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죽암
2020. 9. 25(금)
내가 일곱 살 때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학교에 입학한지 몇 개월이 안 되어 일학년부터 육학년까지 전교생을 운동장에 집합시켰다. 아침 조회시간이었다. 교장은 일본 군복을 입고 일본 칼을 옆구리에 차고 군모를 쓰고 있었다. 나는 키가 작아서 맨 앞줄에 서 있었다. 아침 햇살이 따갑게 목을 쪼이는데 감히 손을 들어 땀을 닦을 수가 없었다. 두 손바닥을 쭉 펴서 허벅지 쪽에 붙이고 부동자세로 교장선생님을 주목했다. 어떤 선배 학생은 자기 얼굴 가까이 날아와 괴롭히는 파리를 쫓으려고 손을 흔들었다가 앞에서 그것을 본 선생님이 와서 그 소년의 뺨을 힘껏 내리쳤다. ‘빠가 야로(바보자식)’라고 하면서 꾸짖었다.
교장은 옆구리에 차고 있던 긴 칼을 쭉 빼들더니 대 일본국민으로서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몸짓을 하고는 칼을 제 자리에 꽂았다. 그리고 한국인 남자선생님을 교장이 서 있는 교단위로 올라오게 했다. 그리고는 너희는 이 선생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는가? 하고 소리치더니 ‘고노 야로(이 자식)’가 금지령을 어기고 한국에서 한국말을 했다는 설명하더니 그 선생님의 뺨을 힘껏 내쳤다. 선생님은 뺨을 맞고는 그 높은 교단에서 땅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 순간 전교생의 입에서는 동시에 큰 신음 소리가 합창하듯이 쏟아졌다. 그리고 모두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내 나이 일곱 살에 맨 앞줄에서 그 광경을 목도하고 어깨가 들썩거려지고 눈에는 큰 눈물방울이 매달렸다. 소리를 낼 수도 없는 두려움에 떨었다. 나는 학교에서 한국말을 하면 저렇게 봉변을 당하는구나! 하고 처음 느꼈다. 그날 온 종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치 충격에 벙어리가 된 듯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울고 또 울면서 집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지금도 70년이 지났지만 그 때 그 광경이 너무도 생생하여 눈물이 맺힌다.
그 후 얼마 있다가 해방이 됐다는 소식에 온 국민이 태극기를 들고 나와 비석산에 올라가 일본군 전몰 장군들의 유령비를 동아줄로 매고 수백 명이 끌어당겨 땅에 쓰러트렸다. 9월 초에 학교에 갔을 때 새 교장 선생님은 우리나라가 해방 됐다는 것은 우리말을 다시 찾았다는 뜻이라고 말씀하시고 누구든지 진정한 애국자가 되려면 한국말을 배워서 잘 하고 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 때 받은 충격과 또 해방의 의미를 듣고는 한국말과 국어국문을 잘 해야겠다는 생각을 항상 하면서 자랐다.
세종대왕은 우리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었다. 한글이 있어서 한국말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성경을 처음 배웠을 때 문득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했는데 한국말로 씌여진 것에 놀랐고 그래서 한국말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여겼다. 성경을 수십 번 다독하고는 하나님이 나를 불러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다. 이는 내가 한국말을 할 줄 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 여겼다. 나중에 대학에 가서도, 신학교에 가서도 느낀 바는 한국말이기에 하나님의 의도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더 감사했다.
한국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입으로 전하고 또 한국말로 책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요즘은 한국어가 많이 변형되어 한국말 하는 사람은 나로써 마지막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내가 한국말로 『하나님의 의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저술했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가지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내가 쓴 책은 순 한국말로 된 마지막 책이 될지도 모른다.
視無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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