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No53 우리를 찾으시려 낮추어 오신 예수(221225)

lks8284 2022. 12. 25. 17:20

221225주일 [우리를 찾으시려 자신을 낮추어 오신 예수] 김성현감독


누가복음 2:1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누가복음 2: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 것이라

누가복음 2: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누가복음 2: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누가복음 2:5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누가복음 2: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누가복음 2:7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누가복음 2:8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누가복음 2: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누가복음 2: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누가복음 2: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누가복음 2: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누가복음 2:13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누가복음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누가복음 2:15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누가복음 2:16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누가복음 2:17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누가복음 2:18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

누가복음 2: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누가복음 2:20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우리 주님은 구주를 간절히 원하는 자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여기서 구주는 구원자를 말한다.

물론 주님은 모든 인간에게 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공평하게 기회를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의로 예수를 믿지 않는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국 예수를 믿지 않고, 혹은 믿는 사람 중에서도 하나님이 예비하신 최후의 구원에는 이르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이렇게 하나님이 공평하게 자신을 주심에도 불구하고, 결국 최후의 구원에 이르지 못한 이유는 구주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구주는 많은 사람에게 평생 가득 계시지는 않는다.

이런 것은 오늘날의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세상에서 전도할 때, 예수 믿을 기회를 마구 뿌리는 느낌이 있다.

길에서 전단지를 뿌리듯이 제발 교회에 나오라는 식으로 한다.

너무 예수 믿으라는 구호가 깊이가 없고, 마구 뿌려지는 듯한 전도를 한다.

그 자체는 어쩔 수 없다.

이런 환경속에서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믿는 것을 어렵고, 가치있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래서, 신앙의 선입견이 옳지 않게 형성되어 있을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세상에서 잘나가는 사람들은 예수를 잘 믿을 가능성이 적다.

구주에 대한 간절함이 상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를 믿더라도, 이미 자기 삶속에 좋은 것을 보험처럼 하나 더 더하는 것 일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안된다.

자기에게 구주가 없다면, 자기 삶의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사람에게는 신앙은 굉장한 기회가 된다.

이미 삶의 쓴맛을 알고 있는 사람은 구주를 영접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런 사람은 구주와 함께 세상을 이길 수 있다.

그는 구주가 없으면 세상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예수 믿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이 살고 죽고의 문제다.

예수 믿는다는 신앙 시스템에 들어가, 그것을 이용하자는 것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고, 죄인인지도 몰랐는데, 천국간다고 영원한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다고 생각한다.

신앙을 기술적인 관점으로만 보고 있는 것이다.

신앙은 절망에 빠진 자를 구원하시려는 구주와 그가 없이는 절대 살 수 없는 자의 간절한 호소가 만나는 것이다.

안타까운 인격과 안타까운 인격이 만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믿는 것에 대해서 본질적인 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결국 사람이 절망에 빠지는 인생의 모든 것은 죄로 인한 저주다.

정말 봐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예수 믿는 신앙으로 자기에게 무언가 더해질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분을 정말 자기 마음에 모시지 못할 것이다.

또한 주님은 화려한 생각이 있는 사람을 만나러 오지 않으셨다.

오직 그가 없이는 살지 못할 사람,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자를 만나러 오셨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자, 잘나가는 자는 구원에 대한 열망이 없다.

오히려 인생은 괜찮다고 생각한다.

신앙을 마치 보험처럼 생각한다.

신앙은 죽어가는 한사람의 생과 사의 투쟁이다.

그런데, 여유있는 사람은 신앙의 문제를 조직화한 이론안에 집어넣는다.

이런 사람들은 신앙생활하면서도, 옛날 습관을 가져와서 한다.

그러다보니, 옛날 모습처럼 화려한 모습을 좋아한다.

신분이 높은 것, 큰 직분, 큰 성과를 좋아한다.

그래서, 신앙도 처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더 뜨겁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식는다. 그러면서, 신앙을 이론화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합리화한다.

주님의 뜻이 있는데, 합리화를 하면서, 재해석을 덧붙인다.

결국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해도 되는 것으로 재해석되어 정착된다.

반대로 해야할 것은 여기도 안하고, 저기도 안하니까, 안해도 되는 것으로 확신하는 해석을 마음에 둔다.

하나님에 대한 것은 신실함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인데, 종교적인 해석을 한다.

육신이 요구하는 것에 발을 맞추어, 하나님과 협상을 하는 형태가 된다.

똑같은 신자인데도, 차이가 많을 수 있다.

