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예배

자유와 책임(연합250330)

lks8284 2025. 4. 4. 00:09

자유와 책임(고린도전서 10:23~24)

2025330일 성락교회 주일연합예배 설교: 김성현 감독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린도전서 10:23~24)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디에 모시고 계십니까? 물론 어떤 차원에서, 어떤 맥락에서 다르게 얘기할 수 있지만, 제가 원하는 대답은 내 마음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한 가지 물어볼 게요. 교회에 등록하고 교회 잘 다니면 구원받습니까? 그러면 천국 갑니까? 아니에요? 뭐라고 대답하기 어려운 괴상한 질문이었지만, 여러분과 나는 같은 마음으로 나누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은 우리 마음에 모시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 마음 가장 중심에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는 두 번째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의 마음을 보실 때 그 마음이 옳다면, 겉의 행동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무를 보고 열매를 안다하셨습니다.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7:17)”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이 말씀에 해당됩니다.

 

그다음 말씀은 이렇습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7:18).”고 했습니다. 19절에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7:19)”라고 했는데,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게 바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7:20) 한 것입니다. 열매를 보고 그가 어떤 자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어떤 결과, 그 열매를 보고 말이죠.

 

열매는 무엇에 의해 이루어집니까? 자기가 무엇인지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나 자체가 좋은 나무인지 아닌지, 또 그 결과도 만들어내고, 나아가 천국에 가느냐 마느냐에 문제까지 다. 그래서 요점적으로, 마태복음 721절만 보면,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면서 주님!”, “주님!” 하면서 시작부터 화려하게 열심을 내었다 해도 좋은 나무가 아니었다면 어차피 그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7:21)고 했는데, 이 말씀은 진정으로 마음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자들을.

 

그러므로 단순히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것이, 매주일 예배도 참석하고, 교회의 모임도 빠짐없이 참석하고, 일주일에 한번씩 성경도 보는 등 신앙인의 겉모습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것만 보고 좋은 나무인지 아닌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외적인 것들은 참된 나무라면 당연히 자기가 노력하고 또 추구함으로써 나타나게 되는 것들이긴 합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또 더러 어떤 교회에서는 이런 식의 종교적인 일상과 외형을 갖는 것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이나 정신적인 소속감 같은 것으로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여기기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 짚은 것입니다. 이건 특별히 우리 교회에서만, 저만 선포하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의 요점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수십 년간 잠만 자 온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교회에 빈번한 출석이 여러분에게 천국에 갈 권리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마음이 구원받은 마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구원받은 사람으로서의 그 마음이 합당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데리러 올게. 저 하늘에서 너희의 처소를 준비하고 있을게.”라고 했습니다. 신약교회에 와서는 주님의 제자 정도는 되어야 천국에 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신약교회가 시작된 이후에는,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제자’, disciples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과거 어떤 신상을 향해 주여라고 부르짖었던, 숭배에 집중된, 숭배라는 모습으로 형성되고 모였던 그런 종교행위와는 전혀 다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격적으로 그분을 뵙습니다. 예수라는 특정한 분과 감각적으로 느끼고, 그분의 음성과 말투, 약속, 그리고 그분이 흘리신 눈물까지도 그대로 담아서 전달받은 특권이 있는 자들입니다. 특별히 바울 서신을 보면 그렇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께 직접 배우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도들의 말 하나하나를 열심히 들었습니다.

 

천국 가는 데 있어서 신앙의 외적인 형태는, 외모적인 부분은 두 번째 문제입니다. 그것은 그 나무가 어떠냐에 따라서 나타나는 결과일 뿐입니다. ‘난 교회를 위해서 많은 일을 했다는 외형적인 성과로는 그 사람의 신앙의 진정성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 교회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오해가 많은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 간부 정도 되면 하하하, 나는 최소한 천국의 바닥은 차지했겠지? 차디찬 아랫목은 아니더라도 윗목 정도는 확보했다. 적어도 턱걸이는 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그래도 문턱은 넘었지, 천국 문 안에는 들어갔어.” 천국 가는 것을 그 정도로만 봅니다.

