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 소유된 나의 자녀(마태복음 18:1~6)
2025년 5월 18일 성락교회 헌아예배(주일연합) 설교: 김성현 감독
(마태보음 18:1~6)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또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의 보장 아래 함께 예배드리며, 우리 아이들과 관련한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중대한 일을 이루려 합니다.
오늘 우리는 ‘헌아예배’라는 예배의 형식과 그 깊은 성격을 통해, 우리 교회의 역사 속에서 늘 이어져 내려온 전통을 다시금 따르고 있습니다. 이 예배는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수많은 축복의 염원이 쌓여 온 시간이며, 우리 모두의 간절하고 경건한 마음이 담긴 자리입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한 마음으로 나아가,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일들을 간절히 구하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이루는 그런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태어나셨을 때, 그 부모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아기 예수를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 자리에는 시므온과 같은 경건한 사람이 있었고, 그를 통해 예수께 축복이 임했습니다. 예수님도 한 사람의 아이로서 이 세상에 적을 두고, 소속을 갖고 성장해 가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그 모습을 따라가고자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이 결코 슬픈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축복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출발점임을 함께 일깨우며, 이 헌아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를 단지 형식적인 자리, 의미 없이 겉으로만 주고받는 복의 자리가 아닌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시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실제적인 복을 간구합니다. 모든 세대들이 이 과정을 함께 겪어왔습니다.
가정은 우리가 하나님과 맺는 매우 중요한 계약 중 하나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과 맺는 몇 가지 가장 중대한 계약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결혼은 하나님 앞에서 공식적으로 맺는 계약이고, 침례는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영적인 계약입니다. 또한 성직자가 하나님과 맺는 계약 역시, 성경 속 여러 중요한 언약의 모습을 따라 행해지는 것이며, 이는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살아 있는 하나님과의 계약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자녀를 하나님께 드리는 이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들이 많은 성도들의 증인이 된 가운데, 하나님 앞에 자녀를 온전히 맡기는 예식을 우리는 함께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예식을 마치고 나면, 이 아이들은 더 이상 세상의 아이들처럼, 아무 원칙 없이, 방식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자라는 ‘길가의 야생화’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이 아이들은 하나님께서 소유하신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부모로서 완전한 마음으로 아이를 하나님께 드리며, 이후로는 유모(Nanny)로서, 또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이 아이들을 돌보게 됩니다. 오늘이 바로 그 역할의 시작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각기 다른 곳에서 살다 만난 존재들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혈연이나 친척보다도 지금 함께 신앙 안에서 묶인 우리가 더 가까운 자들이고, 더 소중한 이웃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 안에서 하나가 되었고, 같은 영적인 젖을 먹으며 자라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하늘 가정에서, 같은 말씀과 은혜로 양육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이 이들을 많이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들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어요. “에이고, 우리 애들은 속만 썩이는데. 에이, 인생 내가 잘못했는데, 저 젊은 부모들이 예쁜 애들 데리고 있구나. 에잇! 나는 몰라, 몰라.’ 하고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외면하지 마시고,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저들에게 복을 빌어주세요. 복을 빌어주신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그분 안에서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의 권세와 하늘의 권리가 새겨지고, 깃들게 되는 것입니다. 함께 즐거운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헌아’하는 시간에는 우리 모두 간절한 소원을 이루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과의 계약을 통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인데, 이 세상에서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무조건 복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르십니다. 그리고 어떤 계기를 통해 “너는 내게 순종할 것이냐? 그리하여 내 복을 받을 것이냐, 아니냐?” 하고 물으십니다. 계약 없이 하나님은 강제로 일하시는 법이 절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면, 정말 심각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신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우리 인생길을 갈 때, 누군가의 말씀을 들으면서 ‘이건 범상치 않은 소리다. 아래에서 나온 소리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는 귀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런 순간에 하나님과의 계약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러 번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만남을 통해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하나님의 이끄시는 삶을 구체적으로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거절만 하다 보면, 결국 하나님이 결국에는 하나님이 전혀 보이지 않는 황야와 같은 곳으로 내몰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은 영적인 세상입니다. 마귀와 온갖 영적인 존재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이런 더러운 악령들에 의 역사에 대해 잘 이야기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들끓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아이들 잘 되겠지?’ 하며 마냥 안심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세상의 물질적인 영향은 일부에 불과하고, 영적인 영향이 훨씬 더 크고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자녀를 그분의 뜻대로, 그분의 사랑으로 이끌어주시지 않는다면, 자녀를 양육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과제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아이들이 두 가지의 면에서 잘 성장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헌아예배를 드릴 때는 “하나님, 아이 드립니다. 이제 맡아주세요. 됐죠? 받으셨죠? 그럼 빠이(bye).” 이런 식으로 끝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오늘부터 저는 이 아이의 교육을, 양육을 맡은 자입니다.” 우리는 양육하는 자들입니다.”
