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1일 성락교회 주일연합예배 설교: 김성현 감독
(롬2:28~29)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계신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것은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 곧 다른 모든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구분 짓는 중요한 기준입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영원한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자들이고, 그야말로 하나님의 사역의 최고의 열매인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어떤 면에서 우리가 그런 지를 분명히 확인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가운데서 실제로 일어난 광대하고 중대한 일들에 대해 우리는 종종 오해하거나 다르게 해석함으로 우리 삶 속에서 전혀 다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때때로 많은 갈등과 충돌을 겪게 되고, 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이 원만하게 이뤄지지 않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부분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아는 분은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셨기 때문에, 그 죽음에 의한 은혜로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아시는 분은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해서 구원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주님의 사람이 되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까지 받았습니다. 비록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지만, 또 영적인 눈이 어두워져 육신의 감각에 거의다 쏠려 육신적 감각에만 집중된 삶의 방식에 익숙해져 있지만, 그래서 영적으로는 많이 닫혀 있는 상태이지만,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인지적 한계를 열어서 뚫고 나갈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고, 그의 약속을 믿을 때, 사람의 감각의 한계, 영적으로 닫혀 있어서 쉽게 보지 못하는 감각의 모든 장애가 해소됩니다. 이런 사람이 구원받은 것입니다. 다만, 이런 감정이나 현상 그 자체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결론적으로 ‘이 사람은 구원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라고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성도들의 주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을 볼 때, 우리는 ‘저분은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받은 자, 구원을 받은 자구나. 저 영혼은 천국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중이구나.’라고 인식합니다. 이런 동일한 단계들을 거쳐 지금 이 자리에까지 왔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질문이 좀 날카롭죠? 어려운 질문입니다. 대답을 시원하게 해도 뭔가 맞지 않고, 대충 넘겨도 맞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중요한 맥락에서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도 상당 수가 됩니다. 신앙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의 문제인데, 많은 영혼들이 잘못된 방식으로 신앙을 이해하고 또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로 인해 생기는 문제가 많은데, 어떤 문제냐 하면, 자기 신앙의 루틴, 즉 신앙의 모습들, 소위 겉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곧 신앙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매주 주일 예배에 참석하고, 각종 모임에 참여하고, 헌금도 드리고, 교회에 소속감을 갖고, 기도하며 지내고, 여느 그리스도인들과 잘 어울리는 모습을 갖춘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은 구원받은 자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건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본인은 신자라고 열심히 주장하고 믿고 있는데, “아니다”라고 말하면 얼마나 큰 충격이겠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잘못된 길로 빠진 영혼들이 실제로 많습니다. 신앙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에, 또 신앙의 전체적인 개요를 오해했기 때문에, 그렇게 돼서 결국 자신에게 주어진 영원한 인생을 망쳐버리고 맙니다.
실제로 우리 교회를 파괴하고 떠나고, 지금도 계속 교회를 파괴하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성락교회라고 해서 흠 없는 자들만 있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흠이 많을 뿐 아니라, 정말 부끄러울 정도로 구원의 은혜를 저버린 이들이 있습니다. 히브리서에 나오는 것처럼,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짓밟고 배반한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느냐?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단지 삶의 반복된 패턴, 하나의 습관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나의 어떤 외형적인 삶의 패턴이다’라고만 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겉으로는 “나 기독교인이요, 나 예수 믿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 마음속에서는 진정으로 믿고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의 핵심입니다. “믿습니다”라고 말하고, 겉으로는 모든 걸 다 하고 있지만, 그 마음은 구원받은 자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확실히 하고, 분명히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저는 여기서 여러분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설교거리를 말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식의 설교는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냥 ‘죽으면 죽고, 말면 마는’ 식으로, 단 하나의 설교로 하는 것입니다. 제가 잘나서 설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가 얼마나 힘든지 여러분은 모르실 것입니다. 왜 그러냐면, 이건 하늘에서 제게 주신 것입니다. 영원 중에 바로 이 시간에, 단 한 번, 단 한 사람을 통해 주신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설교를 통해 많은 영혼들의 천국과 지옥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을 느낍니다. 