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511주일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김성현감독(강석준집사님 정리)
엡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명하신다.
이 명령은 모든 부모들에게 주시는 하나의 경고이다.
[자녀를 노엽게 하는 부모에 대한 하나님의 근심]
자녀들은 하나님 사역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진심으로 양육하려는 사육의 대상인데,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일이 성취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녀는 부모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부모된 자들에게 일정 시간만 양육의 책임을 맡긴 자들이다.
그러나, 많은 부모들이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자녀를 자기의 소유물처럼 여기고 있다.
어리고, 부족하고, 자기 육신을 통해서 나왔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대로 취급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자기 감정의 배설구로 사용하기도 한다.
너무 많은 경우, 부모의 무신경과 신경질적이고 폭력적인 양육의 손에 있기 때문에, 자녀들의 운명이 방향을 잃고 바뀌기도 한다.
운명의 방향도 바뀌고, 아이에게는 더욱 잔인한 세상의 길이 기다리고 있다.
오늘 자녀들은 위기의 시간을 걷고 있다.
부모에게 맡겨진 시간은 위기의 시간이다.
아무쪼록 자녀들이 무사히 지나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성공을 빌 뿐이다.
각 자녀는 하나님이 지으시고, 기르시는 존재다.
하나님이 낳으신 것과 다름없다.
각 자녀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다.
내가 중간에 끼어들어 방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관계가 있다.
그들의 영원한 삶 가운데 이렇게 중요한 것이 없을 것이다.
나는 그 영혼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결코 방해해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도록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내 뜻대로 이렇게 저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양육권의 한계를 주어, 충실하게 길러주라는 명령 안에 있다.
우리는 충실한 책임을 다할 뿐이다.
본문의 말씀도 이런 사실과 중요한 관련성을 갖고 나누고 있다.
[부모의 도리]
엡6:1-3까지는 자녀가 부모에게 해야 할 도리를 선포했다.
엡6:4에는 부모가 자녀에게 마땅히 가져야 할 도리를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은 얼핏보면, 충분히 귀를 귀울일 만큼 충격은 아니지만, 과거에는 굉장히 강렬한 메시지였다. 당시 사회관습에 역행하는 말씀이었다.
당시에는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굉장히 긴급하고, 강력하게 주어져야 하는 말씀이었다.
[아비들아]
부모중에 '아비들아'하고 부르고 있다. 당시 사회에서는 흔히 기대하고 있는 말이다.
아버지가 대표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아비라고 하지만, 사실 양쪽 부모 모두를 말하고 있다.
부모 모두 순종해야 할 말씀이다.
그런데, 왜 굳이 부모라고 하지 않고, '아비'만 언급했을까.
당시에는 양육의 최종 책임은 아버지에게 있기 때문이다.
사실 어머니가 기르는 경우가 많지만, 책임은 아버지에게 있다.
그리스, 로마 문화, 유대적 신앙정신을 갖고 있는 사회에서 최종책임을 갖고 있는 자는 아버지다.
로마, 헬라 모두 아버지가 지배하는 가정구조다.
가정에서 자녀에게 노여움을 줄 수 있는 상대가 누구인가. 아버지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양육에 관한 최종 책임을 가진 아버지가 그 장본인이다.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어떤 상대가 내게 계속 반복적으로, 지속되는 행위를 하며, 상처를 준다. 그러니까, 뿌리깊게 아픔이 자리잡고, 분노와 억울함이 견딜 수 없을만큼 끓어오른다.
적대심의 형태로 터져나올만큼 꽉 차 있는 것을 말한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은 당시 사회에는 반기를 드는 말씀이다.
골3:2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찌니 낙심할까 함이라
당시 사회는 자녀에 대한 인격 존중이 없었다.
성경 말씀이 주어질 때는 어떤 사건이나 역사적 사실에 대한 배경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주시는 말씀은 그 이후 미래의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길잡이가 된다.
어떤 특정한 사건에 의해 발생했기 때문에, 그것이 쓰여진 글이 성경에 자리잡고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
그래서, 당시와 똑같이 적용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충분히 훈련된 목자에 의해 재선포되어야 한다.
사회적 변화가 너무 심하게 된 이후에는 조심스런 재해석이 필요하고, 조정된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시대를 불문하고, 어느 시대든 아우르는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 있어서,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그대로 불러오고 있다.
그래서, 최소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는 분명히 전달된다.
그래서, 어느 시대든 오래된 성경이라도 거기서 하나님을 뵐 수 있다.
본문을 위해서는 당시 상황도 설명할 필요가 있다.
당시 에베소 지역은 오늘과 너무 다른 상황이었다.
당시 가정에서 구성원끼리 존중은 없었다.