 

그런데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시각을 바꿔야 합니다. 기독교의 유전을 다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 발판을 통해 우리가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시스템자체는 갖고 있어야 하지만, 그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본질은 따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과거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임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자기들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속, 유태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늘에 갈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들이 말로는 신자라 하지만, 실제로는 좋은 나무가 아니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들이 이미 탈락의 기준에 있는 자들이라는 것을 아시고 주님은 속상해하셨습니다. 그래서 천국은 언제 옵니까? 우리가 들어가야 되는데요?’라고 말하는 유대인을 향해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17:20~21).

 

물론 이것은 영적인 말씀이기 때문에 어떤 특정 의미로만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모신 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고, 하나님을 마음에 모신 자가 이미 구원받은 자이며,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있는 가는 자가 진정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자입니다. 우리의 외형적인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의 본질은, 사람의 속이 어떤가에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면, 어떤 유대인이 등장합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겉으로 보면 훌륭한 신앙인처럼 보였습니다. 기도도 많이 하고, 기도 말도 화려했습니다. 시장 모퉁이에 서서 그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며 기도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믿음있는 자로 보았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이 아니라 오히려 나무 밑에서 가만히 있던 나다나엘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함이 없도다." 당시에는 이스라엘이라 하면 이스라엘의 피를 가진 사람들 곧 유대인을 의미하는데, 그 많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나무 밑에 서 있는 나다나엘을 향해 참 이스라엘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나다나엘은 그 속이 신실했던 것입니다(1:47).

 

우리가 사태를 통해 간사의 영, 간사한 기운들이 많이 빠져나갔습니다. 사태가 있은지 이제 8~9년째가 되었는데, 지금은 우리 성도들이 전보다 훨씬 더 깨끗하고 순수합니다. 악한 영, 간사의 영들이 많이 빠져나갔습니다.

 

"양심 그런 거 필요 없어! 믿기만 하면 되지! 하나님은 믿냐 안 믿느냐에 따라서"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3장에 보면, 침례 받는 사람이 뭐냐? 나는 내 속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내 진심으로, 진실함으로, 순수함으로 달려가겠습니다!”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벧전 3:21). 침례를 받은 사람은 사회도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압니다. 사람들의 사이에서 "누구 침례 받았다더라, 저 사람은 크리스천이래, 기독교인이래" 하고 알려집니다. 그러나 그렇게 겉으로도 드러났지만, 그 마음이 씻어진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도 계속 말하듯, 신앙의 본질은 마음이 씻어지는 것입니다. 그냥 겉으로 씻는 게 아니라, 양심이 씻겨져야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 양심이 어땠을까요? 예를 들어 이거 얼마입니까?” “만 원입니다.” “그래요? 여기 있습니다.” “아니요, 만 오천 원이에요.” “방금 만 원이라 하지 않았어요?” “아니요, 만 오천 원이라 했어요.” 이런 식이었습니다. 물론 이 예화가 그렇게 멋지진 않지만, 현실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탐욕이 자리잡아, 교회를 돈벌이 수단처럼 여기고 지도자가 불리하고 연약한 상황이면, 오히려 쳐들어와서 때리고, 이용하려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로마서 213~15절에 보면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2:13~15)”라고 했습니다. ‘율법이 없는 사람은 어떡하냐?’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예수 믿는다고 하며 기도하는 사람보다 더 나을 수 있습니다. 양심 자체가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심어준 기능이기 때문입니다. 문화가 달라도 양심은 선과 악을 판단하게 합니다. 결국 율법이 하는 기본적인 기능 정도는 양심이 대신할 수 있는 것이죠.

 

율법은 악한 것을 하지 말고, 선한 것을 하라는 것입니다. ‘선한 데는 지혜롭고 악한 데는 미련하라고 한 로마서 1619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양심이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양심에 화인 맞아버려서 양심이 기능을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손이나 발에 자주 사용하는 부분에는 굳은 살이 생깁니다. 권투선수들은 주먹에 굳은 살이 배겨서 그 부분을 아무리 꼬집어도 아프지 않습니다. 축구 선수들도 발등에 딱지가 져서 아무리 새게 때려도 아픔을 느끼지 못합니다. 양심의 화인 맞은 사람도 양심에 굳은살이 배긴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신앙인이 된 후부터 하고 싶은 것을 다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고 우리가 자유를 얻었습니다. 어떤 자유냐? 이전에는 마귀가 이거 해. 좋아. 너 기분 좋을 거야.” 하면 그래? 진짜? 알았어.” 하고 했습니다. 혹시 , 근데 나 그거 하면 좋지 않을 것 같은데하고 마귀의 요청을 거절도 해 보지만 마귀가 위협하면 무서워서 마귀가 시킨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우리는 마귀에게서 해방되었습니다. “원수 마귀가 그 동안 너를 속였다. 그러나 내가 너의 죄를 사했으니, 이제는 사랑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살리는 법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회개하는 자들을 천국에 데려가려 합니다. 그가 보시기에 합당한 자를 데려 가십니다.