그 스트레스와 압박감은 어마어마합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하면 오래 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 중 많은 분들이 이 부분을 오해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절반 이상이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떠났다는 건 단순히 우리와 헤어졌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주님 앞에서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주님을 배반하고, 충성의 자리에서 떠났으며, 죄 없는 영혼들에게 죄를 만들어 덮어씌우고, 거짓 증거로 학대하고 박해하고, 교회를 고소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구분하는 표였습니다. 처음에는 족장들 가운데 가장 윗사람, 아브라함이 먼저 할례를 받았고, 그 후손들이 할례를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유일한 백성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한 명, 그다음에는 열한 명, 또 그다음에는 몇 백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당시에 그들은 하나님의 유일한 백성들, 하나님께 속한 유일한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여러분이 바로 하나님께 속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할례를 받으셨습니까? 우리 중에 할례를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후로 할례는 끝났습니다. 다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심령에 모시는 것이 할례입니다. 주님 앞에 진실함으로 나아가는 것이 곧 할례이며, 구원입니다. 지금의 할례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인치신 것으로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디를 다니든, 하나님께서 “떠나라” 하시면 떠났고, “저기로 가라” 하시면 그리로 갔으며, “민족이 움직여라” 하시면 그대로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갔습니다. 그들은 어디에 있든지 나라를 이루었다가도 가라 하면 또 갔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육신과 정체성이 하나님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옛날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진실로 마음에 모시지 않았습니다. 생활 패턴 속에서 하나님을 섬겼을 뿐입니다. 말로는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매번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속이 진정으로 구원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여러분,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가 무엇에서 구원받았는지를 자꾸 헷갈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에 대해 명확하게 말하지 못하고, 엉뚱하게 원치 않는 대답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죄에서의 구원’입니다.
‘죄에서 구원!’ (죄에서 구원!)
‘죄에서 구원!’ (죄에서 구원!)
‘죄에서 구원!’ (죄에서 구원!)
우리는 다 자기도 모르게 계속해서 죄를 짓습니다. 죄를 짓고 싶지 않는데도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죄에 계속 끌려 다닙니다.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은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마음의 법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있는 법은 세상의 법뿐입니다. 세상의 법은 범죄 행위가 걸리지 않으면 처벌받지 않습니다. 마음이 어떻든간에 처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법은 마음의 법입니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결단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쉽게 풀어 말하면, 우리가 죄를 안 짓고 살기 어렵기 때문에, 아예 죄 자체에 대한 형벌을 미리 그분이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도 범죄할 것에 대해서도, 미리 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나 절대 죄 짓지 않겠습니다!”라고 다짐해도, 몇 시간 지나면 또 죄를 짓게 됩니다. “다시 안 하겠습니다”라고 해도, 그다음 날 또 죄를 짓습니다. “미워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미워하고, “저렇게 간사한 짓 안 하겠습니다” 해도 결국 또 하게 됩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 상관없어, 다 괜찮아”라고 그냥 넘어가면, 그것은 계속 범죄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거 하면 안 되는데… 나는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나는 자유다! 그러니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비록 넘어지더라도 마음속으로는 “나는 하나님이 구원하신 자다! 나는 하나님께서 의로운 종으로, 또 그가 나를 아름다운 신자로 만들어주셨다! 하나님은 내게서 의를 이루신다! 성령께서 나를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로 삼으신다. 나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주장하며 이런 식으로 죄와 단절하고, “죄, 싫습니다! 죄를 범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선언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교회를 무너뜨리자! 같이 나와서 교회를 부수자!”고 한다고 해서 “그래? 심심한데 잘 됐다”며 따라나서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영적인 결이 맞닿아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속하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우리가 자꾸 쓰러지고, 실수하며, 다시 죄를 범하는 이 모든 것을 다 감당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가 대속하셨으나, 정말 구원받은 자는 누구냐? 그리스도인은 누구냐? “다시 죄를 범하지 않겠습니다.” 죄를 범했다면, “주여,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 부족한 자가 또 넘어졌습니다. 주여, 저를 굽어살펴 주시고, 제발 용납해 주십시오. 주여, 저를 당신의 품에 안아 주시고,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며 주 앞에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전부입니다. 우리의 육신적 부족함, 육신의 한계를 감안하셔서, 우리가 이 육신을 완전히 벗고 성경이 말하는 완전한 구원에 이를 때까지 주님은 오늘도 계속해서 우리를 돌보시고 인도하셔야 합니다.