주로 이 세상의 사람들은 겉모습, 성과로 해결하려고 한다.

성경의 주장과는 다르다.

세상에서 살맛나는 사람들은 영적인 현실에 대해서 마음이 닫혀 있을 수 있다.

오히려 세상에서 절망적인 사람일수록 다른 선택이 없고, 구원자밖에 구할 것이 없다.

그러나,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면, 모든 것이 어렵게 간다.

신앙생활 첫걸음부터 위기로 간다.

우리 모두는 사실 이방인이다.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난다.

원래 유대인을 구원하시기로 되어 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죄인이라는 관념이 가까이 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그런 신앙의 교육을 충분히 받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영적 상태에 대한 굉장한 의문이 있고, 하나님과 반대로 가는 것에 대한 스스로의 의심이 있다.

우리는 이방인들이다. 그런 것을 전혀 모른다.

우리는 무엇인지도 모르고, 예수를 믿고, 나중에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는다.

순서가 맞지 않는 신앙을 가질 수 있다.

유대인들은 우리의 영적 거울이다.

우리는 신구약을 대하면서, 인간의 참모습을 발견한다.

주님은 이 세상에 초라한 자로 오셨다.

굳이 그렇게 하실 필요가 있나.

왜 낮게 오셨을까.

주님은 이 세상에서 소외된 자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시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을 위로할 수 있도록, 접촉점이 넓어지게 하려고 하고, 쉽게 닿을 수 있도록, 자신을 낮추신 것이다.

만약 그가 유력한 자로 오셨다면, 세상에서 소외된 자의 구주로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가 가난하고, 비천하게 오신 것은 돈이나 권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시려는 것이다.

사람이 살 수 있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긍휼에 의한 것이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사는 것임을 명확하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은 이 세상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하나도 귀하게 여기지 않으셨다.

주님이 추구하는 것과 이 세상이 추구하는 것은 달랐다.

그런 주님은 자신의 마음을 분명히 나타내셔야 했다.

주님은 이 땅에 섬기러 오셨다.

우리처럼 미련하고, 못나고, 본질이 죄인인 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자신을 낮추셨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너무나 억울한 일이다.

주께서 이렇게 낮고, 천하게 오신 것은 우리를 그에게 가까이 하게 하심이다.

우리 모두 낮추신 주님을 절대적으로 만나는 자들 되자.

 

[예언을 따라 역사 속에 강림하심]

 

본문에서 예수님은 예언을 따라, 역사속에 들어오신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처음 나타냈다.

그 다음에 요셉에게 또 천사가 나타났다.

요셉은 자기와 정혼한 마리아가 잉태된 것을 알고, 조용히 끊으려고 했다.

그 때, 천사가 나타나서, 성령으로 잉태된 것임을 알려주었다.

이후부터 요셉은 정혼자를 거부하지 않고, 가족으로 삼았다.

요셉과 마리아는 정혼관계로 갈릴리에서 살고 있었다.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그런데, 성경은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고 했다.

그는 태초에 상고라고 했다. 원래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 하는데, 요셉과 마리아는 나사렛 사람이다.

하나님은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게 하기 위해, 로마 황제의 마음을 바꾸어 호구조사를 하게 한다.

 

누가복음 2:1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당시 로마제국 황제는 로마 역사상 최고 권력이 있는 최초의 황제다.

가이사 아구스도.

로마제국을 완전히 잘 정리해 놓은 사람이다.

팔레스타인 작은 마을, 베들레헴 같은 곳은 전혀 관심거리가 아니다.

그런데, 아구스도는 로마제국에 인구조사 명을 내렸다.

당시 유대에는 헤롯대왕이 있었다. 그는 로마제국의 앞잡이였다.

멀리서 원격으로 호구조사를 시켰다. 이것은 세금을 걷기 위한 사전조사였다.

그래서, 요셉과 마리아는 호적조사를 하기 위해 먼거리를 이동해야만했다.

예수님의 탄생과 인구조사의 시기가 겹치므로, 역사적 증거가 된다.

 

누가복음 2: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 것이라

 

누가복음을 쓸 때, 당시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 때, 인구조사가 있었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

 

누가복음 2: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호적은 어느 가문의 누구인지, 유대인 특유의 발전된 시스템을 따라 행해졌다.

 

누가복음 2: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성경에 요셉이 어느가문의 누구인지 명확히 나와있다.

신고를 위해, 호적에 나와있는 지역으로 가게 되었다.

갈릴리 나사렛 사람이지만, 호적지인 베들레헴으로 가게 되었다.