 

그런데 이미 해방해 주었는데도 여전히 범죄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몇십 년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면서도, 신앙훈련을 잘 받았다고 하면서도, 심지어 목사들조차도 그 심령 안에 예수가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안에 예수가 계시면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주 예수 내 마음에 들어와 계신 후~망령된 행실을 끊고~” 하는 찬양의 가사처럼, 예수께서 내마음에 들어와 계시니 범죄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악한 일을 하고 나면 괴롭고, 죄송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충성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겉으로만 의롭게 행하고 하나님, 저 이제 의롭습니까?’ 하는 것은 과거 유대인과 똑 같은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을 향해 너는 하나님과 멀다. 말로는 나를 존경한다 하는데 네 마음은 내게서 멀다.”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새의 아들들 중에서 기름 부을 자를 찾으실 때, 사무엘 선지자가 보기엔 장남이 멋있고 잘생겼지만, 하나님은 아니다.” 둘째도, 셋째도 아니다.” 결국 말도 제대로 못하고, 빼빼 마른 막내, 다윗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마음이 내게 합당하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을 오해하지 말기 바랍니다. 여기 젊은 영혼들도 있는데, 신앙은 겉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은혜를 따라, 그 은혜를 갚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죄 많은 우리를 그가 해방시켜 주시고, 우리 사해 주셨기 때문에, 이제는 죄가 시키는 대로, 죄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지 않습니다. 전에는 마귀가 이거 해 봐.”라고 할 때 하기 싫어서 거절해도 너 혼날래?” 하면 마귀가 무서워서 따랐습니다. 그런데 주로 인해 마귀의 노예되었던 데에서 풀려났습니다. 이제 당신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는 당신의 주님입니다. 주님께 팔렸습니다. 그가 자기 목숨을 버려서 우리를 사셨습니다. 이것이 자유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내가 하고 싶은대로, 내 마음대로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빵이 하나 있는데, 성도들이 보입니다. 그럴 때 오기 전에 빨리 먹어야지!’ 하지 않습니다. 나눠주기 위해서 일부러 기다립니다.

 

저도 내가 해도 되는데 안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 안에 있도록, 그들이 그 사랑을 느끼도록, 삶에 있어 하나님 안에서 기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나를 통해 저들에게 전달되도록, 저들의 예수 믿는 삶이 행복하도록 저는 제 선의로 그렇게 선택한 일들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복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일과 세상의 일 모두에서 복받은 사람이 좋은 나무가 되는 것이고, 좋은 나무에게서 좋은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그런 내가 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 드리는 말씀은 신앙에 있어서 양심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과거 우리의 신앙은 양심을 묻지 말라는 식이었습니다. 양심이 없으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총을 쏴서 사람을 죽이고도 "몰라, 그냥 쐈어. 재밌을 것 같아서."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 오늘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신앙을 오해하지 마시고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모시는 선한 마음을 가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시다. 악한 것을 하지 말고, 선한 것을 택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선한 마음으로 교회를 섬겨 주십시오. 그 선한 마음으로, 주께서 우리 성락교회를 통해 하시는 일들에 헌신해 주십시오. 주님을 모시는 심령으로 힘을 내어, 우리 하나님께 힘이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마귀에게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께 칭찬받는 영혼, 하나님이 사용하시기에 기쁨이 되는 영혼들 다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기의 육신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지 말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성도들에게 기쁨이 되는 대로, 우리 교회가 성공하는 대로 자기 육신의 의와 수고를 주님 앞에 결단하여 드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녹취: 성락교회 성락선교센터

 

[출처] 20250330 자유와 책임(고린도전서 10:23~24) 성락교회 주일연합예배 김성현 감독|작성자 태초에 말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