계시록 말씀을 보면, 주님을 ‘충신과 진리’라고 했습니다[1]. 그것은 주님의 성품을 보여주는 표현이며, 주님의 별명입니다. 주님은 충신과 진실이십니다. 바로 그 ‘충신’을 우리가 “충실”로 하고 있습니다. 그는 진실이라 했습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에게 진실합니까? 주님은 누구에게든 진실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저는 거짓말 한 번도 안 해봤어요”라고 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예를 들어, “여보, 나 오늘 얼굴 괜찮아 보여?” 했을 때, “더럽게 못생겼는데.”라고 보이는 그대로 말하면, 진실한 것입니까? 그런 것이 진실이 아닙니다. 조금 부족해도 “너무 아름다워. 당신 정말 빛나”라고 말하는 것이 진실입니다.
바로 그런 맥락에서 ‘진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만이 인정하시는 진실함, 하나님만이 구사하실 수 있는 진실함. 바로 그러한 주님의 모습을 우리도 닮아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 속이 깨끗해야 합니다. 속이 진실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아, 이거 해! 저거 해! 기도해!” 하며 열심을 내던 자들이 다 교회를 떠나갔습니다. 그 사람들이 지금도 우리 교회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를 괴롭히고 있는 몇 사람이 그들과 연합해서 함께 움직이고 있습니다. 서로 통합니다. 분열세력과 지금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이 한 패입니다.
그들에게는 공통된 한 가지가 있습니다.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증하고 거짓됩니다. 교회에서 믿음을 강조하고, 소망도 강조합니다. 소망을 강조한다는 것은 천국을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을 우리의 믿음에 다 쏟아붓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이 변화되지 않았다면, 죄에서 떠나지 않았다면, 죄에서 구원되지 않았다면, 마음속에 성령이 거하셔서 그 영혼을 보호하시고, 그 영혼을 강력한 힘으로 지키시지 않으면 그런 노력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지켜져야 합니다. 마음이 변화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능력도, 소망도, 믿음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는 다양한 은사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병 고치는 은사, 방언의 은사 등 여러 가지가 나오는데, “너희들 이런 은사 다 갖고 싶지 않느냐? 이 은사를 사모하지 않느냐?” 하고 강조하면서, 마지막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은사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겠다. 최고의 은사.” 그리고 12장 31절에서 13장 1절로 이어서 말씀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앞서 말한 모든 은사는 아무 소용이 없다. 그것들은 꽹과리에 불과하다. 아무리 능력이 많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무의미하다[2].”
