질 것이다.
단지 인지정도가 아니게 된다.
에베소서(엡) 3장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리스도께서 알도록 역사하신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지식을 넘어선 것을 아는 것이기 때문에 모순같지만, 하라고 하신다.
세상이 모르는 영역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될 것이다.
지식에 넘치는...지식을 넘어선 영역을 말한다.
이것은 교회 전체가 공유하는 지식이다.
[교회 전체가 공유하는 사랑의 지식]
서로 체험속에서 발견해 낸다.
서로 사랑에 대한 감동과 진실이 속에서 성장해 간다.
온 성도가 함께 공유한다.
골방에서 하나님의 말씀 말해봤자 되지 않는다. 서로 사랑하면서 우여곡절속에서 알아진다.
개인적으로 도저히 얻을 수 없다.
공동체를 겨냥한 함께 공유한 영적 통찰력으로 알게 되는 것,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 땅에 오셨다.
이제 우리가 행하고, 완전히 사랑에 정착되었을 때,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이 과정에서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이 땅에 오셨던 그리스도의 사랑이 오늘 우리안에서 역동한다.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구분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사랑은 똑같다.
다 독립적이면서 똑같다.
로마서(롬) 8장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앞에는 그리스도의 사랑, 뒤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다. 구분치 않는다.
갈라디아서(갈) 2장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기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초점이 있다.
고린도후서(고후) 5장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에베소서(엡) 2장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에베소서(엡) 5장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고린도전서(고전) 8장
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되었느니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도 그 사람을 아신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섬길 때, 그리스도도 아신다.
에베소서(엡) 5장
10.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익숙해지고, 그가 베푸신 사랑으로 나를 보호하고, 견인하고, 사랑하고 있었음을 아는 자가 되자.
다른 성도를 보고, 서로 먼저 발견하고 깨닫자.
다 예수 닮은 꼴을 많이 보고, 하나님의 사랑의 개념을 많이 구축하는 자가 되자.
그래서, 원수에게서 잘 보전되기 바란다.
영원한 나라로 당신을 높이기 위해, 긴세월을 기다리시고, 견인하시는 사랑을 알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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