원래 갈 일이 없는데, 묘하게 일이 발생하여, 기어코 갈 수 밖에 없다.

 

누가복음 2:5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만삭의 여인이 상당한 거리를 움직이게 되었다.

우리가 역사를 살펴보면, 마리아까지 가지 않아도 되었다.

호주가 가서, 대신 등록하면 된다.

그런데, 마리아도 함께 갔다.

산달이 임박해서 쉽지 않은 길이었는데, 굳이 갔다.

왜 굳이 마리아와 함께 갔을까.

정혼 기간에는 법적으로만 결혼관계이지, 동침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마리아는 임신을 했다. 마리아는 평생 이 문제로 시달릴 수 있다.

요셉은 정혼자를 지켜주는 것이다.

혼자 두고 가서, 마리아가 아이를 낳으면, 마을 사람의 비난을 받게 된다.

그런 환경 속에 도저히 혼자 둘 수 없어서, 데리고 왔다.

삶이 굉장히 각박했던 것이다.

, 요셉과 마리아가 천사의 말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가려고 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하나님은 이들을 베들레헴으로 부르셨다.

 

[초라한 예수의 탄생]

 

누가복음 2: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마침내 해산할 날이 되어, 베들레헴에서 해산을 하게 되었다.

1225일은 정확한 날은 아니지만, 상관없다.

구주가 오셨다는 사실을 되새기고, 기뻐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2:7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맏아들이라고 되어있다. 예수님 이후로,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 다른 자녀들도 있다.

카톨릭에서는 마리아는 예수님만 낳았다고 한다.

말이 되지 않는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있었다.

여기서 맏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다윗의 자손의 권리로 왕권을 유지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아기를 구유에 뉘였다.

구유에 뉘인 것은 한마디로 너무 비참한 것이다.

열악한 환경을 이 한마디가 다 말해준다.

얼마나 환경이 열악했으면, 그렇게 하겠는가.

이 한마디로 마음이 찡한 장면이다.

주님은 엄청 비참하고, 가난하게 오셨다.

예수께서 나실 때, 하늘의 영광이 쏟아지고, 위로의 하나님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직 어린 소녀나 다름없는 마리아와 요셉이 거할 곳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최악의 상태에서 아이를 해산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제일 더러운 곳에 오셨다.

위생적으로 좋지 않고, 추운 곳에 오셨다.

 

누가복음 9: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그가 사실 세상을 지으신 분이지만,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한 자가 없었다.

아주 외롭게 떠나셨다.

그런데, 주님 나신 소식이 전해졌다.

예루살렘 성전이나 헤롯궁에 전해지지 않고, 목자들에게 전해졌다.

 

[목자들이 예수 탄생의 소식을 들음]

 

누가복음 2:8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목자는 굉장히 천한 직업이었다. 그들에게 천사가 전했다.

어둠에서 빛이 나며, 천사가 나타나 전했다.

 

누가복음 2: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이것은 엄청난 일이다. 이스라엘은 수백년간 보지 못했다.

수백년간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계시지 않았다.

그러나, 이 날 처음으로 나타나셨는데, 비천한 자에게 나타나셨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것은 거기 은총받은 자가 있기 때문이다.

목자들이 은총받은 자였다.

목자들은 자랑할 것도 없지만, 은총을 받았다.

사실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보면, 죽는다.

그래서, 목자들은 그 영광을 보고, 두려워했다.

 

누가복음 2: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그래서, 천사는 두려워말라고 했다.

여기서 천사가 쓴 단어, 복음이 우리가 지금 쓰는 복음이다.

 

누가복음 2: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자는 구주시다.

구주, 그리스도, , 세가지 호칭을 동시에 말한다.

 

[구주, 그리스도, ]

 

그가 누구신지 한번에 설명한 것이다.

구주, 예수님을 가장 적절히 설명한 것이다.

예수란 이름 자체가 주는 구원이시다는 뜻이다.

 

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인류에게 필요한 유일한 분.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다.

예수께서 오신 것은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려 하심이다.

이미 마리아도 천사가 나타날 때, 구주라고 했다.

 

누가복음 1: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이스라엘 전통처럼 구주를 기다려왔다.

, 침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도 그렇게 말했다.

 

누가복음 2: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스라엘은 구원을 기다린 자들이다.

주님은 어떤 개인의 형편을 도우시려고 오신 분이 아니다.

우리 일거수 일투족을 도우시는 것은 그가 계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부산물 같은 것이다.