사랑하는 것은 마음이 구원받은 자들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은혜를 받았으면, 이제 그 은혜로 인해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절대 그 은혜를 저버리지 말자. 은혜를 절대 저버리지 말자!”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갖고 계신 영적 시스템 중 하나입니다. 은혜를 진심으로 기억하며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자는 그의 영혼도 더럽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겉으로 보면 신앙이 좋은 것 같습니다. 교회에도 매주 잘 출석합니다. 그런데 속으로 ‘저 사람을 어떻게 혼내줄까? 어떻게 고소할까? 교회를 좀 뜯어먹어볼까?’ 하고 다 타락해 버렸다면, 그런 좋은 모습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사무엘상 16장에는 성경에서 대단히 중요한 구절 중의 하나일 것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보실 때의 기준이 나오는데, 무엇을 보라 하셨습니까? “사무엘아, 외모를 보지 마라. 외모가 빛나고, 학식도 있고, 근사한 거? 그런 거 아니다. 나는 그 중심을 본다[3].” 이것이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The center of the heart’
또 예레미야서에 보면, 이것도 너무 중요한 말씀입니다. 구약에 기록돼 있는데, 이 말씀을 누군가 중에 인용해서 신약성경에 넣어놓았으면 참 좋았을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이 필요한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인류가 타락했기 때문에. 인류 가운데 의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마음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보시지, 신앙의 겉 행위를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17장에서는 “하나님은 사람의 심장을 살피시고, 폐부를 시험하신다[4]”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속', 곧 배 안에 있는 것이 진실한 마음의 행동을 결정하는 기관이라고 보았습니다. 그것은 양심을 말하는 것이고, 우리 마음 깊은 곳의 진실함을 가리키며, 생각과 뜻을 결정하는 내적인 중심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은혜 받은 자들입니다. 하지만 은혜를 받았다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이제부터는 그 은혜에 보답하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진심으로 깨달은 사람은 마치 번개를 한 번 맞은 듯한 충격을 경험하게 됩니다. “나, 지옥 갈 뻔했구나!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건져주셨구나…” 이런 마음이 우리 신앙의 끝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마음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마음속에 꿍꿍이가 있고, 교회를 향한 공격적인 마음을 품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과거 일부 신자들과 지금도 교회를 아프게 하는 이들을 보면, 마음에 여전히 다른 생각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무엇에서요? 죄에서.
‘죄에서 자유!’
‘마귀의 유혹에서 자유!’ (마귀 유혹에서 자유!)
‘사단의 공격에서 자유!’ (사단의 공격에서 자유!)
‘지옥의 끓는 불에서 자유!’ (지옥의 끓는 불에서 자유!)
여러분 모두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변화되어 신앙생활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말 이보다 더 쉽게 설명할 수는 없는데, 여러분의 심령이 거듭나서 변화 받고, 선한 심령이 되시란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마치 새 인류가 된듯 모든 면에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육신의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육신을 제어하면서, 어느 정도 눌러가면서 살아야 합니다. 죽는 날까지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고 육신에 안주해 버리면, 육에 속한 자로서 지옥행입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나는 예수 믿는데요.”라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지옥행일 수 있습니다. 애초에 진짜 신앙이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마음이 변화된 자는 어떤 원수가 방해하고 괴롭혀도 넘어가지 않습니다. 주님께 온전히 변화받아, 주님을 온전히 자기 안에 모시고, 온전히 자신의 인생 전체가 하나님으로 인해 변화되어, 지옥의 권세와 마귀의 모든 유혹과 죄의 힘을 극복하고 거룩한 성도로 살아가는 우리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앞으로 마음으로 교회를 사랑하시겠습니까?”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시겠다고 결심하시는 분,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충실히 신앙생활 하시겠다고 작정하신 분,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죄를 용서받고, 여전히 죄를 범할 수 있는 자신이라도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주님의 성령으로 싸워가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겠다고 결단하신 분은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신앙도 중요하지만, 마음 안에 진정한 변화가 있기를 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할 때, 내 마음을 돌아보며 고백합시다. “나는 마음이 변화된 신자입니다. 나는 성도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이며, 하늘에서 낳은 자입니다.” 하나님, 다시는 속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내 마음이 타락함으로 인해 주님을 가증하고 거짓되게 배반하지 않도록 지켜주시옵소서. 우리 다 함께 합심하여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들은 우리 성도들 모두를 주께서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가 섣불리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교회에 출석한다는 이유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고 우리가 정말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을 진정으로 영접하고, 주님께서 우리를 명하시고 인도하시도록 내어드리는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함을 우리 모두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시고,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마음에서 나오는 마음의 자유와 너그러움, 인자함으로 교회를 사랑하고, 서로 돕고, 서로 이해하고, 서로 용서함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의에 속한 자, 영에 속한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육신에 끌려 다니고, 육신이 유혹할 때마다 신앙이고 뭐고 다 버리는, 그런 실패하는 자들 같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시고, 우리의 중심에 주님을 모시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녹취: 성락교회 성락선교센터
[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계 19:11)
[2]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29~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3]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4]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 17: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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