아랫사람에 대한 존중, 따뜻한 아버지의 사랑, 이런 것은 개념조차 없었다.
오늘은 당연히 여겨지는 것이 아버지의 사랑이지만, 당시는 금시초문같은 개념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소유한 노예나 가족구성원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자였다.
즉시 쫓아낼 수 있고, 노예로 팔아버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
누구도 그 책임을 묻지 않는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갓난아이인데도 그 운명은 아버지의 한개의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
아버지가 받아들이면 살게 될 것이고, 모른척하면, 처분된다.
처분된다는 것은 아이를 버리는 것이다. 그중에는 죽게 되기도 하고, 건강하면, 노예가 되기도 한다.
1세기 당시 편지기록이 있다.
당시는 평범한 내용이지만, 오늘은 충격적인 내용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그 내용 중에 자기가 돌아갈텐데 그 아이를 잘 부탁한다고 한다. 지금 기르고 있는 아이는 살게 할 것이고, 만약 또 아이를 가지면, 남자는 살게 하고, 여자는 처분하겠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있다.
첫째 아이는 그냥 살려두고, 다음 아이는 상황에 따라 다른데, 여자 아이면 처분하자고 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이런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는데, 본문의 말씀이 주어졌다.
당시 사회에 반하는 말씀이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졌다면, 그 말씀이 갖고 있는 중요성에 대해서 눈치채고 깨달아야 할 것이다.
[자녀를 노엽게 하는 원인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 주어졌는데도, 오늘도 자녀를 노엽게 하는 자들이 많다.
자녀를 노엽게 하는 구체적인 행위나 과정이 어떻게 될까.
과잉보호도 해당된다.
꼭 그렇게 할 필요는 없는데도, 자녀에 대해 숨이 막히게 간섭하는 것이다.
좋은 의미로 한다고 하지만, 과잉보호는 아이를 괴롭게 한다.
아이들이 하고 싶어하는 것에 대해 너무 제약을 많이 주고, 아이를 신뢰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부모와 장벽이 생긴다.
아이들은 조심스럽게 도움을 주어야 하고, 제약들도 적절히 가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도 온전한 권리를 가진 인격임을 알아야 한다.
자기 나이에 맞게 적절한 결정을 하도록 유도해주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마흔살이 넘어도 자기 결정을 못 내리는 경우가 많다.
아이에게는 어느 정도 의지를 유도할 수는 있지만, 통제해서는 안된다.
또, 자녀를 노엽게 하는 일 중에 편애도 있다.
자녀들이 여럿 있을 때, 한 자녀를 다른 자녀와 비교하면서 비판하는 것.
이런 일은 그 아이에게 심각한 손상을 일으킨다.
아이는 좌절하게 되고, 비통한 마음으로 대충격을 받고, 그 아이는 삶에 대한 의욕을 잃게 된다.
또, 자녀를 노엽게 하는 일 중에는 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선 일을 요구하는 것이다.
일등해야 한다. 무엇이 되어야 한다.
이러면, 자녀는 자신이 부모를 기쁘게 할 수 없는 존재라고 배운다.
무언가 잘 이루어도, 또 다른 목적이 앞에 있어서, 그는 계속 어두운 길을 끌려다니게 된다.
부모는 환상에 빠져 기분이 좋을 것이다.
부모는 자녀를 자기 욕심을 이루는 도구로 삼으며 기뻐하는데, 그러는 동안 자녀는 삶의 의미를 상실한다.
또,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은 부모가 칭찬에 인색하여, 자녀를 낙심케 하는 것이다.
칭찬을 듣지 못하는 자녀는 삶에 대한 자신감이 없고, 낙심하고 있다.
이로 인해, 인생은 대단히 불행한 시작을 했다.
경주를 해야할 스타트 선에서 너무 불리한 시작이다.
낙담하며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가 잘하는 것이 있다면, 하찮은 것이라도 칭찬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칭찬에 인색하면, 나는 무능하다, 옳게 할 수 없다고 확신을 갖게 된다.
그 순간부터 아이는 모든 일에 대해 자신이 없다.
사람이 하길 원하는 일을 다 하기 원치 않는다.
아이는 잘하는 것이 뭔가 있다. 그것을 찾아내어 칭찬해주어야 한다.
아이는 칭찬에 목말라 있다.
그 칭찬에 얼마나 용기를 얻겠는가.
이것을 잘하니까, 기쁘다, 고맙다. 이런 의사를 전달해주면, 아이는 용기를 얻을 것이다.
또,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경우는 자녀를 소홀히 여기는 것이다.
자녀의 존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
오늘날은 자녀를 많이 낳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일은 많지 않을 것이다.
자녀를 열씩 낳으면, 부모의 눈이 한번도 닿지 않는 아이도 있을 것이다.