그는 우리 죄를 가져가기 위해 오셨다.

우리 삶의 근본적인 원인은 죄이고, 모든 슬픔은 죄의 증상일 뿐이다.

주님은 죄를 제거하려고 오셨다.

모든 인간이 다 죄인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절대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셔서, 죄를 다 가져가려고 하셨다.

예수께서 심리적 죄책감을 벗겨주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다.

죄없다고 하면서, 자기 양심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

죄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다.

 

, 그리스도는 온세계를 구원하실 분이시다.

기름부음받은 자로서 그분의 직분명이다.

하나님의 명예를 대신할 분이시다.

 

, 주라고 한다.

주는 높은 사람을 향해 부른 호칭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단어가 되었다.

원래 주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두려워하던 자들이 부르는 호칭이었다.

우리 성경에는 여호와라고 나오는데, 외국성경에는 그렇게 되어있지 않다.

여호와라고 나온 다른 성경이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 성경이 잘못된 것이다.

원래 표기할 때, 하나님을 감히 부를 수 없어서, 4글자만 적어놓았다.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그에 대한 상징이다.

그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바꿀 때, 주님으로 부르라고 명시해 놓았다.

거기에 글자를 섞어서, 여호와라고 불렀다. 원래 여호와라는 단어는 없다.

원래 주님이다.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 할 수 없다.

주는 하나님을 말한다.

아버지와 동등한 분, 그분만을 주라 부른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줄 모르면, 너희 죄 가운데 죽으리라.

 

[겸손한 목자들이 구주의 임재를 전함]

 

누가복음 2: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목자들은 주님을 찾아서, 주님의 임재를 확인했다.

영광의 황금침대에 있는 자가 아니라, 말구유에 있는 아기를 보았다.

그들은 최초에 예수를 전한 자들이다.

이스라엘이 늘 기다려온 그리스도,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 여물통에 누워계셨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은 자기들의 개념과 맞지 않으니까, 주님께 함부로 한다.

주님이 천하게 오니까, 그리스도 교회도 천하게 보고 있다.

그리스도 교회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데, 그리스도 교회를 천하게 보고 있다.

그들에게는 주님의 천하게 오심이 경고 그 자체다.

깔보는 심령에게는 그것이 경고가 된다.

구주의 태어난 소식은 높은 사람, 제사장, 장로, 바리새인, 서기관, 황제에게 발표되지 않았다.

말도 되지 않았던 곳에서 빛이 비추어 전해졌다.

 

[겸손한 심령에게 구주의 탄생을 알리심]

 

이 세상에서 소외되고, 비천한 자들이지만, 심령이 주님이 나타나시기에 적합했다.

주님은 자기를 자랑하는 자, 스스로 충족할 수 있는 자, 부유한 자에게 오지 않으셨다.

절망스러운 자, 소외된 자에게 오셔서, 용기를 주셨다.

마음이 상한 자, 그들은 주님을 보았을 때, 간절히 사모할 자였다.

옥합을 깨뜨려 자기 신앙을 증거한 여인처럼, 가까이도 못하고, 멀리서 가슴치며 회개하던 세리같은 자를 찾아오셨다.

이런 모습은 주님께서 이 땅에서 무엇을 하려고 한 것인지 무관하지 않다.

 

이사야 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이사야 61: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오늘 우리 시대에 삶이 잘되는 것에 대해서, 영혼이 피폐되지 않게 하길 바란다.

바로 나같은 자를 위해 오셨다.

주님을 영접하자.

그런 영혼 속에 구주를 모실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날 주님이 오셨던 사실을 확신하며, 주께 영광돌리자.

 

우리를 받아주소서.

주님이 이 땅에 나를 찾아오셨고, 우리 교회를 찾아오셨고, 우리를 영원히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자.

 

설교요지



예수는
세상을 위해
하나님이 보내 주신 구주이시며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께서
그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간절히 구하는
죄인들에 대한
그의 한없이 크고 깊은 사랑과 긍휼을
드러내신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을 극도로 낮추셔서
사람의 모습을 입고
세상에 오셨을 뿐만 아니라
매우 초라한 사회 신분과
열악한 삶의 환경을 가지기를 택하셨고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셨다
이것은
오직 이 세상에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는
연약함과 절망 속에 있는 자들을
찾기 위한 것이었으며
신실하게 회개하는 죄인들을 불러
은총을 베풀며
영원한 소망과 세상을 이길 담대함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써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탄생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진실을
꾸밈없이 그대로 증거한다
예수는
영원토록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