모든 영혼이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모든 어린아이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자기가 낳았다고 해서 함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본래 자기에게 없는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며, 결국 하나님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아이가 아직 어릴 때는 엄마 아빠가 없으면 못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입장에서는 “거 봐. 엄마 아빠가 다 해줘야 되잖아.” 하며, 아이를 마음대로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이가 지식과 경험이 부족하니까 매사에 얕보고 쉽게 대할 수도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는 굉장히 깊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성장할수록,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여전히 살아있지만, 서로 느끼는 감정은 점점 달라집니다. 자녀는 결국 부모에게서 완전히 독립됩니다. 여전히 ‘나의 어머니’, ‘나의 아버지’이지만, 그 자녀는 하나의 인격체로서 인생 속에서 홀로 남게 됩니다.
과거에는 엄마 아빠가 “이렇게 해! 저렇게 해!” 하며 무서운 얼굴로 지시하면, 자녀는 짜증을 내면서 이에 따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돌아보니, 자녀 홀로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여전히 곁에 계셔도 그렇습니다. 자녀가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독립된 길을 갑니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장하고 나면 부모와의 관계가 애매합니다. 인간의 경우,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완전히 독립된 인격으로서 부모는 자녀에게서 손을 떼고 있습니다. 그동안 자녀를 양육해 오면서 쌓인 책임들이 여전히 부모에게 있는데도 말입니다.
이 자녀는 나보다 더 존귀한 자일 수 있습니다. 아마 그럴 겁니다. 나보다 더 위대하고, 더 소중하고, 더 훌륭한 자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아이를 무시하며 길러왔습니다. 이 아이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때까지, 내가 아름답고 소중하게 잘 성장시켜야 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그 때까지 잘 길러낸 후, "빠이(bye)" 하고 보내주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이후에도 부모의 마음에서는 자녀에 대한 애정이 식지 않습니다 죽을 때까지 그 사랑은 끓고 있지만, 자녀는 부모에 대한 생각이 많이 끊어집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각박하고, 삶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 험한 길을 헤쳐나가는 것은 결국 ‘나 혼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홀로 길을 떠나는 자녀에게 부모는 이렇게 말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여기서부터는 너 혼자 갈 수 있지? 아이야, 너 이제 다 컸어. 너는 이제 성인이야. 너의 길을 가거라. 하나님의 왕성한 기운이 너와 함께 있어. 일어나! 힘차게 걸어라! Off you go! 가거라.” 그런데 문제는 정작 그렇게 해줘야 할 때, 부모가 자녀에게 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회에서도, 교회 안에서도 악인들이 있습니다. 인생에 와서 악인의 역할을 하다가 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항상 즐겁고 좋은 일만 있을 것만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항상 비판적이고, 항상 불만을 품고, 교회를 어렵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인은 그것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본인은 모든 상황이 마땅치 않게 느껴지고, 자기가 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하며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늘 부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 겁니다. 아마 지금 함께 말씀을 듣는 성도들 중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행동하게 되는 경우들이 있어요.