자녀를 소홀히 여기면, 자녀는 자기가 부모의 행복을 가로막는 자라고 고심하게 된다.
또, 자녀를 노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이가 미성숙하다고 야단치는 것이다.
철이 없다고 꾸짖는 것.
어린아이는 철이 없는 것이 정상이다. 어린아이는 어린이다워야 한다.
이것은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하나님이 그런 어려운 짐을 주신 것이다.
힘들지만, 견뎌라. 그것에 대해 불만할 수 없다. 오히려 더 격려하고, 기다려 주어야 한다.
하늘이 정해준 것 이상의 속도로 할 수 없다.
또, 자녀를 노엽게 할 수 있는 것은 부모의 사랑을 보상의 도구로 쓰는 것이다.
아이가 잘할 때는 사랑해주고, 잘못했을 때는 쌩하게 등돌리는 것.
아이가 사랑받지 못하는 차가운 곳으로 내몰리는 것.
그런 일은 아이에게 잘 전달된다. 아이들을 벌을 수는 것은 미워하기 위한 선포가 아니다. 사랑이 전제되어야 한다.
또, 자녀를 화나게 하는 것 중 가장 나쁜 것은 학대다.
옛날에는 자녀에게 매를 때리는 것은 많이 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육체적 폭력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러나, 육체적 폭력 못지 않게 나쁜 것은 정신적 학대다. 말로 하는 폭력.
부모는 아이를 언어와 분위기로 압도하려고 한다.
말을 몇마디 하지 않았는데도, 우월하다. 엄청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데, 빈정되며, 엄청 옳은 것으로 포장한다. 이런 것은 아이에게 굉장한 피해를 가하는 것이다.
일반 사회에서는 감히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자녀에게는 한다.
이런 사람은 자기 성질로 아이에게 화풀이 한다.
권위남용, 독선, 공평하지 않고, 뭐든지 죄를 찾아내려고 하고, 자녀의 괴로움에 대해 감정을 나누지 않는 것, 자녀를 노엽게 하고, 자녀의 인생을 너무 힘들게 시작하게 하는 것이다.
부모가 자기 욕심으로, 자기가 원하는대로 하는 것이다.
[창소년 문제]
청소년 문제는 어떤 부모에게든 두려워할 수 있는 문제다.
청소년 문제는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자녀를 상처추고, 방치하면서, 성취에 대해서만 야단친다.
부모가 도리를 하지 않는 자.
이런 것들이 청소년 문제를 가속화하고, 주원인이 된다.
가정은 공정하고, 일관성이 있어야 하고, 충분한 애정을 갖고, 가정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한다.
이것은 자녀에 관한 어떤 학문에서도 공통된 요건이다.
함께 마음을 나누며, 사귀는 것.
또, 본보기가 되는 것.
자녀에게 요구는 많은데, 자기는 본보기가 되지 않는다.
아이는 부모에게 배운다.
[교양으로 (양육)]
성경은 알아서 잘되겠지 하지 않고, 구체적인 지시를 내린다.
아이를 교양으로 양육하라.
엡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교양과 훈계.
두가지 방법을 따라, 양육하라.
교양이라니까, 우아하고, 세련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교양은 원어에서는 아이를 훈련한다는 뜻에서 파생된 말이다.
징계를 통해, 아이의 잘못된 것을 교정하는 것이 교양이다.
성경을 막 읽어내려가면, 그 뜻을 오해할 수 있다.
오히려 훈계를 징계를 통해 교정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잠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 때 가르치면, 늙어서도 잊지 않는다.
그러므로, 징계는 필요하다.
그렇게 말하면, 어떤 부모는 몽둥이부터 찾는다. 징계가 꼭 매를 드는 것은 아니다.
그에 상응하는 징계의 수단이 있을 것이다.
잠13:24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그러나, 1세기 당시에는 매를 칠 수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초달은 매를 치는 것이다.
잠29:15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이외에도 구약신앙은 자녀에 대한 교양의 중요성을 많이 말하고 있다.
교양은 아이의 의지를 조정하여, 아이의 틀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컨트롤 할 수 있도록 가르칠 필요가 있다.
자기 의지를 꺾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자기 의지를 그냥 놔두면, 아이는 자기 몸으로 사는 인생도 망치고, 영혼도 망칠 것이다.
[훈계로 (양육)]
교양을 통해 인격의 틀이 되었다면, 이제 채워넣어야 한다.
교육내용이 바로 훈계다.
교양이 체벌을 통한 훈련이었다면, 훈계는 말을 통해 아이를 훈련시키는 것을 말한다.
교양이 육체적으로 체계를 잡고, 훈계는 말을 통해 한다.