왜 그렇게 될까요? 그 사람은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호르몬이나 성장 과정에서의 생리적 영향도 부분적으로 있겠지만, 거의 대부분은 부모에 의해 그렇게 형성된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 시절 불안과 공포 속에 자란 아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그 흔적이 남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회에 악을 끼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말씀이 길어지니 이쯤에서 멈추겠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악을 끼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천국 가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온 사람들에게조차 끊임없이 괴로움을 주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면서도 “하나님…” 하며 기도는 다 합니다. 하지만 그는 악역을 맡고 있는 겁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이 사람은 마귀가 마음대로 부립니다. 마귀가 “너, 성락교회 가서 괴롭히는 자로 살아라” 하며 그 영혼을 자기 하수인으로 삼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스스로 돌아봐야 합니다. 내 영혼이 혹시 악에 휘둘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만일 그렇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행복과 복의 채널(channel)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이 흘러가는 통로의 역할을 맡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복이 없던 사람이라도 우리를 거쳐 가게 되면, 또 우리 가정을 만나게 되면, 그 가정에 복이 임하는 것이 하나님 세계의 법입니다. 성경에서는 ‘너와 네 자손이 있는 곳에, 너와 함께하는 모든 사람이 복을 받을 것이다. 너를 스쳐 지나가다 미워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까지 이어진 우리 가문, 곧 아브라함과 그 신앙을 그대로 이어받은 모든 신앙인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복의 채널, 복이 통과하는 길입니다. 구원이 통과하는 길.
그렇다면 자녀를 어떻게 길러야 할까요? 자녀는 내 마음대로 키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아이가 세상에 독립적으로 나왔을 때, 아이에게 세상은 너무 힘듭니다. 왜 그렇게 되느냐? 많은 이유 중 하나는 부모가 성질대로 아이를 다루었기 때문입니다. 도리도 없이, 성질대로 아이를 혼내고, 온갖 욕심과 저주받은 태도를, 성경에서 말하는 지옥에 속한 모습들을 아이에게 쏟아낸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자기 성질입니다.
그렇게 자란 아이가 어른이 되어 세상에 내몰립니다. 부모의 양육이 끝났습니다. “나 이제 끝난 거야? 엄마, 아빠, 나 가야 돼?” 그때는 ‘엄마, 아빠’라는 말조차 안 나올지 모릅니다. 부모가 준 상처로 인해 열등감을 갖게 됩니다. 겉으로 보기엔 다른 사람들과 비슷해 보이지만, 내면은 망가져 있습니다. 고독하고, 인생이 불안하고, 늘 후회 속에 살아갑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아버지와 어머니의 차이에 대해 말하자면, 특히 어머니는 아이를 자신의 몸으로 낳은 존재로서, 정말 특별하고 거룩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어머니’라는 관계는 너무나도 특별합니다. 문제는 아버지입니다. 아버지가 욕심꾸러기이고, 탐욕스럽고, 가증스럽고, 거짓된 사람이라면, 그 자녀는 사회로 나갈 때 절망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인생이 절망스럽게 시작되는 것이죠. 아버지의 학대, 아버지의 그 공포스러운 존재감은 자녀의 인생을 절망으로 시작하게 합니다. 너무 슬픈 일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요? ‘나를 사랑해주는 아버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지만, 날 기다려주고, 지지해주고, 응원해 준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은 자녀에게 큰 힘이 됩니다.
그렇다면 어떤 아버지가 되어야 할까요? “나는 자식보다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나 같은 것이 무슨…” 이렇게 생각하신다면, 천만의 말씀입니다. 아버지는 배운 것이 없고, 무식해 보여도, 자녀에게 아버지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아버지만의 권위가 있습니다. 자녀에게 아버지는 하늘의 하나님과 같은 존재입니다. 지상에 있는 지상의 하나님인 것입니다. 아버지의 겉모습으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지지와 응원은, 비록 그가 가난하고 가진 것이 없더라도, 자녀에게는 영원한 자신감이 되고, 기댈 수 있는 힘이 됩니다.
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녀가 청년이 되고, 중년이 되고,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아빠…”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리워하는 아빠, 좋은 기억으로 남은 아버지가 있다는 것은 자녀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절대로 중요합니다.
그러니 아버지가 자신의 성질로 자녀의 인생을 망쳐놓지 마십시오. 그렇게 꺾어놓고는 “자, 시작해봐. 너 왜 이렇게 못하니?”라고 하면 안 됩니다. 못하죠. 바로 아버지 때문입니다. 포악한 당신 때문에. 그런데 어린 자녀를 망가뜨려 놓고, 어린 심정에 못을 박아놓고 다 깨뜨려놓고 “이제 잘 살아봐라. 너는 왜 성공 못하냐? 왜 돈을 못 버냐?” 합니다. 자녀는 벌 수 없습니다. 당신이 짓밟아놓았기 때문에.
우리 성락교회의 아버지들은 이런 생각을 하실 수 있습니다. ‘애가 점점 크고, 나는 점점 초라해지고 늙어갈 텐데… 얘가 나를 계속 존중해줄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런 생각은 하지 말고, 자녀가 이 땅에 있는 동안 하나님의 거울 같은, 하나님의 인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높은 지위를 가진, 귀한 나의 지지자, 존경받을 훌륭한 아버지가 되어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녀가 하나님을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인생 자체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세상 것은 필요 없어! 하나님만 잘 믿으면 돼!” 이런 말만 반복하는 목사들이 있다면, 정말 끌어내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느냐?’ 묻고 싶습니다. 사람이 이 땅에 와서 사람으로 성장하고, 그다음에 사회에 나아가는 모든 과정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천륜의 법입니다. “세상 필요 없어! 아무렇게나 살아! 예수만 잘 믿어!” 여러분, 이런 말에 속지 마십시오. 그런 법은 없습니다.
부모는 자녀가 사회에서 옳은 자로 살아가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남을 속이고, 악역을 하는 자가 아니라, 그 심령에 옳은 것이 무엇인지, 의로운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심어주어야 합니다. 그 개념이 있어야 합니다. 단지 아이들에게 강아지를 훈련시키듯 “착한 짓~”, “이쁜 짓~” 하고 재롱 떠는 것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개념을 잡아줘야 합니다.
아이에게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았는데 “야, 이래가지고 너 돈 벌이나 할 수 있겠어?”라고 말하면서 정작 부모들은 악한 일을 한다면, 아이는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이 혼란 속에 남게 됩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면, 그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는 영적으로 망가진 인생이 되고, 세상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됩니다.
그렇다면, 아이가 성장한 이후에는 부모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바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자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자로 준비시켜야 합니다. “지금까지 나는 하나님에 대해 너에게 설명해 주었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알려주었고, 하나님께 가는 길도, 전화번호도 적어줬어. 하나님께는 이렇게 해야 하고, 저렇게 해야 해. 알겠지? 안녕. 자, 이제 힘을 내. 하나님이 기다리고 계실 거야. 저 모퉁이 너머로 너 혼자 가봐.” 그런데 아이가 “엥? 하나님!?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야 되는 거예요?” 이렇게 당황한다면, 그것은 부모가 제대로 준비시켜주지 못한 것입니다.
외적으로 부모는 아이를 마치 유모처럼 기르는 것뿐입니다. 이 아이가 내 집안에서, 내 육신을 통해 나왔다고 해서 내 소유가 아닙니다. 그는 단지 내 가정을 통과해 이 세상에 온 것입니다. 이 아이는 거룩한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아이 안에 어떤 꿈을 심으시고, 어떤 계획을 이루실지는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는 그저 미천한 부모일 뿐, 미천한 인간(human) 부모에 불과합니다.
이 아이가 어떤 영혼인지 알고 그렇게 함부로 대할 수 있습니까? 물론 “No, No, No. 안 돼, 안 돼.” 하며 가르쳐야 할 것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교양, 곧 옳고 그름을 분별하게 하는 견고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선과 악을 구분짓고, 경우에 따라서는 벌도 주어야 하고, 어느 정도의 엄격함도 필요합니다. 다만,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 연결된 루트 안에서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내가 고스톱 잘 치는 법 가르쳐 줄게.” 이런 식의 가르침이 말고요. 자녀가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는 심령을 계속해서 만들어 줘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언급 없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태도를 전혀 보여주지 않는 ‘애매한 아버지’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애매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자녀는, 그대로 그 모습을 따라갑니다. 아이들이 좋은 것은 쉽게 익히지 못하지만, 나쁜 것은 빠르게 배웁니다.