잠언은 아이의 훈련을 위한 절대적 지침이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잠언의 말씀은 정확히 인간을 해부해놓고 있다.
어떤 사실적인 정보를 얻기 보다, 옳은 행위와 태도에 대해 날카롭게 그려놓고 있다.
그래서, 잠언을 통해, 유대인들은 교육을 해왔다.
[주님의 (교양과 훈계)]
교양과 훈계는 주님께 속한 것으로 해야 한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자기도 모르게 가르치는 것이 많이 있다.
세상꼼수. 모른 척해. 괜찮아 해도 돼. 왜 맞고 왔어.
부모가 죄악세상에서 얻은 것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만 가르쳐라.
그래야, 성령의 인도하심이 따르고, 성령의 능력이 따르고, 그 아이가 하는 일에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높여지는 일이 생긴다.
아이가 부모로 인해 배워서 하는 일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명예를 위한 아름다운 열매들이 될 것이다.
기준이 주님의 말씀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아무 가르침이 아니라, 주께 속한 교육.
[위협적인 폭력적 아버지 : 자녀 앞을 가로막는 인생의 저주]
성경은 위협적인 폭력적 아버지를 경계하고 있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소유가 아니다.
자녀들은 자기들의 권리를 갖고 있고, 그들의 존엄성은 하나님에 의해서 확정되고 있다.
성경이 갖고 있는 정서는 항상 위협적인 아버지는 자녀의 존엄성을 파괴하고, 그의 인생을 슬프게 한다는 것이다.
누구도 자녀에게 그렇게 할 권리는 없다.
항상 사랑으로 대하고, 잘못한 것은 정당한 매너로 설득하여 바로 잡아야 한다.
자녀에게 가혹하게 대하지 말고, 자녀에게 부드러운 사람이 되라.
어떤 그리스도인 아버지가 자녀들이 다 떠나고 홀로 남은 상황에서 글을 썼다.
내가 다시 자녀를 기르게 된다면, 나는 이렇게 할 것이다.
나는 내 아이들 앞에서 내 아내를 더욱 사랑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더 많이 웃을 것이다. 우리들이 함께 나눈 기쁨으로 인해 웃을 것이다.
나는 이전보다 훨씬 더 어린아이가 하는 말을 많이 들을 것이다.
나는 내 약점들에 대해서, 더 정직할 것이다.
절대 내 아이앞에서 내가 완전한 것처럼 허세를 부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의 가정을 위해서 기도를 완전히 다르게 할 것이다. 아이들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고, 내게 초점을 맞출 것이다.
나는 아이들과 많은 것을 할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칭찬을 주고, 용기를 줄 것이다.
나는 내 가족을 하나님과 더 친밀하게 할 것이다.
나는 평범한 매일의 일상을 자녀들이 하나님께 향하도록 사용할 것이다.
아이들이 내 말잘듣게 해주세요가 아니라, 나는 부족하지만, 내게 복을 주소서.
내 잘못이 많지만, 용서하소서. 초점을 내게 맞추어, 아이들이 나를 관찰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부모가 이보다 더 구체적이고, 나은 것이 있겠는가.
모든 부모들이 후회하는 최고의 핵심을 담은 것이다.
[모든 것은 주님의 특성으로]
모든 것은 주님의 특성으로 함으로써, 아이들이 세상의 타락을 배우지 않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받도록 해야 한다.
무엇보다 주님의 교훈을 따르도록 해야 한다.
사38:19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날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비가 그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
아비는 자녀에게 하나님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정말 뜨겁게 사랑하는 자라면, 그의 가르침에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다.
자녀를 자기 소유물로 여기고, 강압적으로 하는 것은 안된다.
하나님이 참고, 기다려주셨듯이 헌신적으로 사랑해야 할 것이다.
자녀들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도록. 아이가 익숙해진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야 한다.
자녀는 하나님의 소유임을 알고, 소유권을 분명히 해야 한다.
두려운 마음으로, 책임감 있게 해야 한다.
그러면, 그 가정은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이 성취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듣는 동안 마음이 슬플 자가 많을 것이다.
우리 공통된 연약함이다.
성령으로 하지 못한 자들이 그런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담고 실행하지 않기 때문에, 평생 이 수준에는 못미친다.
다 지났는데, 왜 이런 말씀을 하시나 하지말라.
내 아이 상처주었다고, 잊으려고 하지 말라. 부모들이 평생 회개하는 것이다.
이미 때를 다 보냈어도, 아버지는 그 마음의 아픔을 합리화하지 말고, 평생 갖고 있으라.
자녀든, 부모든 함께 하나님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고, 하나님의 행복을 끊임없이 추구하며 달려갈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자녀를 양육하는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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