어떤 성도든지, 지금 늦었다고 느낄지라도 자녀 앞에서는 하나님과 당신과의 관계를 옳게 하기 바랍니다. 억지로라도 하십시오. 억지로라도 ‘우리 자손들이 보는 앞에서 나, 하나님 앞에 복종합니다.’ 해야 합니다. 일부러 하지 않으면 당신 영혼자체가 망할지도 모릅니다. 오늘부터는 자손들 앞에서 “나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나타내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이 클 때까지, “너희 아빠,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분이셔?”라고 물었을 때 “모르겠어요. 약간 엉터리 같기도 하고…” “예수님 잘 믿는 직분 가지신 분이라며.” “직분은 잘 모르지만, 그냥 옆집 아저씨랑 다를 게 없는 것 같아.” 하는 반응이 나오면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여러분의 영원한 관계를 분명하게 표현해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서도 아이들과 관련된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아이들을 예수께서 만져주시기를 바래서 그의 앞에 데려오자 제자들이 “어린 애들은 저리 가라! 저리 가!” 하며 막았습니다. 그러자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지 마라. 본래 아이들이 하늘에 속한 자들이다. 저런 성품이 바로 그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것에 물들어 이런 것을 모를 뿐이다. 저들의 마음을 너희가 상하게 하지 마라.”
시편에서도 보면, 하나님께서는 어린아이를 통해 권능을 나타내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원수를 무찌르기 위해 나이 많고 힘센 사람을 찾지 않으시고, 오히려 어린아이를 통해 그 권능을 행사하십니다. 어린아이를 기준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또 로마서에서는, 자녀를 잘 길렀다는 것이 외적인 행위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씨, 즉 하나님의 씨, 하나님의 뜻이 심긴 자녀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듯이, 부모들, 특히 아버지들, 절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마십시오. 성질 부리지 마세요. 어린아이가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망가뜨리지 마세요. 신체는 멀쩡한 것 같은데 내적으로 이미 죽어 있는, 영혼이 상해를 입게 해 놓고, 그런 범죄를 해놓고, 아이에게 왜 제대로 못하느냐는 식의 불평은 절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름다운 아버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스러운 나의 그리운 아버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충실한 어머니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린아이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길러야 합니다. “주님, 저희가 이 아이를 다 성장시켰습니다. 이제 당신의 거룩한 성도로 길러 주옵소서. 당신께서 영원히 당신의 뜻에 따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마음으로 아이를 바치는 그런 영광스러운 보냄이 있을 때까지 아이를 잘 성장시키겠다는 공식적인 약속을 하늘과 땅, 많은 영적인 존재들 앞에서 천명하고 나타내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명을 받아 여러분을 축복할 것입니다. 축복할 때 이 축복을 무시하고 게을리 여기고,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없을 것이고, 오늘은 헛된 날로 끝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영혼들에게 오늘은 획기적이고 대 기념비적인 날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도 이들을 함께 격려하고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할 때, 오늘 이 헌아식이 우리 하나님께서 여시고 하나님과의 계약이 성립되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우리 부모들이 ‘청지기’로서,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아름다운 사람, 악한 역할을 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당신의 꿈을 위해 사용될 귀한 종이 도록 성장시키겠다는 그 임무를 두고 오늘 계약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역사해 주시기를 간구하며, 다 같이 합심하여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오늘 헌아예배를 이렇게 귀한 하나님의 손길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헌아를 이룬 가정가정마다 도와주시고, 저들 부모를 기억하시고, 또 주께서 받으신 저 아이들을, 저들을 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하시고 지원하시되 저들 가정에 모든 부모들이 마땅히 임무를 다할 수 있도록 저들 가정 가운데 평안과 또 하나님의 따뜻한 임재와 절대적인 우리 하나님의 영광으로 지켜주시고, 도와주시옵소서. 이들을 축복하는 모든 우리 성도들에게 함께 하시사 저들 심령에도 하나님의 동일한 영광으로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녹취: 성락교회 성락선교센터
[출처] 20250518 주께 소유된 나의 자녀(마태복음 18:1~6) 성락교회 헌아예배 김성현감독|작성자 태초에 말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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